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고난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바바라 디 앤젤리스 지음 | 고즈윈
지금의 고난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바바라 디 앤젤리스 지음
고즈윈 / 2012년 7월 / 412쪽 / 14,500원
1부 내가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을까?
마음 깊은 곳을 여행하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원하지도 않았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혔을 때 거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때 갑자기 '그것'에 두들겨 맞는 바람에 제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태껏 외면해 온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사건일 수 있다. 애정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너무나 행복한 척 가장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떠나 버린다. 딸이 정말 잘 지내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지만 우연히 서랍에서 딸이 숨겨 놓은 마약을 발견한다. 주당 60시간 몸이 녹초가 되도록 일하면서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는데 어느 날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때로 '그것'은 상실이다. 우리는 사랑을 잃고, 돈을 잃고, 신뢰를 잃고, 안전을 잃는다. 직업을 잃고, 건강을 잃고, 기회를 잃고, 희망을 잃는다. 때로 '그것'은 서서히 스며드는 안개처럼 우리 삶을 조용히 덮쳐 시야를 뿌옇게 만들고, 또 어떨 때는 대담하게 덮쳐오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이 오고 있음을 안다. 목 아래까지 바짝 다가와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그것'이 지나쳐 가리라 자신에게 말한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지만 결코 지구에 충돌하지 않는 소행성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서양인 최초의 비구니 스님 페마 쵸드론의 말처럼 "삶이 우리의 목을 죌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사실상 유일한 반응은 "내가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을까?"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몸부림칠 대로 몸부림치고 나면, 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칼 융은 "자아가 던지는 의문에 대답하기 전에 고통을 없애면 고통과 더불어 자아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지혜를 구하는 과정은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중요한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여정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결정된다. 우리는 의문을 껴안으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 통찰력과 계시를 받아들인다. 또한 어떤 것에서, 특히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 깊은 평화와 치유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을까?"라고 묻는 목소리를 외면하면 결국 성장을 가로막고 변화를 차단하고 저항과 부정의 늪에 빠진다. 왜 그럴까? 의문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까지 의식을 갉아먹고 잠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변화하려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해 행동해야 한다. 답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용기, 이러한 의문을 의식에 단단히 잡아매서 자신이 지닌 환상과 안일한 생각, 때로는 자아감까지 태워 없애는 용기가 필요하다.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의문을 인내하라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라.
들을 수 없는 답을 구하려 하지 말라
대답대로 살 수 없을 테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이제 의문대로 살아 보라.
그러면 언젠가 해답대로 살아가리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혜를 찾아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 단순히 정해진 사실이나 대답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문제를 해결하고 대답을 찾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사용하는 기술은 효과가 없다. 내면을 깊이 파고들려면 진정으로 명상해야 한다. 유사 이래 명상은 모든 위대한 철학자와 영적 구도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명상(contemplation)'의 사전적 의미는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는 것'으로 진리와 영감, 계시와 깨달음이 솟아나는 내면의 특별한 장소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을 말한다.
지혜를 찾아서 내면 깊숙이 파고들 때 우리는 여러 의문과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와 전환점에 대해 명상하고, 대답을 기다린다. 릴케가 아름다운 시에 묘사했듯 "의문대로 살아간다." 별똥별을 보려고 밤하늘을 뚫어져라 올려다본 적이 있는가? 고개를 들고 아무리 오랫동안 지켜보아도 별똥별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막 포기하려는 찰나 별똥별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줄기 섬광이 아치 모양을 그리며 하늘을 가로지른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는 장관이다. 명상은 느리다.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를 발휘하면 그만큼 기다린 보람이 있을 것이다.
삶이 보내오는 경고음
많은 고대 민족과 종교는 이름이나 단어가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믿었다. 기독교 성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주장한다. 힌두 전통에서 옴(AUM)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가리키는 신성한 상징이고, 세상을 만들어 내고 품고 있는 우주의 소리다. 이름이 매우 중요했던 고대인들은 사물의 이름을 찾으면 사물을 누르고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이처럼 이름은 외면과 내면의 여정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 준다. 미지의 영토에 들어가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전환점에 도달했을 때는 무엇보다 이름이 필요하다. 이름을 붙이면, 첫째,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불합리한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다. 셋째, 현실에 좀 더 충실하게 다가설 수 있다.
