가슴청년, 희망을 도둑맞지 마라
최용주 지음 | 공감
가슴청년, 희망을 도둑맞지 마라
최용주 지음
공감 / 2013년 6월 / 256쪽 / 14,000원
제1교시 뒤늦은 출발은 없다
나에게는 두 개의 별명이 있다. 하나는 ‘지각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개척교회 목사’다. 결혼도 늦게 하고, 아이도 늦게 낳고, 박사 학위도 늦게 따고, 교수도 늦게 되었다. 모두 마흔을 넘긴 후의 일이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지각 인생’이다. 마흔이 넘어 박사 학위를 받고 보니 한국에 귀국해서도 교수 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생긴 학과로 가게 되었다. 새로 생긴 학과의 선임 교수가 되고 보니 자의든 타의든 해당 학과를 ‘부흥’시켜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학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학생들이 졸업 후에 취직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생긴 두 번째 별명이 ‘개척교회 목사’다. ‘지각 인생’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신생 학과였던 홍익대학교 광고홍보학부를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홍보학과로 부흥시킨 ‘개척교회 목사’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
등대가 되기로 약속하다
홍익대학교 광고홍보학부는 1998년도에 신설되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같은 해에 신설된 대구효성가톨릭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학생들을 지도하고, 2000년 2학기에 홍익대 광고홍보학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1기인 98학번 학생들이 3학년이었는데, 전임 교수가 한 명도 없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98학번 학생들이 3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광고홍보학부 전임 교수가 부임했으나,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 신설 학과여서 선배들도 없는 데다, 전임 교수 없이 2년을 지내다가 3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모시게 된 전임 교수가 한 학기 만에 떠나버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를 옮기고 첫 학기, 첫 강의 시간에 학생회장이 대표로 일어나 물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교수님, 혹시 다른 학교로 가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대답했다. “난 다른 학교로 가지 않을 거다. 이미 한 번 학교를 옮긴 데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학교로 가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교수로서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을 펼치려면 이곳에 있어야 한다. 내 꿈은 홍익대학교 광고홍보학부를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홍보학부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더 했다. 자발적인 약속이자 다짐이었다. “내가 광고홍보학부의 등대가 되겠다. 앞으로 2년 동안 내 연구실은 밤 11시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을 거다.”
전임 교수가 없던 당시에는 광고회사 출신의 겸임 교수들과 강사들이 수업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면 모두 서울로 올라가기 때문에 오후 5~6시 이후에는 광고홍보학부가 있는 도서관 건물 4층 교수 연구실에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특히나 겨울 학기에는 더욱 깜깜하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학생들의 마음 역시 어둡고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등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혼자만 손해를 볼 수는 없어 나도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밤 11시까지 내가 연구실의 불을 밝히는 대신, 학생들도 그 시간까지 무엇이든 하도록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든, 광고 공모전 준비를 하든, 광고 동아리 활동을 하든, 영어 공부를 하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로 했다. 나와 학생들과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 밤에는 히터가 들어오지 않아 연구실이 무척이나 추웠다. 전기 히터를 장만했지만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와 무릎 담요를 덮고 공부를 해야 했다.
2년 동안 연구실 불을 밝히고 있으면서 때때로 후회도 하고, 참 미련한 짓이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 오히려 내가 학생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밤 11시까지 연구실 불을 밝히고 있었던 2년 반 동안 반 강제로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그때의 공부하는 습관이 계속 이어져 이후 많은 논문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결국 학생들이 나를 좋은 교수로 만들어준 셈이다.
최선의 커리큘럼을 만들다
학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리큘럼이 아닐까 한다. 먼저 기존 광고홍보학과들의 커리큘럼을 수집, 분석해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하지만 커리큘럼에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필요하다. 당시만 해도 업계 상위권의 광고회사들은 광고홍보학과 출신의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일류 대학 출신들을 뽑아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광고홍보학과의 존재 이유가 무색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우리 학교 광고홍보학과를 나와 광고회사나 홍보회사에 들어가면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러한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커리큘럼의 목표를 잡았다. 이론 과목은 꼭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실무 과목에 좀 더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한편 전국 30개 광고홍보학과의 커리큘럼을 분석해보니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하여, 우리만의 차별화된 커리큘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홍대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반영하여 커리큘럼에 디자인 및 크리에이티브 관련 과목을 열 개 정도 넣었다. 그다음으로 차별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인문학적 소양이다. 당장 눈앞에 주어진 일도 중요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멀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 관련 과목들을 연결시킨 광고와 인류학, 광고와 사회학, 광고와 심리학, 광고음악의 이해, 미술 감상의 이해 등의 과목을 만들었다.
서서히 열매가 맺히다
노력 끝에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마련했으니 이제 그 커리큘럼이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그 안에 양질의 콘텐츠를 담아내야 했다. 우선 현장 실무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전문가의 지도가 필요했다. 광고와 홍보 분야에서 실습 과목을 담당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로 겸임 교수와 강사진을 모셨다. 더불어 우리 전임 교수들은 학생들이 광고홍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튼튼히 쌓을 수 있도록 이론 과목의 수업을 담당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자신감을 기를 수 있도록 광고 공모전 참가를 적극 권장했다. 고맙게도 학생들은 스스로 광고 동아리들을 만들어 밤을 새며 공모전을 준비했고, 교수들은 공모전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기획서를 열심히 지도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작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더니, 몇 년 후에는 대학생 공모전을 모조리 휩쓸기 시작했다. 학교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학과 학생들이 광고홍보학부를 부전공과 복수전공으로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한편 가장 큰 열매는 기업 현장에서 맺혀가고 있었다. 광고회사와 홍보회사 등에서 홍익대 광고홍보학부 출신들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학부 출신이 인정받은 것도 물론 기쁜 일이지만, 커리큘럼을 만들 당시에 세웠던 우리의 목표가 실현된 것 같아 더없이 기쁜 마음이었다. 이렇게 홍익대 광고홍보학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홍보학과를 목표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제2교시 고통은 열정의 원동력이다
젊은 날의 초상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은 모범생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부모님의 기대나 바람과는 달리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마냥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드럼을 배우겠다고 음악 학원에 덜컥 등록을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밴드를 만들어서 미8군에 진출할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어머니가 드럼 채를 수없이 꺾어버리는 바람에 대망을 이룰 수는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일찌감치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태화관에서 이화여고 여학생들과 독일어 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고3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 공부 걱정이 됐다. 뒤늦게 다시 공부에 몰두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여튼 1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재수의 길을 거쳐 삼수로까지 이어졌다.
