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혀
홍경호 지음 | W미디어
세치혀
홍경호 지음
W미디어 / 2012년 3월 / 360쪽 / 13,800원
내가 임금을 죽였다고?
춘추시대, 진나라의 상경 조순은 허겁지겁 국경을 향해 수레를 몰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해오던 그였으나, 어리석고 포악한 임금에게 쫓겨 목숨조차 보전키 어려운 신세로 바뀐 것이었다.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다른 나라 땅이다. 그들이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데 멀리 수양산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떼의 군마가 있었다. 드디어 그들이 조순이 숨어 있는 곳을 지나쳐 갔다. 그때 조순이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조천이 아니냐?" 말을 타고 가던 사내가 황급히 말에서 내리더니 다가와 땅에 엎드린다. "숙부께서 어찌된 일입니까?" "조카, 나 좀 보세!" 부하들을 먼저 떠나보낸 조천은 곧 숙부와 마주 앉았다. 조순은 조카에게 그날 강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임금이 대신들이나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들어온 것도, 또한 바른 말로 간언하는 조순을 죽여 없애려 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당시 병권을 관장하는 사마 자리에 있던 조천으로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사실 이고를 임금 자리에 올려 모신 사람은 조순이었다. 이고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어려 매사를 조순에게 의지했으나, 그 후 나이가 들어가자 차츰 조순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임금은 아직 미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도안가라는 신하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데, 그럴 때마다 조순이 간언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빗나간 행실에 참다못한 신하들이 간언했으나 임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뿐더러 툭하면 조회도 열지 않았다. 하루는 조순이 조당에서 사회라는 대부와 국사를 논의하는 중인데 두 명의 여관(女官)이 채롱을 들고 내궁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왠지 수상쩍었다. 조순과 사회는 달려가 그들이 메고 나오는 채롱을 들여다보다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토막을 낸 시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순이 호령을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실직고하렷다!" 여관들은 벌벌 떨며 아뢴다. "이것은 포인(조리사)의 시체입니다. 어젯밤에 상감께서 곰의 발바닥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면서 크게 노해서 들고 있던 구리쇠로 포인을 쳐 죽였습니다." 조순과 사회는 참혹하고 끔찍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기로 결심하고 사회가 먼저 궁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과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대부는 아무 말 마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로다." 임금이 먼저 사과를 하니 사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조당에 나갔더니 조회를 열지 않는다는 하교가 내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소! 내 오늘은 목숨을 내놓고 간언할 것이오!" 조순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간언했다.
"신 조순은 죽을죄를 무릅쓰고 감히 아뢰나이다!" "경은 물러가오. 과인이 오늘 하루만 놀고, 궁으로 돌아가는 즉시 경의 말에 따르리다!" "안 됩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곁에서 도안가가 변명을 늘어놓는다. "주상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니 상경께서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내일은 틀림없이 조당을 열도록 소인도 아뢰겠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다음 날은 반드시 조당을 연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조순은 할 수 없이 물러나왔다. 그날 임금은 놀면서도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도안가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둘은 조순을 제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날 밤, 도안가는 서여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상경 조순이 국사를 독단하므로 상감께서 그를 죽여 없애라는 밀지를 내리셨네. 그대는 오늘 밤 상경의 저택으로 숨어들었다가 비수로 찔러 죽이게!" 서여는 조순의 저택으로 숨어들었다.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조순이 관복을 차려입고 단정하게 앉아 입궐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날도 새기 전에 입궐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조순의 모습을 보고 서여는 가슴이 찡했다. '국사를 위해 저렇듯 노심초사하는 상경을 어찌 죽인다는 말인가! 하지만 임금의 밀지를 받았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서여는 마침내 나무에다 머리통을 짓이겨 스스로 죽었다.
도안가와 임금은 또 다른 꾀를 짜냈다. 다음 날 임금이 무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조순을 찔러 죽이게 한 것이었다. 조순을 모시는 제미명이 목숨을 내놓고 조순을 지키다가 무사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조순은 그 틈을 타서 겨우 조당에서 도망쳐 나왔다. 조순의 설명을 듣고 조천이 위로한다. "숙부께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제 불찰이오니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숙부께서 나라를 떠나시면 앞날이 걱정입니다.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보내드릴 것이니 그 때에 앞일을 결정하십시오." 강성으로 돌아온 조천은 임금을 시해할 속셈으로 임금의 마음을 사면서 한편으로는 부하들을 충동질했다. 결국 임금은 조천의 농간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조천의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조천은 국경 근처에 머물고 있던 숙부를 불러들였다. 조순이 강성으로 되돌아오자 문무백관이 모여들었다. 조순은 이들과 상의해서 죽은 임금을 장사지내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이가 성공이다. 성공은 나라의 정사를 조순에게 일임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임금 시해 사건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갔으나, 조순의 마음 한구석은 늘 그것으로 인해 어두웠다. 참다못한 조순은 어느 날 사관인 동호를 불렀다. "지난 가을에 있었던 일이 사초에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그것을 좀 보고 싶소!" 동호가 내놓는 사초를 보고 조순은 기절초풍했다. 사초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던 것이다. '9월 을축 일에 진나라의 조순이 임금 이고를 죽이다.' "이 기록은 잘못되었소. 그 때 나는 피신 중이어서 임금이 피살되는 것을 몰랐소."