자신을 찾아온 위기나 문제에 이름을 붙이지 않거나 잘못 붙인다면,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두려워하면서 방향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이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는 이 시기와 사건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 사실 '위기'란 결정적 시점, 결정적 시기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므로 위기는 전환점인 동시에 판단하고 변화하는 시기다. 과거, 현실에서 자신을 분리해서 삶의 경로를 새롭게 그릴 기회를 잡는 시기다. 이러한 갈림길과 전환점은 결정적이고 도전해야 하는 시기에 숨겨져 있어서 자칫 놓치기 쉽지만 일단 발견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과 성취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극도의 상실, 질병, 사고, 비극 같은 경고음은 자신의 삶과 신념 그리고 가치에 대해, 가장 깊은 자기 모습에 대해 깊은 의문을 일깨운다. 또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도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모든 경고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시험하고 무엇보다 적나라하게 자기 원래 모습이 드러나게 한다는 점이다.
경고음이라면 내 친구 글렌 올먼 박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글렌은 30년 동안 응급 의학 분야에서 활동해 온 저명한 전문가이다. 글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동서양의학에 두루 해박하고 건강과 행복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그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후 2년 동안 글렌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크게 변화해야 할 시기가 됐어."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다가 이제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전화벨이 울렸다. "글렌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처음 만났을 때 글렌은 거의 걸을 수도,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었고,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 삶을 다시 정립하기 위해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잖아." 글렌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 농담에 가린 진실을 우린 둘 다 알고 있었다.
글렌이 사고를 당하고 일 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글렌은 책을 쓰고, 병원과 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총체적인 건강 통합 관리 모델을 개발했다. 또한 인디언 플루트로 직접 아름답게 연주한 곡을 녹음하고 잠잘 때와 잠에서 깰 때 긴장을 풀고 명상하는 기술을 소개한 시디 시리즈를 제작했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제작한 첫 시디를 뿌듯한 표정으로 내게 선물했는데, 그때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글렌은 경고음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때로 경고음은 일어날 시간을 맞춰 놓은 자명종 소리를 듣고 잠을 깨는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경고음은 특정한 시간에 울리도록 맞춰 놓은 타이머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자의식을 일깨워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삶이 뒤바뀔 만한 현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내면의 자명종이 갑자기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단계가 마무리되면서 자신이 변화할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갖췄을까? 깨어나면 알 수 있다. 13세기 위대한 수피이자 시인인 잘랄 앗딘 루미는 자신의 대표 시 <여인숙>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인간은 여인숙 같다.
매일 아침 새 손님을 맞이하는.
기쁨, 우울, 심술
순간적인 깨달음이
예상치 못한 손님으로 찾아온다.
모두 기쁘게 맞이하고 환대하라!
설사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휩쓸고
가구를 몽땅 없애 버리더라도
그래도 손님 하나하나를 귀하게 대하라.
새 기쁨을 안겨 주려고
그대를 청소하고 있을지 모르므로.
어두운 생각, 수치심, 원한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불러들이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인이므로.
지금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이름을 붙이고, 루미가 전하듯, 예상치 못했던 손님을 환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슬픔의 군중'을 겪고 고난과 시험을 거치며, 우리 영혼은 위대한 지혜를 얻고, 새롭고 빛나는 세계를 향한 비밀의 길을 보게 되리라.
진실과 숨바꼭질하기
인간은 완고한 동물이다. 경고음이 매우 큰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나 분명하게 전환점에 도달했는데도 방향을 바꾸지 않을 때가 있다. 내면에서 변화하라는 외침이 뚜렷하게 울리는데도 친숙한 대상에 고집스럽게 매달린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쩌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상황에 그토록 오래 집착할까? 어째서 현재 걸어가고 있는 길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을까? 바로 진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회피하는 태도는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막는다. 명쾌한 생각과 창의성을 해치며, 순간순간 온전히 존재하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스스로 관심을 꺼서 고통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고통에 시달리고 혼란을 겪고 불행에 빠진다.
