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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독설

태정호 지음 | 지상사
청춘독설

태정호 지음

지상사 / 2012년 1월 / 224쪽 / 13,000원



1. 사회의 화장을 지우고 옷을 벗기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인가?" 평균 이상의 애국심과 건전한 의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그렇다, 당연하다!"고 대답해야 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도 있고,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도 있는데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강변하고, 선거철만 되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모든 연설을 시작하며, 스스로 '국민의 종'이라 자처하니 언뜻 맞는 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백성이든 국민이든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나라의 주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권력이다. 그것이 한 사람이건 집단이건 세습되었건 선출되었건, 그 집단의 구성된 수와 권력 획득 방식, 그들 내부에서의 권력 분배 방식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권력 자체의 기본 속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 도대체 국민은 무엇인가? 아주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다. 자원, 곧 '인적 자원'이다. 기업처럼 소유권이 명확한 공동체로 대상을 바꾸면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더 확연해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회사에 다니면서는 "여러분이 회사의 주인입니다." 또는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같은 소리를 여러 번 듣게 된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이런 자원을 개발하고 사용할 것인가? 당연히 소유주의 효용 극대화를 위해 개발되고 사용된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생식활동도 아주 직접적으로 통제받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자 베이비붐이 발생했고, 이게 너무 확산되어 자원의 잉여가 예상되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까지 갔다가, 출산율 최저 국산까지 가니 이젠 또 결혼 좀 하고 애 좀 낳으라고 난리들이다.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건 나뿐: 국가에서 시행하는 '국민교육'이라는 과정도 결국 국가 자체를 위한 것이지 구성원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필요한 기능이 단순하다 보니 복종과 질서 유지를 위한 기본 사항을 제외하고는 백성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지배층은 교육 기회를 독점하면서 지적 능력 우위까지 쉽게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전되고 기술 발전과 사회구조의 고도화가 진행되면서부터는 고등 전문교육을 받은 인적 자원 자체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 오히려 교육을 장려하고 의무화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똑똑한 자원들이 늘어가니 권력의 정당성 확보에 필요한 여러 가지 번거롭고 복잡한 포장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고, 또 국가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들 자원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보상을 제공해야만 한다.



모든 조직에게는 필요한 자원을 확보, 개발, 선별, 가공해서 효율성과 적재적소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활용해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이 천명이다. 따라서 자원이나 그 자원이 가공되어 만들어진 부품이나 도구를 위해서 움직이는 조직은 없다. 또한 다른 자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자원도 없다. 결국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권력일 수 있고,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움직이고 살아갈 자격이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보통은 이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 사회집단에서 집단의 효율 향상을 위해 구성원에게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온갖 요소가 구성원 가각의 두뇌와 생활 속에 깊이 각인되어 습관화되면서 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바랄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또 온갖 매체를 통해 사람들 속에 깊숙이 설치된 온갖 덕목과 원칙, 진리들이 그 허구성과 개인에 미치는 해악을 모두 숨긴 채 사람을 지배한다.



교육의 또 다른 얼굴

국가관과 애국심: 초등교육 교과과정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른 업데이트 수준일 뿐, 그 본질적인 목적이나 내용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과 습관을 학습시키고 사회생활의 기반이 되는 규칙들을 가르치는 것이 초등교육의 주목적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회가 원하는 가치관을 주입하고 강화시키는 과정이다. 사회의 필요에 부합하는 인간형의 기초를 이 초등교육 단계에서 형성시키는 것이다.