그러나 동호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대는 상경의 신분으로 달아났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으며, 돌아와서는 임금 죽인 자를 찾아내어 죄를 묻지 않았으니 책임은 결국 그대가 질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므로 임금을 죽인 사람은 그대라고 썼소." "나는 임금을 죽이지 않았소. 없는 일을 사초에 올린 죄를 물어 그대를 죽여야겠소! 그러니 죽기 싫거든 이 사초를 고쳐주오." "안 될 말이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기록은 고칠 수 없소!" 조순으로서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순은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곧은 붓은 꺾을 수 없음을 안 사람이었다.
조순은 그 후로 더욱 조심하고 조심해서 훌륭한 재상 노릇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동호직필이라 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참다운 사관의 곧은 붓은 이렇게 무섭다. 이런 일이 있고 얼마 뒤에 정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정나라의 대부 송은 임금을 죽일 목적으로 당시의 최고 집권자이던 귀생을 찾아가 협력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귀생은 응하지 않았다. 송은 귀생을 위협하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날조된 소문이 퍼지자 송은 귀생에게 따졌다. "그대는 나를 죽일 참인가? 무슨 심사로 있지도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가?" "상경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겠소?"
결국 귀생은 적극적인 가담의 뜻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송은 귀생이 적극적으로 가담은 하지 않더라도 방해는 않으리라 확신하고, 부하들을 시켜 잠자는 왕을 암살하고, 임금이 급살로 죽었다고 공포했다. 그것이 송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잘 알면서도 귀생은 모르는 척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나라의 정사를 도맡아 했고, 그것으로 만족해 했다. 뒷날 춘추를 집필하던 공자는 이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기술했다. '정나라의 귀생이 임금 이를 죽였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든 죄는 최고 집권자에게 있다는 것이 공자의 판결이다.
적과 동지_ 소진과 장의
귀곡 선생의 제자 가운데 소진과 장의가 있다. 이들은 학문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자, 하산하면서 먼저 출세하는 사람이 남은 사람을 이끌어주기로 맹세하고 헤어졌다. 소진은 낙양 사람이었는데, 아는 사람을 중간에 넣어 주나라의 현왕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배운 것을 다 써서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한참이나 소진의 열변을 듣던 임금은 말을 한다. "우선 관사에 나가서 기다리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르겠노라." 현왕은 처음부터 소진을 쓸 마음이 없었을뿐더러 또한 그럴 힘도 없어 인사치레로 관사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 것이었다.
소진은 그것도 모르고 관사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가자, 소진은 관사를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며칠을 묵은 소진은 집안 식구들을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해서 얼마간의 노자를 마련했다. 그 돈으로 그는 천하를 두루 구경하면서 함양으로 갔다. 그가 주창하는 부국강병책을 쓸 만한 나라는 진나라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때가 나빴다. 소진이 함양에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그를 위해 다리를 놓아줄 사람도 없었고, 또한 진나라의 전 임금도 죽은 뒤였다. 새로 들어선 임금 혜문왕은 누구보다 유세객을 싫어했다.
혜문왕은 선비를 홀대한다는 비난이나 면할 셈으로 소진을 만나주었다. 그 자리에서 소진은 자기의 헌책을 받아들이면 남은 여섯 나라를 병합하여 천하통일도 이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젊은 왕은 맥 빠지는 말만 한다. "우리의 국력이 좀 더 커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소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입장이라 그는 객관에 쭈그리고 앉아 패자가 되는 요체를 글로 썼다. 책이 완성되자 소진은 그것을 혜문왕에게 바쳤다. 왕은 나중에 읽어보겠다면서 책을 받아 넣었다. 소진은 그 말만 믿고 좋은 소식이 있기를 고대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소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날그날을 무료하게 보냈다. 그런 어느 날, 문득 하산할 때 스승이 주던『태공음부편』이라는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소진은 그날부터 읽고 또 읽어 줄줄 외우는 그 책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일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소진은 마침내 『태공음부편』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형제들이 얼마간의 여비를 마련해 주어 소진은 재차 유세 길에 올랐다. 소진은 이번에는 '진을 돕느니 차라리 진나라를 뺀 나머지 여섯 나라를 하나로 뭉치도록 하리라'는 생각으로 조나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나라에서 유세는커녕 임금을 만나지도 못했다.
