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혁명
이지성,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고전혁명
이지성, 황광우 지음
생각정원 / 2012년 2월 / 280쪽 / 14,000원
PART 1 당신의 생각이 곧 당신의 미래다 : 고전혁명
새로 태어나는 삶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매일 혁명하고 있다: 우리가 봐왔고 들어온 혁명은 거창하고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다. 그런 혁명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혁명이란 것이 꼭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위험하기만 한 것일까? 내 삶에 원대한 변화를 가져올 나만의 혁명을 할 수는 없을까? 위기를 기회로 바꾼 어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문의 첫 번째 답이 숨어 있다.
1991년, 일본 최대의 사과 생산지인 아오모리의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소실되어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거듭하길 며칠, 한 농민이 입을 열었다.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 말이야. 그걸 우리가 '떨어지지 않는 사과'로 만들어 팔면 어때? 예를 들면, 시험에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합격 사과 같은 거를 만들면 어떨까?" 1991년 일본의 대표적인 히트 상품이 된 합격 사과가 탄생한 순간이다. 일반 사과의 열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판매된 이 사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태풍으로 생긴 손실을 거뜬히 만회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그렇다. 혁명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혁명이란 경중의 차이를 떠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것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새로움을 세우는 일이라면,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역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혁명가가 돼야 한다. 내 삶에 극적인 변화와 운명적인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안겨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혁명하지 못한다. 혁명하는 사람과 혁명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똑같은 현상을 대하고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혁명하는 사람과 혁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르다. 예로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데 사과가 '쿵' 하고 떨어졌다고 하자. 혁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무 아래에서 다시 사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떨어진 사과를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끌어냈다. 농부와 뉴턴의 차이를 만든 건 '생각'이다. 뉴턴은 매일 깊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생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무엇을 보든 어떤 일을 겪든, 보고 겪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으로 이어간다. 이 시대의 혁명이란 세상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판을 짜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우리가 굳이 혁명을 해야만 할까? 답은 명백하다. 계속되는 경제위기로 인한 치열한 칼바람 속에서 '국가도, 회사도, 그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고, 광풍 속에서 바람막이가 돼줄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의문이 든다. 왜 하필 고전일까? 고전에서 어떻게 생각혁명과 자아혁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고전이 시대를 돌파해온 생각이기 때문이다. 모든 고전은 당대의 문제작이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현실에 맞선 가열한 몸부림을 통해 탄생했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바로 고전이다. 그리고 고전은 시대를 넘어서고 변화를 주도해왔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 인문과 과학의 측면에서 모두 진행됐다. 그렇기에 그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전은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고전은 프랑스혁명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전이 담고 있는 것은 변화고 또한 변화의 흐름에 대처하는 자세다. 이것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고, 고전으로 혁명할 수 있는 근거다.
인생은 큰 만남 하나로 바뀔 수 있다
답을 '얻는' 것 vs. 답을 '생각하는' 것: 인간은 본래 끝없는 질문과 답변 속에 사는 존재였다. 사람과 책과 자연과 대화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혀온 게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프다, 힘들다, 죽겠다 푸념하면서 정작 왜 아프고 힘들고 죽겠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아프고 힘들고 죽겠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강구하지 않는다. 88만 원 세대, 비정규직 등 지금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현실들에 대해 질문해본 적 있는가? 심각한 문제는 맞다. 그런데 무엇이, 왜 심각한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사회의 잘못이라 탓하기 전에, 문제의 원인과 핵심부터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비난에 그치지 않고, 행동과 변화를 촉구하는 비판이 될 수 있다.
물론 질문을 던진다고 바로 답이 구해지진 않는다. 스스로 구하기 어렵다면 주변에서 구할 수도 있다. 선배, 스승, 부모, 친구 등 물어볼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가장 권하고 싶은 조언자는 고전이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면 답을 '얻는' 데 그치지만, 고전에 길을 물으면 답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전은 과거에 행해진 질문과 답의 기록이다. 누군가 앞서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접하면서, 우리가 품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인류의 현자들과 대화를 나눔이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은 크고 중요한 한 번의 만남으로 바뀔 수 있다.
고전혁명을 완성하는 두 가지 단계
목도하라 - 세상의 이해: 변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항상 기득권이 노리는 것이었다. 변화가 생기면 내 것이 줄어들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건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를 계속해서 지배하는 방법은 변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 더 나아가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는 총과 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방법이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일제는 네 차례에 걸쳐 '조선교육령'을 개정ㆍ공포했다. 그 목적은 너무나 분명했다. 식민지가 된 우리 민족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사립학교 등의 학교 편제가 마련됐다. 그런데 대학이 없었다. 더구나 교육내용도 일본어를 보급하기 위한 보통교육, 농ㆍ상ㆍ공업 분야의 하급 직업인을 만들기 위한 실업교육,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교육에 한정돼 있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으로 성균관이 폐지됐고 전국의 서당이 사라졌다. 서당에서 고전을 가르치면 칼을 찬 순사가 나타나 잡아갔다. 그리고 "조선이 고전을 읽다가 망했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졌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공자와 맹자를 읽던 아이들은 보통학교에서 생활에 필요한 지식만을 얻어야 했다.
