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전성철 지음 | IGMbooks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전성철 지음
IGMbooks / 2012년 5월 / 320쪽 / 14,000원
첫 번째 이야기 - 너무나 야무진 꿈
You made it / 파트너를 향한 지옥길: 1987년 11월 27일 저녁, 나는 사무실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인가? 5시에 시작된 파트너 회의는 네 시간 반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회의의 안건은 바로 신임 파트너 선발이었다. 거의 10시가 다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의 방문을 노크했다. 나의 사부였던 마빈 골드먼 파트너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껴안으면서 "You made it"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4년 만에 맨해튼의 명망 있는 로펌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당시 최단 기록이었다. 보통의 경우 파트너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소 8년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로펌들은 법과대학을 나온 신참 변호사들을 뽑아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택해 8년 동안 고된 훈련을 시키는데, 8년이 지나면 모두 운명적인 시험에 직면한다. 바로 파트너 승진 심사다. 이 심사는 가혹하다. 이른바 '승진 아니면 퇴사'라는 제도 때문이다. 나는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로펌에서 이렇게 8년씩 죽을 고생을 하며 경쟁하고 나서 결국 파트너가 되지 못한 사람을 몇 알고 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내 친구 에드 콕스다. 내가 리드&프리스트에서 일하게 된 첫날 골드먼은 나에게 에드 콕스와 같이 잘 일해보라고 했다. 에드는 닉슨 대통령의 맏사위, 즉 맏딸 퍼트리샤의 남편이다.
그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다 거치고, 당시 미국 로펌 순위 1위에 해당하는 '커배스, 스와인&무어'라는 펌에 들어가 8년간 파트너를 향한 고된 행진을 했으나, 파트너 심사에서 떨어져 파트너가 되지 못했다. 그 후 그 로펌을 떠날 수밖에 없어 국영 에너지 회사의 사내 법률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3년 일한 후 리드&프리스트로 옮겼는데, 들어오면서 2~3년 안에 상당한 고객을 유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의 입장은 매우 어려워질 터였다. 에드의 이런 입장과 나의 입장이 합쳐져 우리는 기가 막힌 사업 파트너가 되었고 많은 일을 함께했다.
꿈을 세우다: 내가 미국의 로스쿨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1972년, 『법적인 사고』란 책을 읽고 나서였다. 나는 당시 아르바이트로 미8군의 군무원을 위해 번역을 해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사무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심심해서 몇 페이지를 읽어보다가 그만 그 책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 달 정도 고민한 끝에 미국의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GO!': 1973년 4월, 나는 사병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나의 머릿속은 항상 로스쿨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아야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영주권을 얻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다행히 미국 시민권을 가진 형님이 계셨고, 미국 시민의 동생은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다음 과제는 LSAT(Law School Admission Test, 미국의 법과 대학원 법학시험)였다. 미국에서 LSAT를 관장하는 ETS에 편지를 썼더니 곧장 응시 원서가 왔다. 지원을 하면 미8군 영내에서 미군들과 같이 시험을 칠 수 있다는 말도 함께였다. 나는 LSAT 시험을 치렀고, 성적이 420점대로 나와 실망했다. 그래도 공인받은 로스쿨에 가려면 하버드, 예일 같은 데는 LSAT 성적이 800점 만점에 700점 정도는 되어야 하고, 아무리 시시한 데라도 적어도 550점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딘가에서 미국에는 LSAT 준비 학원이 있으며, 매우 잘 가르쳐 미국 학생들도 거기를 다니고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나의 결정을 쉽게 해주었다. 그래, 일단 미국으로 가자.
암초가 되어버린 시위 경력: 나는 제대하기 3개월 전쯤 여권을 신청했다. 그때는 여권을 신청하면 제일 먼저 신원조회를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제대하는 날까지 신원조회가 떨어지지 않았다. 제대를 하자마자 제일 먼저 신원조회 결과부터 알아본 나는 기가 막힌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해외여행 부적격자라는 판정이 내려졌다는 게 아닌가. 그 이유는 대학 때의 시위 경력 때문이라 했다. 대학을 다닐 때 시위를 하긴 했지만, 그렇게 과격하게 한 것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었구나'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대전피혁에 취업했다.
포기하기엔 너무 간절한 내 꿈 / 마지막 유혹: 나는 대전피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그럭저럭 6개월 정도가 지났다. 재미있고 편안했다. 그 재미와 편안함에 익숙해지면서 내 마음속에 있던 상처도 같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로스쿨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날 선배에게 그런 심정을 토로했더니 그가 "중앙정보부에 진정서를 한번 내보라"고 했다. 일주일 후 36장에 달하는 진정서가 만들어졌다. 내가 시위를 했지만 그렇게 과격분자가 아니었음을 썼고, 왜 내가 3선개헌 반대 시위 때의 시위 주동자에서 그 후 온건론자로 변했는지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썼고, 또 로스쿨을 향한 나의 꿈을 썼다. 나는 그것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발송했다.
