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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기술

송진구, 장순욱 지음 | 책이있는마을
정리의 기술

송진구, 장순욱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2년 7월 / 239쪽 / 13,000원





1장 정리와 비움의 철학



과유불급: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세상은 모든 게 지나쳐서 문제가 된다. 먹을거리가 대표적이다. 국민 상당수가 과잉 섭취에 따른 비만으로 고혈압과 당뇨 등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다. 21세기의 총아로 불리는 정보 통신도 마찬가지다. 주요 사건이 인터넷으로 실시간 생중계되고 논쟁이 붙은 기사엔 무수한 댓글이 달린다. 언론사도 많아져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기사가 마구 쏟아진다. 심지어는 정보 중독에 빠지는 사람도 생겨날 정도이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모든 뉴스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이다. 대부분 살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가십거리인데도 말이다.

이 같은 과잉은, 중년에게 무더운 여름철에 두꺼운 외투를 입히는 것과 같다. 어깨가 처지고 갑갑함을 견디기 어렵다. 외투를 벗으면 해결되지만 현대인은 다른 해답을 찾아 나선다. 에어컨을 켜는 것이다. 문명의 이기만을 찾는 이 같은 현상은, 비만으로 생긴 고혈압과 당뇨 해결을 위해 한 움큼 알약을 털어 넣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에어컨은 궁극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해결법은 불필요한 옷을 벗는 것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속옷 차림으로 선풍기 앞에 서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특히 중년에는 많은 걸 벗어버려야 과잉의 시대가 주는 부작용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가난했지만 순박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땐 많이 부족했지만 여유가 있고 가벼웠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무거운 것을 벗어던지고 싶은 무의식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살면 안 된다는 긴박한 SOS일 수도 있다.

비우는 기쁨: 연애의 법칙에는 '관심 있을수록 모른 척하자.'라는 게 있다. 매달리면 부담을 느껴서 달아나고 반대로 모른 척하면 안달이 나서 달라붙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묘한 역설이다. '간절히 원할수록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등도 같은 맥락이다.

중년의 나이에는 많은 게 간절해진다. 젊음도 직장도 자식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점점 작아져가는 듯한 착시가 일어 '내 것'에 의미를 두고 매달리게 된다. 직장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려고 후배들에게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으로 못된 짓을 하거나, 상사를 몰아내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기도 한다. 집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내와 아이들과는 자꾸만 소원해지고 자신은 마치 그저 돈이나 벌어다주는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럴수록 권위를 세워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어째 직장에서는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집에서는 권위가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중년의 나이일수록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간절할수록 조급함을 버리고 내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의연함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버림으로써 더 많은 걸 얻는 경우가 많다. 솔로몬 왕의 재판에서처럼 말이다. 두 여인이 갓난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신이 아기의 어머니임을 주장했다. 솔로몬 왕은 지혜를 발휘해 판결을 내렸다. 아기를 반으로 갈라서 나눠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여인이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아기의 친모가 아니라며 울부짖었다. 솔로몬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고하는 여인에게 아이를 안겨주었다. 여인은 아이를 포기한 순간에 비로소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쉽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할 때 사람은 가장 강해진다. 버림으로써 얻는 세상의 이치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설득력이 있다.

버림과 비움의 마법: 결국 인생은 모든 걸 다 내려놓게 되어 있다. 어차피 저승까지 짊어지고 가지 못할 바에야 조금 일찍 내려놓고 편안함을 만끽하는 게 낫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 밖에서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을 등지고 가면 걷기 편하고 맞서서 걸으면 힘이 들듯이, 바람과 함께 가야만 더 먼 길을 갈 수 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의 초록이 갈색으로 물들고 결국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처럼, 젊음도 조금씩 색이 바래며 빠져나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흔은 나이 듦과 죽음을 이해하고 아무것도 들고 있을 수 없음을 스스로 납득하기에 적당한 시기이다.

사십 대의 돌연사 비율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에서는 마흔쯤 되면 세상을 떠난 가까운 친구나 선후배가 하나둘 생겨난다. 죽음과 부쩍 가까워졌음에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두고 갈 것만 남아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해와 동시에 거부감이 인다. '나는 아직 아니야.'라는 생각에서다.

일단은 외면하지만, 사람의 삶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어서 결말은 한결같다. 뿌리칠 수 없기에 순응할 뿐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를 떠올리며 중년부터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하자. 어차피 놓아야 할 것에 안달하여 조금 더 들고 있겠다고 몸과 마음을 혹사시킬 필요가 없다.



