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 발품팔아 뉴욕 가다
박범진 지음 | 멘토프레스
거북, 발품팔아 뉴욕 가다
박범진 지음
멘토프레스 / 2012년 11월 / 219쪽 / 14,000원
Prologue 뉴욕과의 인연
모교의 해외인턴 사업팀에서 내가 맡은 일이 끝나갈 무렵, 앞으로 어떤 길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해외인턴 연수 프로그램인 WEST(Work, English Study, Travel)를 만나게 되었다. 커리큘럼이 매력적이었다. 총 18개월의 취업비자 중 어학연수 5개월, 인턴십 12개월, 여행 1개월이었다. 알맞은 시기에 나타나준 WEST는 내가 가야 할 다음 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내가 또다시 해외인턴에 관심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호주에서는 단순 노동만 했다. 돈은 벌었지만 일하는 순간이 즐겁지 않았다. 반면에 정부에서 추진하는 WEST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학생들의 전공을 살려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런데 참가비용이 문제였다. 2~5개월의 어학연수와 인턴 구직, 생활에 도움을 주는 스폰서 비용까지 포함하면 8,300달러가 넘었다. 그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가까스로 참가비를 지불한다 해도 항공비, 숙박 및 생활비 등 나머지 금액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금전적 문제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지원금을 보조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하였고, 세 차례의 면접 끝에 참가비 전액인 1,024만 원을 지원받았다. 항공비와 생활비는 그동안 호주와 한국에서 일하며 저축해둔 800만 원을 쓰기로 했다. 지원금뿐만 아니라 비자발급에도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대학을 쉬지 않고 3학년까지 다녔고, 호주도 1년간 다녀오니 내 나이 만 25세가 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군미필자는 만 25세가 넘으면 해외여행에 제한이 생기고, 여권도 연장할 수 없다. WEST프로그램으로 받게 될 미국 J1(문화교류) 비자는 2011년 2월까지인데, 여권 만료가 2010년 12월 31일이니 문제였다. 혼자서 병무청과 시청을 뛰어다니며 알아봤지만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외교통상부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니 친절한 WEST 담당선생님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고, 며칠이 지나 외교통상부에서 비자발급과 출국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Chapter 1 뉴요커로서의 첫 경험 - 어학연수
뉴욕 공항은 사파리
밤 9시,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입국관리소에서 관리관에게 서류를 건넸다. 관리관은 여권을 스캐너에 찍찍 긁더니 모니터를 응시하였다. 그의 표정 변화만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지문 채취기에 손가락을 갖다 대라는 행동을 취했다. 지문을 스캔하고 안면 사진을 찍었다. 의외로 간단하게 심사가 끝나고 입국도장이 찍힌 여권과 서류를 돌려받았다.
드디어 뉴욕의 입장문이 열렸다. 이 순간을 위해 WEST 지원에서부터 입국심사까지 그 멀고 험한 밀림을 헤쳐 나왔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새끼 동물들이 처음으로 보금자리를 빠져나와 외출 나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터미널의 낯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내가 꼭 그러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들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호기심도 유발했다. 먼저 나와 있던 친구 재훈이가 뉴욕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로 갔고, 그가 자리를 떠나고 몇 분이 지나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은 재훈이가 수첩을 분실하여 낸 소리였다. 불과 5초도 걸리지 않은 순간에 누군가 잽싸게 집어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첩 안에는 첫 달 생활비 1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어려운 과정은 모두 헤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어수룩한 고라니 떼가 되어 또 다른 사파리 무리 속에 서 있었다.
가까스로 터미널을 빠져나오니 승강장에는 불법택시를 운영하는 야생원숭이들이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서로 자신의 차에 타라고 잡아끌더니 옆에 나타난 다른 야생원숭이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다툼이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가족이 기다린다고 거짓말을 하고,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저 멀리서 한국인 아저씨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미리 불러놓은 한국인 택시 아저씨였다. 대부분의 학생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한국 교민이 운행하는 택시를 이용하길 권장한다. 일반 택시에 비해 비용이 저렴하고 시간에 맞추어 부를 수 있는 콜서비스도 가능하다. 한국 택시 전화번호는 그 지역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확실한 시차 적응
인터넷을 통해 미리 계약을 맺은 하숙집으로 향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안한 숙소가 있었지만, 비용이 엄청 비쌌다. 그래서 저렴한 룸셰어를 구했다. 룸셰어란 한국의 하숙과 비슷한 개념인데, 한 집을 여러 명이 함께 공유하여 비용을 분담하는 것을 말한다. 뉴욕에서 집을 구할 때 한국인과 살고 싶다면 heykorean.com을, 외국인과 살고 싶다면 craiglist.com을 참고하면 좋다. 다음 날 소셜 시큐리티 카드(사회보장번호) 발급을 신청했다. 미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발급하는 데 4주 정도 소요되므로 최대한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다. 은행계좌는 어학원의 학생증이 나오고 난 뒤 신청했다. 미국 은행은 매달 계좌사용료를 내야 하는데 학생인 경우에는 면제다.