누구나 특별한 존재
삼수 끝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예상치 않게 어두운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열등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에 다니는데, 나만 별 볼 일 없는 대학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우울하고 재미도 없었다. 당시는 고교평준화가 되기 전이어서 서울대학에 겨우 한두 명 입학시키는 고등학교가 대부분이었는데, 우리 학교는 절반가량이 서울대학에 진학했다. 한편으로는 같은 학과에 다니면서도 소위 일류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못난 자부심 때문에 다른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한 탓도 있었다. 속으로 과 동기들을 깔보며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엘리트라도 되는 양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미안하고 창피한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다.
인간은 누구나 귀한 존재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철없던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이나 배경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면 열등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면 우월감에 빠지고 만다. 지금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러한 감정에 빠져 있다면 스스로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열등감이나 우월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부디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
열혈 장사꾼
대학에 갔으니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막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생각지도 않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것이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내고 피신하는 바람에 졸지에 집도 절도 없어지고 말았다. 난생처음 가난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가난을 처음 경험하던 그 당시 반찬이 없어 매일 파김치만 지겹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려는데 돈이 없어 면목동에서 종로2가까지 걸어서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하얀 내 손을 보면서 김기진의 〈백수의 탄식〉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그 길로 무작정 큰집에 찾아가 큰아버지께 장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며 10만 원을 융통해왔다. 지금으로 치자면 100만 원쯤 되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 청량리 경동시장에 가서 리어카 한 대를 샀다. 그다음 대저울을 하나 샀고, 나머지는 감자를 사는 데 투자했다. 날씨가 더우니 시원하고 목 좋은 곳에서 편안히 장사를 하면 될 터인데, 초보자인 데다가 성질까지 급한지라 요령도 없이 하루 종일 청량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감자를 팔았다. 다행히 하루 만에 감자 원금만큼이나 돈이 남았다. 며칠 동안 감자를 팔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드디어 품목을 과일로 바꿨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장사를 한 후에 드디어 원금 10만 원을 회수했다.
돈을 들고 큰아버지께 갚으러 갔더니, 기특하다며 어머니와 함께 본격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밑천을 대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큰어머니가 마음을 써주신 덕분이었다. 큰집 식구들의 배려 덕분에 어머니와 함께 작은 구멍가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장사와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지만 학교에 갈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아지고 수업 시간에 지각을 밥 먹듯이 하다 보니 학점이 좋게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튼 열심히 일한 끝에 마침내 달동네에 작은 집 한 칸을 장만할 수 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장사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았다. 언제나 앞으로 나는 잘될 거라고 믿으며 밝고 씩씩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속에 ‘가슴청년’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반이 되니 정말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전공인 경제학이 한번 도전해볼 만한 학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신문방송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신문기자나 방송사 PD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부 때와 전공이 달라졌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제대로 다시 공부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서 그것이 독일 유학으로까지 이어졌다.
든든한 버팀목, 어머니
독일에 가서 어학 과정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전공 수업을 시작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에서 보내주는 생활비가 끊겼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지도교수와 갈등이 생겼다. 나는 어머니께서 혼자 고생하시는 것이 안타까워 빨리 공부를 마치려고 다른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장학금을 탄 후에는 당신의 프로젝트에 신경도 안 쓰고 잘 도와주지도 않는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결국 지도교수와 헤어지고 장학금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한 학기 휴학을 하고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 받은 장학금도 다 갚아버렸다. 독일인 친구는 더 이상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받은 장학금까지 다시 뱉어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어머니가 했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면목이 없었지만 당시 사정을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도교수와 오해가 생겨서 더 이상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노라고. 공장에서 일하며 그동안 받았던 장학금을 다 갚긴 했는데, 생활비가 없어 다시 전처럼 어머니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무조건 잘했다고 하셨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가 힘들고 하기 싫어서 박사 과정을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너라. 하지만 돈 때문이라면 절대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힘든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그 말씀 덕분이었다.
내 이름은 “긍정 최”
공부를 마치고 드디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1년 만의 일이다.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은 지도교수님이 당신의 저서에 내가 박사 학위 논문에서 발전시킨 이론적 모델을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새로운 이론 중의 하나로 소개해준 일이다. 나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었다. 후에 내 논문의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던 교수님이 내 모델을 피알(PR) 분야에 적용시켜 새로운 모델을 학술지에 발표하면서 이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다수 인용되는 기회도 더불어 얻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논문의 일부를 발전시켜 학회에 발표했는데, 그 논문이 그해 신진 학자에게 수여하는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력하고 애쓴 시간에 대한 보상이 조금씩 나타나는 듯해서 매우 뿌듯하고 감사했다.
귀국해서는 홍대와 고대에서 시간강사를 했다. 다음 해에는 결혼을 하고 방송위원회 정책연구실에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아들이 태어나 늦깎이 아버지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고생 끝에 찾아온 낙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교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방송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여러 군데 교수 초빙에 지원했는데 계속 낙방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에 신설된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 살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