2장 버리기 … 손에 잡히는 것 빼내기



자동차: 사십 대쯤 되면 젊은 시절 구입한 소형차를 바꿔야 할 시점이 온다. 새 차를 뽑는 데는 자연히 욕심이 뒤따른다. 대개 자신의 연령대와 체면을 고려하여 2,000cc급 중형차를 선호한다. 나이 들어 소형차를 타는 게 혹시 남들 눈에 우스워 보일까 두려워서이거나 큰 차를 타고 다녀야 잘나갈 수 있다는 혹은 더 나아가 큰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자동차를 바꿔야 하는 경우에는 새로 뽑을 차종을 선택하는 게 중압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중년이라면 중형차는 몰아야….'라는 인식이 박힌 탓이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덜컥 중형차를 구입한 사람은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며 죽는소리를 한다. 다달이 나가는 적지 않은 액수의 자동차 할부금을 앞으로 36개월간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막막하다. 6개월마다 자동차세를, 1년에 한 번 자동차보험금을 낼 때면 차를 내다버리고 싶은 심정마저 인다. 또 차를 끌고 나가봤자 매일같이 꽉 막힌 도로 위에 비싼 기름을 쏟아부으니 속 편할 날이 없다.

아내의 잔소리도 한몫한다. 아이들 교육비도 만만찮은데 그냥 버스나 타고 다니지 왜 새 차를 뽑았냐며, 제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 말에 울컥 화가 나다가도 팍팍한 살림살이에 그러는 것이려니 하면 절로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가 떨구어진다. 결국 체면치레를 하고 남은 것은, 최소한 차 할부가 끝날 때까지는 받게 될 더 큰 고통이다. 중년의 인생이 가벼워지려면 차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들이 갖고 있으니 나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끊임없는 욕구와 욕망을 부추겨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전철을 타고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사실 차를 사용하는 경우는 제한되어 있다. 주말에 가족과 여행을 가는 등의 일이 전부다. 괜한 고집을 부려 중형차를 구입해 분란을 일으킬 필요 없이, 차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을 줄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저축해두는 게 바람직하다.

휴대전화: 지갑, 열쇠 꾸러미 등만 해도 많은데 휴대 전화마저 묵직하게 자리를 잡으니 호주머니는 늘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조그만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면 한참을 뒤져야 할 정도다. 불과 몇십 년 사이 휴대 전화는 급속도로 퍼졌고 이에 중독된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전화나 문자가 온 것도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길을 걸으며 수시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고, 눈에 띄는 곳에 휴대 전화를 두고서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며 심심할 때마다 주소록을 죽 훑어 전화할 데를 찾는 것이다. 휴대 전화가 눈앞에 없으면 심각한 불안 증세까지 보인다. 집에 놓고 오면 다시 되돌아가 들고 나온다거나 심지어 찾으러 갈 수 없는 상황이면 퀵 서비스 배달을 통해 전달받기도 한다.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거나 그새 각별한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중년 남성에게 전화를 거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업무적인 사이, 가족, 친구 등이 전부이다.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일부 중년 남성의 경우 오지도 않는 누군가로부터의 전화를 막연히 기다리기도 한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짜릿한 전화 한 통이 휴대 전화를 타고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것이다.

나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전화기를 꺼놓는다. 장난감처럼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들여다보는 모양새가 보기에 좋지 않을뿐더러 휴대 전화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제어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큰 불편은 없다. 오히려 그동안 얼마나 오지 않는 전화에 매달려 살았는지 반성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혹이 떨어져나간 듯한 홀가분함, 일상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여행하는 듯한 한적함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셈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중무장하고 적진을 순찰하는 미군 병사를 본적이 있다. 헬멧에 붙은 큼지막한 적외선 카메라를 포함해 각종 최첨단 장비를 달고 있었다. 탄통과 수통, 소총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니던 예전의 군인과는 많이 다른 그 모습을 보며, 만일 저들이 적을 만나 뛰어야 할 시점이 오면 과연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앞으로 10년 뒤쯤엔 군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온몸에 혹은 주머니에 각종 첨단 장비를 들거나 붙이고 다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수록 가벼움에 대한 고민, 버리기의 즐거움은 역설적으로 그 중요성을 더해갈 것이다.

잔소리: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고 한다. 여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어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몸과 마음이 심약해져서 자꾸 외부에 기대려고 한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늘어난 말 가운데 대부분이 잔소리다.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젊은 시절 그토록 상사의 잔소리에 귀찮아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회의 중 아랫사람에게 불만을 말하라고 한 뒤, 부하직원이 한 마디를 꺼내면 열 마디로 되받아치며 면박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회의는 결국 팀장 또는 부장의 일장 연설로 끝이 난다.