SMOKING이 뭐가 문제야?
WEST프로그램은 처음 4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은 후 인턴십을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생활비도 벌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어학연수 기간 동안에도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취업정보에 생소한 처음에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직접 뛰어다녀야 했다. 예를 들어, 길가의 식당 창문에 구인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즉시 들어가 면접을 보았다. 한번 하고 나니 용기가 생겨 구인광고가 있는 식당에는 모두 들어가 면접을 보았다. 결국 한 곳에서 합격했고 도착 후 나흘 만에 일을 시작했다. 그곳은 작은 카페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주문을 받고 음식을 서빙하는 웨이터였다.
한국과 호주의 오성급 호텔에서 일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업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언어가 문제였다. 출근 첫날, 첫 손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발음과 말의 속도도 문제였지만 사용하는 단어가 생소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라서 모르는 게 많았다. 결국 미국에서의 첫 아르바이트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이틀 만에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나는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heykorean.com)에서 다른 일자리를 검색했다. 의외로 빨리 다음 아르바이트를 잡았다.
장소는 한국식 스파였다. 이곳에서의 알바는 미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 스페인 직원들도 함께 일했고, 손님들의 대부분도 미국인이었다. 일하며 사용한 언어도 실생활에서 필요한 표현들이었다. 그리고 한국 회사라 그런지 마음이 놓였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한국인 매니저와 동료들이 가르쳐주니 든든했다. 그리고 교육기간으로 따로 일정을 잡아서 내가 스파의 영어메뉴에 적응할 수 있게 기다려주었다. 일을 하나씩 처리할 수 있게 되니 첫 알바에서 상실된 자신감이 회복되었다.
어학연수 Park Ave. Armory
뉴욕 지역의 WEST학생을 책임지고 담당하는 스폰서와 오리엔테이션을 가지고 9월부터 맨해튼 중심에 위치한 CUNY(City University of New York)의 헌터(Hunter)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어학연수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나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보니 수업시간에는 모범생이 될 수 없었다. 숙제를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했고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만 해서 선생님께 혼나는 문제아였다.
어느 날, 미셸(Michele) 선생님이 에세이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사랑이야기였다. 감정이 너무나 잘 표현된 걸로 보아 전문작가가 쓴 글을 발췌해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같은 반 여학생이 숙제로 낸 에세이라며 선생님의 극찬이 쏟아졌다.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나도 영어로 쓴 에세이로 칭찬받고 싶어졌다. 당시 학생은 매주 한 편의 에세이를 제출하고, 선생님의 검토 후 수정을 요청받은 에세이는 퇴고해서 다시 검토를 받아야 했는데, 나의 에세이는 선생님이 만족해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나는 미국의 정서를 담은 문장을 구사하고 싶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첫 번째 시도 - 도서관에서 십년지기 친구 『A Dog of Flanders』를 만나다: 공공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기로 했다. 손쉽게 도서대여증을 만들었고, 수많은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한 책에 시선이 머물렀고 책을 꺼내 들자마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주위 아이들이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십년지기 친구를 만났던 것이다. 『A Dog of Flanders』. 내가 초등학교 때 EBS방송에서 방영했던 '플란다스의 개'라는 유명한 만화영화였다. 그 책 한 권만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 장씩 읽어내려 가는데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장면들이 오래된 사진처럼 하나씩 지나갔다.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사전을 펼치지 않았다. 알고 있던 내용이라서 그런지 몇 개의 단어 뜻을 몰라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어책에 대한 거부감 없이 읽어나갔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두 번째 시도 - 반나절 사람 구경을 하고 그 속에서 에세이 소재를 찾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센트럴 파크'로 여행을 떠났다. 고요한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는 등 진짜 작가인 것처럼 폼을 잡아보았다. 노트에 에세이를 끄적거리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의 지루함을 날려주었다. 그렇게 반나절 사람 구경을 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입장도 고려해보게 되고, 그 속에서 소재를 찾아 에세이를 쓸 수 있었다.