일제는 왜 고전을 읽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근본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맨큐의 경제학』의 근본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있다.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사고의 기반에는 동양의 고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고전을 읽지 못하게 한 데는 생각 자체를 가로막겠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이 고전과의 첫 번째 단절이었다. 두 번째 단절은 독립 후 미군정 중에 벌어진다. 미군정은 미국의 공립학교 교육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적용했다. 여기에 한 가지 시사점이 있다. 미군정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교육법의 하나를 그대로 이식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로 나뉘는데, 공립학교에서는 고전을 거의 읽히지 않는다.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학교에서는 고전 읽기를 굉장히 중요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 단절은 독재정권 시절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국민이 바보가 되지 않으면 독재에 항거하고 정권은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역시 답은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고전에서 멀어져갔다. 아니, 고전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됐다. 우리가 고전과 멀어진 배경에 침략자와 지배자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니, 과장 같은가? 물론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고전과 멀어지면서 점차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갔다는 것이다. 목도하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바라보라.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다.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 전체 메커니즘을 모르고서는 수리할 수 없듯, 삶을 개선하는 일은 세상의 논리와 움직임을 알아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목도하라는 외침은 단순히 보이는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보여주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까지 바라보라는 주문이다.
해석하라 - 이해의 활용: 우리는 뉴스에서 종종 이상한 현상을 접하게 된다. 농촌에서는 배추가 풍년인데, 소비자가 구입하는 배추의 가격에는 변동이 없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노동자의 노동력과 자본이다. 커다란 냉장ㆍ냉동창고를 갖고 있는 자본은 배추를 계절에 상관없이 판매할 수도 있고, 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공급과 가격을 조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품의 가격 폭등과 폭락의 책임이,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자유방임을 주장했던 애덤 스미스에게 있는 걸까?
현재 경제에 대한 책임을 애덤 스미스에게 묻는 것은 조선이 망한 책임을 주자학이나 고전에 묻는 것과 같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절대군주와 영주, 독점 상인들과의 싸움이었고, 조선을 망친 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 운용한 지배계층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을 망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그 주자학을 잘못 읽은 양반 계급이었다. 즉 조선은 기득권층의 잘못된 정세 판단과 이익 추구로 인해 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기득권만의 잘못일까? 세상이 잘못 흘러가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방관한 백성에겐 문제가 없었을까? 물론 그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그렇기에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원한다면 무엇이든 읽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고로 행동할 수 있다.
고전은 글자 그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시대에 맞게 새로운 정신으로 재편돼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변형하고 악용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구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근본을 보고 현상을 관통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제도의 허점을 찾아내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응징할 수 있는 눈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사회의 부조리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사회를 보는 눈, 정말 누구의 잘못인지 밝힐 수 있는 판단, 그것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PART 2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림이 없다 : 자아혁명
흔들리지 않는 나란 무엇인가
제2의 생존본능을 깨워라: 처음 태어났을 때, 우리의 모습은 새끼 임팔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임팔라가 살기 위해 무릎을 세우는 것처럼, 우리는 살기 위해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 임팔라가 무릎을 세운 것도 우리가 젖을 빤 것도, 모두 살고자 하는 본능, 즉 생존본능이다. 본능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본능은 나이가 들고 성장함에 따라 초기의 것과 다르게 진화되기 마련이다. 성인의 생존본능, 즉 제2의 생존본능이란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잘 살아남으려는 욕망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 주위를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고만 있다면, 당신의 생존본능은 퇴화 중인지 모른다. 퇴화되고 죽어가는 제2의 생존본능을 다시 살려야 한다. 그 시작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할 수 있다는,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한다. 자신이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은 우리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능력은 우리 안에 숨어 있다.
내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 일으켜 세우는 법
불가능은 비겁한 사람의 도피처다: 혁명(革命)과 혁신(革新)에는 모두 가죽 혁(革) 자가 들어간다.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진 문자해설서에는 "짐승의 가죽에서 그 털을 다듬어 없앤 것을 혁이라 한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짐승의 가죽은 털을 뽑은 후에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무두질을 거쳐야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짐승의 가죽은 비로소 쓸모를 가진다. 그래서 혁이 고치고 새로워진다는 뜻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아혁명도 비록 거칠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다듬으면 귀한 가죽이 될 수 있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 흔히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곤 한다. 기회만 오면 인생을 역전시켜 찬란한 삶을 살 텐데, 기회가 오지 않아서 지금껏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혹시 기회가 왔는데 그것이 기회인지 모르고 흘려버린 경우는 없었을까? 프랑스의 화학자 파스퇴르는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고 했다. 기회를 잡는 사람,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들은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평소에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준비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열정에 바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긋는 패배주의에 빠질 것인가? 그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20세기 최고의 밴드, 세계적으로 10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비틀즈의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밴드가 됐다. 그들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은 'Let it be'가 『도덕경』의 표현이라고까지 했다. 실제로 존 레논은 『주역』에 심취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실수와 화해의 악수를, 실패와 격려의 포옹을: 내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웠다 해도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또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도록 독려해야 한다.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실수와 실패를 극복하는 일이다. 스티브 잡스는 "가끔은 혁신을 추구하다 실수할 때도 있다. 하지만 빨리 인정하고 다른 혁신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롭게 탄생한 '21세기의 고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잡스의 성공과 영광은 실수에 대한 빠른 대응에서 비롯됐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껏 터부시했던, 결코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실수와 화해의 악수를, 실패와 격려의 포옹을 나눠라.
자아혁명을 완성하는 네 가지 단계
생각하라 - 생각의 확장: 한 기업의 CEO는 회의 때마다 직원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방법이 없을까,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 어느 부분이라도 좋으니 『사기』의 한 대목을 읽고 회의를 하자고 했다. 직원들은 CEO의 제안을 묵살할 수 없어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침묵만이 흐르던 회의실에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전이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고전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전은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
질문하라 - 대상의 확장: 데카르트는 의심과 질문으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나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회의했고, 회의와 회의를 거듭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찾고 싶어 했다. 결국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존재를 찾는 데 성공한다. 아무리 의심을 해도 지금 의심을 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데카르트가 답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이치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질문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다음에 있다. 질문할 거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