잔소리를 버리면 중년의 삶은 훨씬 가벼워진다. 우선 혼자 짊어져야 했던 책임을 아랫사람과 분담할 수 있다. 못 미더운 마음에 아랫사람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던 것에서 벗어나 그들 개개인의 뛰어남을 알아봐주고 그에 따라 적절히 일을 배분하는 것이다. 내가 했던 일을 그들이 하게 된다고 밥그릇을 빼앗기는 게 아니다. 나눠주고 나야 내 몸이 가벼워져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대부분 기업의 최고 경영자 사무실은 그 회사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 가벼워져야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보는 아빠가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아이가 더 나아지거나 발전하지 않는다. 잔소리는 아이의 가슴속에는 돌멩이를 던지고, 자신의 가슴속에는 그보다 더한 돌덩이를 얹는 불필요함이다. 잔소리를 할 시간에, 아이가 평소 엄마에게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이 보다 가벼워질 것이다.

중년의 시기가 되면, 자신이 꼭 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지식을 쌓은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걸 증명하고 싶어서 혹은 가르쳐주려고 말이 점점 많아지기도 한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세상은 말을 안 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3장 내려놓기 … 마음속 무거운 돌 꺼내기



과거로부터 탈출: 중년 남성들 간의 대화를 잘 들어보면 '내가 예전에'로 시작하는 추억담이 많이 있다. 살면서 쌓은 여러 경험과 추억이 담긴 이야기에 때로는 과장이 섞여들기도 한다. '젊었을 적엔 여자가 줄줄 따랐다.'는 등 누구도 검증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중 단연 으뜸은 인생의 황금기, 즉 가장 좋았다고 생각되는 잘나가던 특정 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최고로 친다. 그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어 인기가 많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넌 크면 정말 뭐 한자리할 거 같다.'란 말을 자주 들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그저 그런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녹록지 않은 사회에 발을 담글수록 고교 시절 품었던 자신감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에게 남은 건 "그 시절이 좋았는데."라며 학창 시절을 회고하는 것뿐이다.

어떤 이는,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살던 지난 시절을 이야기한다. 지난 IMF 외환위기 직전만 해도 큰돈을 만졌는데, 한순간에 쪽박을 찼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그 이야기를 줄줄 외울 정도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화려했던 1990년대 초중반의 낙원을 회상하며 "예전엔 이 정도 돈은 하룻밤 술값이었는데 말이야."라고 말하는 뒷맛이 참 쓰다.

행복했든 힘들었든 과거의 행위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가 끼어들면 과거는 그저 되돌리고 싶은 슬픈 기운이 되어 내 안에 머물게 된다. 이런 껍데기를 안고 살다 현재에 펼쳐봤자 결국 되돌아오는 건 허무함이다. 말로써 스스로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는 저마다의 굴곡이 있다. 잘나갈 때가 있고 못 나갈 때가 있다. 항상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가슴에 담긴 과거에 대한 미련이 만들어낸 무거운 돌덩이를 밖으로 내던지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직장의 비애: 가장의 일자리에는 나와 가족의 생존이 걸려 있다. 일하고 돈을 벌어올 직장이 있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낀다.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선인 직장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누구도 쉽게 꺼낼 수 없다. 젊은 시절에는 사소한 것에도 성을 내며 '오라는 곳 많다!'고 호기를 부리지만, 마흔이 넘어가면 그런 뻣뻣함은 사라진다. 오히려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쫓겨날까 봐 직장에 매달리기도 한다.

간절히 매달리다 보면 문득 처량함이 찾아든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지만 처자식과 먹고살려면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눈물을 삼킨다. 마치 가느다란 끈에 의지해 낭떠러지에 매달린 심정과 같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끈을 붙잡고 늘어지는 게 참 힘겹고 슬프지만, 그렇다고 그 끈을 그대로 놓고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추락할 수는 없다. 등에 매달려 있는 처자식이 자신과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끈을 놓는 순간, 평화를 찾을 수도 있다. 칼은 상대의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막상 상대가 칼을 뽑아 실체가 확인되면 오히려 기분이 덤덤해진다. 또,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적과 총질하며 싸울 때가 아니라 적의 존재를 모르는 채 그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순간이라고 한다.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가장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처량하고 두려운 순간은 가느다란 끈에 매달려 있을 때이다. 그 끈을 놓아 버리면 오히려 세상이 덤덤하게 다가올 수 있다. 끈을 놓으라는 건, 직장을 그만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의 처지를 처량하게 느끼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뜻이다. 아직 누구도 해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상황을 나쁘게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자신이 여전히 직장에 매달린다고 느껴져 처량함에 울적해질 때에는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녀보자. 품속의 사직서를 만지며 아슬아슬한 끈을 붙잡고 있는 모습, 손을 놓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 그리고 잠시 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화면이 바뀌며 절벽 위에 우뚝 선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하는 일과 지금의 처지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상처와 흔적: 어릴 때 겪은 상처를 여태 치료하지 못하고 간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때론 아주 부당한 것이었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아버지가 집 앞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마당에서 놀고 있는 그를 불러다 손찌검을 했다. 일부러 돌을 가져다놓아 아버지를 넘어지게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자라면서 내내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으며 아직도 자신의 인생 최고의 상처로 어릴 적의 기억을 각인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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