에세이 과제에 이토록 애를 쓰는 이유는 미셸 선생님이 감탄할 만큼 영어다운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수차례나 시도했지만 나의 에세이는 선생님의 빨간 펜에 의해 처참하게 칼질을 당해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에세이 일곱 번째 수업은 헌터 대학의 건물 중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Park Ave. Armory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없던 터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는데, 건물에 대해 설명 중이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에세이는 이 Armory를 주제로 써주세요."
그 후 나는 제출해야 할 전날 밤까지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구한 박물관 자료를 짜깁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주인집 할아버지의 서재를 뒤적거렸다. 수십 개의 DVD 사이에서 그나마 최신영화로 보이는 케이스를 하나 발견했다.
.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는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였다. 껌껌한 방에서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이 일자리가 필요해서 박물관에 취직했다는 점이 나와 비슷해. 마지막 에세이는 미국생활을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로 꾸미는 거야. 미국에 인턴십을 구하러 온 내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Armory에 보안요원으로 취직을 하는 거지. 야간 경비를 서면서 혼자 무기고를 지키다가 그 안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소리 나는 쪽으로 따라가 보니 무기고 안의 유물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거지!' 영화에서 본 영상들과 견학했던 무기고의 모습들을 접목시키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런데 에세이를 쓴다고 늦게 잠들어서 마지막 수업에 지각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서는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미셸 선생님까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붐진, You did a real great job! I loved your essay." 다름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내 글을 낭독한 거였다. 작은 오기에서 시작된 경쟁을 통해 내 영작실력은 크게 발전되었다. 그 수업 이후로 에세이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라 취미가 되었고, 영어실력도 부쩍 늘어 면접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Chapter 2 구직난 - 기회를 볼 수 있는 눈과 손
FDNY의 무단침입
2010년의 해가 밝은 지 두 달이 지났다. 어학연수가 끝나고 나서 바로 스폰서에서 인턴십을 연결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생계를 유지해주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었는데, 인턴 구직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월세지출을 줄이기 위해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이 있는 플러싱에서 태국인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이층 주택이었지만, 얇은 판자로 집을 개조하여 한 층에 작은 방을 4~5개 만들었다. 한국의 고시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에서 저렴하다는 이유로 반지하 방을 선택했다.
이사하고 첫 일요일 오후였다. 내 방에서 구직정보를 찾고 있었는데 밖에서 사이렌 소리도 울리고 시끌시끌했다. 옆집에 사고라도 났나 싶었다. 그때 갑자기 2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일 오후라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참다못해 내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누가 밖에서 내 방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이 무너질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방화복에 산소통까지 맨 소방관이었다. 그들은 내 옷장을 치우더니 벽을 두드리는 쪽으로 향했다. 옷장 뒤에는 비상대피문이 있었다. 그들은 내 방을 헤집으며 비상문을 열려고 애를 썼다. 나에게 실례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집구조가 어디 있냐며, 집을 이렇게 개조하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나는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만 걸었다.
달려온 집주인은 대뜸 내 방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왜 소방관들이 들어오게 문을 열었어? 다시는 열어주지 마." 그는 어질러진 방을 보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 "내가 열어준 게 아니고 문을 따고 들어왔어요. 난 내 방에 있었어요. 자, 방을 보세요. 저에게 사과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돌아갔다. 집주인의 여동생이 오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청소를 하고 젖은 수건을 보일러실에서 건조시켰는데,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연기로 착각하고 옆집에서 신고한 것이란다. 그러면서 이 불미스런 상황과 오빠의 태도에 대해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루빨리 좋은 인턴십을 구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천근만근 이력서
온라인 구직 사이트(craiglist.com)를 통해 보낸 수백 통의 이력서에 대한 답장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삶의 원동력인 발품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꼭 한번 일해보고 싶었던 유망한 회사 두 곳을 정해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미리 정해둔 면접도, 약속도 없지만 발품을 판다면 성의를 봐서라도 나에게 면접의 기회를 줄 것이라 기대했다. 출발하기 전, 회사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그려 보았다. 무작정 찾아가 회사에 지원서를 낼 때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았다.
[Case 1 : 방문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경우] 이 경우 최선을 다해서 면접을 보고 기회를 잡으면 된다.[Case 2 : 지원서는 온라인으로만 받는다고 문전박대하는 경우] 두 가지 상황으로 다시 나뉜다. ①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림 … 인정 좋은 사람은 이력서를 받아준다.
② 부탁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거절 … 이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곳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이력서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