비판력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아동 시기에 언어나 셈법 같은 기초 지식과 대등한 위상으로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각종 규칙들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우겨 넣는다. 왜 꼭 이렇게 우겨 넣어야 하나? 자기 학습을 통해서는 절대 머릿속에 박힐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고 싫은 것들을 당연하고 반드시 필요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 습관화시켜야 하니 엄청난 강도로 주입하지 않으면 교육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그러한 주입에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깊숙이 머릿속에 박아 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라!"고 힘주어 가르치지는 않지만, "나라를 사랑하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려온다. 국가를 외우게 하고, 국기를 그리게 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치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을 본받게 하고, 공산주의가 뭔지는 가르치지 않으면서 공산당은 나쁜 놈들이라고 못 박는다. 남북 대치상황의 희생양인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반공의 본보기가 되어 수십 년 세월을 이겨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이 어린이의 슬픈 죽음을 반공영웅담으로 둔갑시키는가? 당신의 자녀가 무장공비를 만났을 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면 좋겠는가? 맹목적인 반공교육이 순진무구한 어린 생명 하나를 빼앗았다는 반성이 있어야 할 자리가 반공영웅을 탄생시킨 감동의 장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애국을 강조하는 정도는 그 국가의 후진성에 비례한다고 봐도 된다. 살기 좋은 나라라면 굳이 사랑하라고 목 놓아 외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사랑스러운 나라가 아니니까 애국심을 튼튼하게 주입시켜 놓아야 되는 것이고, 국민에게 자유가 없으니 이곳이 자유국가라고 세뇌시켜 놓아야 했던 것이다. 암만 근검절약해도 잘살기 힘드니까 근검절약하면 잘산다고 규정해놓아야 하는 것이고, 국산품의 품질이 조악하니까 국산품 애용운동을 하는 것이다.



국민의 4대 의무는 어떤가? 납세, 국방, 교육, 근로, 왜 이 네 가지를 국민의 4대 기본의무라고 외우고 익혀야 하는가? 세금을 내고 그에 합당한 혜택을 받는다고 느낀다면 누구든 은행에 돈 맡기듯이 자발적인 납세자가 될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의무라고 못 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금 떼어갔으면 당연히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국방도 국민의 의무란다. 교육과 근로도 마찬가지다. 교육받은 만큼, 일한 만큼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보상이 주어진다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할 것 아닌가? 국가를 위해 국민이 희생하고 노력하고 공헌한 만큼의 보상을 등가로 되돌려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의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국가를 향한 무한한 애정으로 국가권력의 여하한 요구에도 정당성에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평생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지는 교육의 목적이다.



공헌과 보상의 별거

필요성의 역설: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서비스 또는 재화에 대해서는 사회권력도 다른 구성원들도 대단히 민감하다. 따라서 공급자가 자신의 경쟁우위 요소를 이용해 단위당 초과이윤을 창출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는 격렬히 저항하고 보복한다.



어느 동네 중국집 자장면이 맛이 기막히게 좋아서 배달시키면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먹을 수 있고 직접 가도 3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오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해도, 그 중국집은 자장면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을 뿐이지 엄청난 인기를 업고 한 그릇을 몇 만 원에 팔 수는 없다. 환경미화원이 아무리 청소를 잘 한다고 해도 일자리를 구하기 쉬워질 뿐이지 차별적 청결성의 대가로 몇 배의 급료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런 제약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항목일수록 더 커지고 필수불가결함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진다. 실제로 그 자장면의 맛이 주는 즐거움이나 청결한 환경의 실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차별성에 대해 몇 배의 가격을 청구하는 것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영역에서의 차별성은 수요의 확보를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는 기능은 있으나 투입 단위당 보상을 획기적으로 상승시키지는 못한다.



반면, 이러한 생활상의 필수성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투입 단위당 차별적 보상을 구하기가 훨씬 쉽다. 프로 운동선수는 같은 시간 동안 똑같은 운동을 해도 성적에 따라 연봉이나 상금을 몇십 배 많이 받을 수 있다. 화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도 같은 행위에 따르는 보상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변호사도 실질적인 법의 도움이 절실한 개인의 다툼이나 일반 형사 건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놓은 법체계의 복잡성에서 유래하는 가공의 문제들을 다루는 영역에서 고수익을 창출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분야는 없어도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것들이다. 세상이 발달하고, 사회가 고도화되고, 세칭 먹고살 만해지면서 찾게 되는 재화와 서비스에서만 단위 투입량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얘기는 곧 사회에서 푸대접받는 일을 한다는 얘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범위를 좁혀 기업조직으로 눈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생산과 관련된 투입은 항상 원가라는 개념 속에서 엄격하게 관리된다. 여기서의 보상 확대는 곧 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시도로 치부된다. 반면, 전략이나 기획 같은 명칭을 부여받은 영역은 그 불명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차별적 보상을 구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이렇게 가장 기본이 되고 또 가장 필요한 영역에서 보상 수준이 낮은 이유는 그들의 공헌이 작아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오랜 기간 끊임없이 사용해야 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을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해 보상하게 되면 사회에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결국에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눌러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은 필수적인 항목에서 차별적인 성과를 통해 안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차별적 보상을 구할 수 있는 영역에 도전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개인의 능력과 성향에 달린 문제지만, 차별적 보상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오히려 바닥으로 추락해버린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 교과과정도 다 빼먹고 운동에 열중하다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서 메달도 못 따고, 프로로 가지도 못 하고, 진학도 못 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인생의 일대 위기를 맞는 게 전형적인 예 중 하나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덤벼들면 큰 낭패를 보게 마련인데, 앞서 보았듯이 사회가 이런 무모한 시도를 부추기는 공급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 적절한 판단을 어렵게 하는 큰 요인이라는 점이 또 하나의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2. 자신을 속이지 말라