다시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10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여직원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하여, 전화를 하니 누나가 "철아, 너 신원조회 떨어졌다. 여권 신청하면 된다고 하더라" 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뒤 나에게 뜻밖의 유혹이 다가왔다. 그것은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자기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우선 월급이 파격적으로 높았다. 대전피혁에서 10만 원 받았는데 여기서는 25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우선 돈을 좀 모으자, 미국에 가서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그 회사에 출근을 했다. 그런데 몇 달 근무하자 결국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살 길은 이 길이 아니었다. 나는 가야 했다.
두 번째 이야기 - 불행으로 위장된 축복
남경 대학의 버스보이 / 체중 50킬로그램의 공장 직공: 1977년 7월 13일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주머니에 700달러 정도의 돈밖에 없었다. 도착하는 첫날 저녁 미네소타 대학 주변에 하숙집을 구하고, 다음 날 '난킹(남경)'이라는 중국 식당에 일자리를 구했다. 미국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면 처음 한 달 동안은 버스보이(Bus-Boy)라는 것을 해야 했다. 그것은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나면 음식을 나르고, 손님들이 먹고 나면 그릇을 치우는 일이었다. 한두 달 동안 이 일을 잘 수행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웨이터가 된다. 그런데 버스보이 생활을 며칠 경험하고 나니, 내 신체 상태를 가지고 그 무거운 쟁반을 한 달 동안 나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육체의 힘이 덜 들어가는 일을 찾아야 했다. 마침 교회에서 만난 젊은이가 소개하여 빵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 일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고단해서 꼼짝을 못했다. 그래서 신문을 사서 다시 구인란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거기서 기가 막힌 것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수위를 구한다는 광고였다. 수위를 하면 공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다. 발전소 야적장에서 경비를 하는 일이었다. 일하는 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였다. 초저임금이었지만 나는 좋다고 했다. 밤에 아무도 없으면 공부하기도 더 쉬우리라. 내가 수위라는 직업에 안착한 것은 미국에 온 지 두 달 만이었다. 나는 LSAT 학원을 찾았다. 6주 코스가 있었다. 나는 11월 말경에 치는 LSAT를 신청했다. 그러면서 전국의 로스쿨에 지원서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로스쿨들에서 원서가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1월 말에 LSAT를 쳤다.
하버드 로스쿨: 12월의 어느 날, ETS에서 편지가 왔다. 540점대였다. 2년쯤 전 한국에서 쳤을 때보다 무려 120점 정도 나아졌지만 그래도 실망이었다. 이제 지원할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우선 미네소타 대학을 선정했다. 내가 사는 주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만약 합격하면 그 주의 주민으로서 등록금이 일반 사립대학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을 선정했다. 안 될 것이 너무나 확실했지만 그래도 한번 응시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UCLA, 뉴욕 대학, 조지타운 대학을 선정했다.
나는 미네소타의 택시 운전사 / 첫 미국인 친구 빌: 수위로 석 달 정도 일을 하자 그 직업에 아무런 불평이 없었지만, 전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몸이 엄청나게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택시 운전사였다. 미니애폴리스의 택시 회사는 전과가 없고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그날로 택시를 한 대 내주었다. 그리고 한 2~3주 정도 일하고 난 어느 날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택시를 모는데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내 차가 다른 차와 부딪쳤던 것이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고 사람도 다치지 않았지만, 내 차의 문 쪽이 움푹하게 우그러졌고 상대방 차의 범퍼가 휘어 있었다. 그 순간 '아이구, 쫓겨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내가 그런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데도 어떤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뜻이 있고, 도리어 무엇인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계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택시 운전사에게 쫓겨난 것도 역시 그런 예의 하나였다. 어느 날 리치필드라는 동네에 있는 조그만 은행에 구인광고가 난 것을 보고 지원했다. 이른바 텔러, 즉 은행 출납원 자리였다. 첫 출근을 해서 가보았더니 텔러 35명 중 내가 유일한 남자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 일에도, 여성 동료들과 지내는 데도 조금씩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창구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인 청년 한 명이 와서 예금을 했다. 그러고는 뜻밖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를 빌(Bill)이라고 소개하면서 몇 달 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며칠 후 그가 또다시 나타났다. 내 창구에서 기다리는 줄이 다른 창구보다 더 길었는데도 그는 내 창구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하더니 어느 날 나에게 퇴근 후 저녁 식사를 같이 한번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좋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는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빌은 그 후 나의 학생 생활에서 잊지 못할 좋은 친구가 되었다.