"우리는 생각조차 못한 일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생각조차 못한 일이 벌어지면 생각이 멈추고 행동이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선견지명을 지닌 위대한 정치가 제임스 풀브라이트의 말처럼, 깨닫는 삶을 살려는 사람은 살며시 찾아오는 진실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각조차 못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우리가 맞이할, 진정 유일한 갈림길은 내면의 자세를 결정하는 길이다. 우리는 외면의 직업, 관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것이 아닌, 진실에서 도망칠지 아니면 진실을 향해 나아갈지를 갈림길에 서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을 차단하고 얼어붙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다 더욱 고통스러워지기도 한다. 피하고 싶어 도망치다 결국 더 나쁜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쫓아다니는 불쾌한 현실을 피하려고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결국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런 자기 삶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을 너무 오래 외면하면 결국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게 된다. 진실을 외면하고 차단하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 즉 자신의 꿈과 감정, 사랑과 생명력을 스스로 빼앗게 된다.
"자기 가슴보다 어두운 감옥이 있을까? 자기보다 냉혹한 간수가 있을까?"(너데니얼 호손) 진실에 마음을 닫은 삶 뒤에는 절망이란 감옥이 숨어 있다. 절망이란 감옥에 갇힌 우리는 투명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것처럼 자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의욕이 나지 않으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행동하고 변화하기 어렵다. 꼼짝 못 하고 얼어 버린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부부관계가 소원해져 몇 년 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빠로서도 훌륭하고 어느 면으로나 좋은 사람이지만 아내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친구는 남편과 대화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남편은 친구의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고 그냥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남편은 일과 경제적 문제로 받는 심리적 압박감과 결혼 생활에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뒤범벅이 되어 자신 안의 얼음덩어리 수를 불려 나갔다. 그리고 자신을 점점 더 얼어붙게 만드는 이 방법만을 고수했기 때문에 결국 얼음벽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싫어."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순간, 타인과 분리되고, 자기 생명력과 단절되고, 사랑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가고, 내면의 힘과 지혜에서 멀어진다. 불쾌한 사실을 회피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오산이다. 진실을 차단하고 얼어붙는 일은 살아 숨 쉬는 삶의 적이다. 열정의 적이요, 사랑의 적이다.
진짜 '나', 일어서 주십시오
진정성을 품고 산다면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여야 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 내면의 실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 진정성을 품고 살아갈수록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 더 평화로워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절대 보여 주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마크 트웨인)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은 항상 기쁜 것만은 아니다. 똑바로 보고 싶지 않은 숨겨진 조각이 드러날 때도 있다. 이렇듯 숨겨진 내면의 영역을 가리켜 정신과 의사 칼 융은 '자아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자아의 그림자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이상적으로 포장된 자아 뒤에 숨은 감정과 충동의 집합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이고, 발달하지 못하고, 거절당하고 억눌리고, 부정된 모든 것이다. 우리의 그림자 자아는 또한 완성하지 못한 일이고, 채우지 못할 필요이고, 해결하지 못한 감정 문제이고, 깨닫지 못한 갈망이고 꿈이다. 그림자 자아는 우리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외면하는데도 주의를 끌면서 우리를 힘껏 잡아당긴다. 칼 융은 그림자 자아를 억누르려는 인간의 몸부림에 대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성격이 일제히 자신에게 맞설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렇다. 어느 날 꼭꼭 억누르고 숨겨 왔던 그림자 자아가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위기를 맞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을까?" 우리는 이렇게 의문을 던지며 어리둥절해한다. "이건 나답지 않아." 하지만 사실 그것이 바로 당신다운 모습이다. 그것은 갇혀 있다가 풀려난 '당신'이고 당신 그림자이다.
스스로 "진짜 나, 일어나 주시겠어요?"라고 초대할 때 우리는 자아 전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모든 부분, 즉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부분과 그림자로 숨어 있는 부분을 흔쾌히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려면 좋고 나쁘다는 인습적이고 제한적인 삶의 개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브 엔슬러는 "사람들을 나쁘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틀에 가둘 때, 자기 안에 살고 있는 복잡성과 모호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위험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진짜 적은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평화를 찾으려면 자아의 그림자에 등 돌리지 말고 마주 보면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