소진은 다시 연나라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에서도 백방으로 애를 써보았으나 연나라 문공에게 유세는 고사하고 자신을 소개할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한 해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공이 사냥을 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소진은 새벽부터 길목을 지키다가 무작정 임금의 행차 앞으로 달려 나가 뵙기를 청했다. "멀리 낙양에서 온 소진이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소진이라면 진나라 혜문왕에게 패도에 대한 글을 써 올렸다는 그 소진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지으셨다는 그 책을 한번 얻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선생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사냥은 그만 두기로 하고 어서 궁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해서 소진은 난생 처음으로 진짜 유세할 기회를 잡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알기로 대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넓이가 2천 리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수십 만 명입니다. 그러나 중원 여러 나라에 비한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중원 강국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로 조나라가 저들이 오는 길목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대왕은 조그마한 이해 때문에 이웃 조나라와 다툼을 계속 하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우선 조나라와 친선을 맺고, 그것을 다리로 해서 중원 각국과 외교를 수립하고 나아가 천하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강한 진나라를 막으면 연나라의 장래는 반석보다 더 든든합니다."
"취지는 좋으나 각국 군후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응하겠소?" "대왕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신이 세 치 혀를 놀려 천하 제후들을 한자리에 모아보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과인은 무엇이든 아끼지 않겠소." 임금은 소진에게 황금을 내려서 여비로 쓰게 하고, 조나라 임금에게 올릴 예물은 따로 마련해주었다. 소진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나라가 보낸 사신의 자격으로 당당하게 조나라 궁전으로 들어갔다. 조나라 임금은 소진을 깍듯하게 영접했다.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오."
"진나라가 가장 탐을 낼 나라는 바로 이 조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나라 군이 대왕의 나라를 짓밟지 않는 것은 위나라와 한나라가 중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 왕은 지금 열국의 군후들을 위협해서 각기 땅을 베어 바치라고 협박하고, 나머지 여섯 나라는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살펴보니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땅을 합치면 진나라보다 더 넓고, 여섯 나라가 기르는 군사를 합치면 진나라 군사보다 열 배는 됩니다. 실정이 이러하건만 각국 군후들은 진나라라 하면 떨면서 땅을 베어 바치려 합니다. 살 길은 여섯 나라가 뭉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섯 나라가 하나로 뭉쳐서 대항한다면 아무리 강하고 포악한 진나라인들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앞장을 서주신다면 신이 감히 여섯 나라를 한군데로 모으는 일에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힘껏 밀어드릴 것이니 선생께서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오." 조나라 임금은 즉석에서 소진에게 정승의 인을 주었다. 소진은 사람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임금에게 조나라에서 거둔 성과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당분간 조나라를 본거지로 여섯 나라를 한군데로 모으는 데 진력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소진은 조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한편으로 은밀히 6국 연합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소진과 헤어져 고국 위나라로 돌아간 장의도 소진의 초년처럼 불우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보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장의는 아내를 데리고 초나라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곳에서 장의는 초나라 정승 소양의 식객이 되어 겨우 밥이나 얻어먹었다. 그런데 진나라한테 이리저리 뜯기던 위나라가 이번에는 초나라한테 또 당했다. 초나라의 정승 소양이 위나라로 쳐들어가서 7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었다. 소양은 이 공로로 초나라 임금으로부터 '화씨의 벽'이라는 천하에 둘도 없는 귀한 보물을 하사받아 애지중지했다.
어느 날, 소양은 많은 빈객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 주연을 베풀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소양은 심복더러 '화씨의 벽'을 내어오라고 분부했고 빈객들은 돌아가면서 '화씨의 벽'을 감상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비를 피하느라 우왕좌왕하다가 '화씨의 벽'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도 몰랐다. 나중에야 그것을 알고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근처 풀밭까지 모조리 뒤졌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소양은 이런 보고를 받았다. "빈객들 가운데 보물을 훔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수상한 자가 있다면 장의 한 사람뿐입니다." 확실한 물증도 없는 추측만의 혐의임에도 소양은 즉각 장의를 잡아들여 문초하라고 명했다. 장의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매를 맞고 혼절해버렸을 때에야 그들은 그쳤고, 누군가 그를 업어서 집에 데려다 주었다.
몸이 조금 회복되자, 장의 부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장의가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낯선 사람 하나가 수레를 멈춰 놓고 쉬다가 말을 걸었다. "댁은 이 동네 분인가요?" "그렇소. 그런데 댁은 뉘시오?" "저는 조나라에서 온 장사치입니다." 조나라 사람이라는 말에 장의는 문득 소진이 생각났다. "조나라 사람이라면 소진을 알겠구려!" "댁이 어떻게 우리 승상을 아시오?" "소진은 나와 동문수학한 사람이오." "그런데 선생은 왜 우리 승상을 찾아보지 않으십니까? 우리 승상께서 선생을 상감께 천거할 것 아니겠소?" "나도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먼 길이라…" "길이 먼 것이 대수입니까? 선생이 그럴 마음을 가졌다면 당장 이 수레를 함께 타고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