너도 찾아보면 잘하는 일이 있을 거야: 미국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빚을 거의 3천 달러나 지고 있었다. 또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목돈이 필요할 텐데 그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다. 2월 말경이었다고 기억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국 유학생이 자기가 '와이키키'라는 중국집에서 일했는데 거기에 취직을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근무 조건도 좋다고 했다. 귀가 번쩍 띄었다. 나는 은행에서 오후 5시면 퇴근을 했다. 그렇다면 저녁 시간에 이 식당에서 일하면 어떨까? 바로 다음 날 그 식당을 찾아가 지원서를 냈다. 지배인은 자신을 마이크라고 소개하고, 자신도 유학생으로 왔는데 아르바이트로 이곳에서 일하다가 공부를 그만두고 이 일만 하게 되었다면서, 우선 버스보이부터 시작해보라고 했다. 나는 첫 한 달 동안 버스보이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다음에 드디어 웨이터로 승진을 했다. 두 개의 직장을 가지고 마음 편하게 석 달 정도 지낸 5월 초의 어느 날, 미네소타 대학 로스쿨에서 편지가 왔다. 낙방을 알리는 편지였다. 그때부터 일주일 간격으로 로스쿨들에서 하나둘씩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모두 낙방이었다.
자,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1년을 더 해서 로스쿨에 도전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하기 싫었다. 두 번째 선택은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MBA(경영학 석사) 같은 것은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 선택은 사업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수출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빌에게 그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빌은 대찬성이었다. 나와 빌, 그리고 빌의 친구 조지는 며칠 후 같이 만났고 사업을 하기로 대체적인 협의를 했다. 그리고 회사를 세우고 회사 이름을 'Midwest Imports, Inc.'로 지었다.
빌과 조지와 합의를 한 후, 나는 며칠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사업과 공부 양쪽의 가능성을 다 모색해보자. 먼저 부리나케 경영대학원 입학 수능시험(GMAT)을 알아보았다. 얼마 후 시험이 하나 있었다.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시험을 치른 다음 미네소타 대학 경영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냈다. 나는 사업도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빌에게 일단 우리가 한국에 가서 여러 가지를 더 알아보자고 제의했다. 한편 내가 마이크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너무나 좋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도 열심히 찾아보면 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입맛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이크의 이 말은 그 후 나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를 만나다: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나이는 서른이었다. 맨 먼저 박인철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그는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자기 약혼자 친구 중에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름이 박연실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만난 지 한 달 정도 후인 8월 말 청혼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9월 23일 약혼을 했고 수속 때문에 곧바로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식은 겨울에 내가 다시 한국에 나와서 하기로 했다. 나는 약혼식을 치른 다음 날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업가로서 고향에 다녀와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공부하러 간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와 그동안 쌓인 편지들을 뜯었다. 미네소타 경영대학원에서 온 편지도 있었다. 입학 허가 통지서였다. 정말 반가웠다. 나는 주저 없이 공부의 길을 택했다. 내가 공부의 길로 가겠다고 했더니 빌은 순순히 그것이 아마 너에게 좋을 거라면서 축복해주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여보! 나 로스쿨 됐어 / MBA와 로스쿨: 가을 학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서울 갈 준비를 하면서 방에서 무엇을 찾다가 우연히 내가 로스쿨에 응모할 때 쓰던 서류철을 들추게 되었다. 나는 흠칫하면서 가슴에 찡하는 전율이 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로스쿨에 대한 가슴 뛰는 동경을 절감하는 나를 느끼면서 나는 '다시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미네소타 로스쿨과 햄릿이라는 로스쿨에만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빌을 찾아갔다. 작년에 쓴 자기 소개서를 그에게 보여주면서 고쳐달라고 했다. 빌은 그 명문으로 나의 소개서를 감동적인 문장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아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2월 10일쯤 드디어 방학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식 전전날인 12월 21일 새벽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그 다음다음 날 오후 2시에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 해 3월 초 아내와 함께 미네소타로 돌아왔다. 학교는 바쁘게 돌아갔다. 공부는 여전히 재미가 있었다. 5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미네소타 로스쿨에서 편지가 왔다. 합격 통지서였다.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용솟음쳐 올라왔다. 하지만 곧 나는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로스쿨에 다니려면 9월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MBA 공부를 1년만 하고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MBA를 먼저 받고 로스쿨에 들어가기로 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나의 시야를 엄청나게 넓혔고, 법 공부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사회와 세상을 보는 넓은 안목과 식견을 갖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