잠재력이란 환상을 잠재우고

세상 모든 실패와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은 과대망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나 기업의 쇠망도 개인의 좌절과 절망도 상당 부분은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한 오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폐해 측면에서 보면 과대평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미하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할 체력도 기량도 되지 않는 사람이 무리하게 도전하면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 십상이다. 하지만 충분히 등정 가능한 사람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도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뿐이다.



과소평가는 이룰 수 있는 성취를 놓치게 하지만 과대평가는 참담한 실패를 부른다. 아무리 충분한 능력이 받쳐주더라도 상황변수에 따라 성패가 수없이 엇갈리는 것이 삶이라면, 과대망상은 실패와 낙오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조금 보수적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적절한 수준의 목표와 도전을 이어가는 것이 오히려 웬만한 고난을 이겨내면서 성공을 쟁취하고 또 다른 성공을 향해 뛰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최고기록의 함정: 육상이나 수영과 같은 기록경기에서 큰 대회에 나와 자신의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선수들은 대단히 드물다. 간혹 자신이 연습할 때 세웠던 최고기록을 대회에서 경신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행운이다. 또 일단 절정에 도달하고 나면 사양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최고기록을 자신이 늘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거의 일반화되어 있고, 한 술 더 떠서 100kg을 들어본 적이 있으니 200kg도 들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자신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가정하고 인생과 맞닥뜨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실패자가 되는 길에 접어든 것이다.



우리 삶에서 선택이나 도전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가장 긴 운동경기보다 훨씬 길다. 100미터를 10초 이내에 뛰기에 도전해서 실패하는 데까지는 10초밖에 안 걸리고 조금만 쉬면 호흡도 체력도 회복될 수 있지만, 마라톤에 도전한다면 포기하기까지 두어 시간은 뛰어야 할 것이고, 그만큼 도전 과정에서의 위험성과 체력을 회복하는 기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몇 년, 수십 년을 건 선택과 도전을 결정한다면 과연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가정해야 할까?



'하지 않는다'와 '하지 못한다' 사이의 진실

우리는 언제 '하지 않는다'고 하고 언제 '하지 못한다'고 할까? 글자 그대로라면 전자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을 때고, 후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다. 통상 우리는 나쁜 것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고, 좋은 일은 하고 싶은데도 못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도둑질은 하지 않은 것이고 공부는 못하는 것이다. 또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의 상황을 '하지 못한다'로 표현할 때도 상당히 많다. 여기서 '못한다'는 표현이 사용될 때는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하지 않는다'의 상황이더라도 이미 '못한다'가 사용되는 순간 '할 생각이 없다' 또는 '단호함을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상 '하지 않는다'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하지 않는다'가 성립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자신의 취향이나 상황, 도덕적 판단에 따라 하지 않는 경우여야만 한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고를 때 선택받지 못한 대안들에 대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운동에 만능인 사람이 축구도 좋지만 농구가 더 좋아서 축구를 선택하지 않고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정한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지만 조금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그러한 상황은 그 폭이 굉장히 좁아진다. 예를 들어 사기, 절도, 강도 같은 각종 범죄들도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그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어야만 실행이 가능하고, 때로는 상당히 전문적인 실력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쪽에서는 다들 "난 그런 짓 안 한다."고 하지 "실력이 없어서 할 수 없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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