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마의인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란 정사 『삼국지』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인데, 이는 소설이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인상을 의도적으로 매우 왜곡해서 묘사했다. 그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이 바로 조조를 비롯한 그의 일파들이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의다.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거의 신격화시킨 제갈량을 칭송하기 위해서 그의 말년에 경쟁자 구도를 이어간 사마의를 의도적으로 깔아뭉갤 수밖에 없었다.
과연 사마의가 야심에 가득 찬 권력욕의 화신이며, 적장에게서 농락당하고 부하들로부터 비웃음당할 정도의 인물이었을까? 과연 그 정도의 인물을 조조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서 강제로 끌고 오라고까지 했을까? 사마의의 집안과 배경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결단코 조조에게 발탁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조조는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능력을 중시하여 인재를 뽑았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보면 40대에 대기업의 과장급 정도로 발탁된 모습으로 보면 될까. 따라서 사마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40대가 자신을 투영해보기에 적절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청춘, 세상을 바라보다: 은인자중_ 隱忍自重
집안의 내력을 물려받다: 하내군 온 현의 사마 씨 집안은 후한시대 손꼽히는 일류대족으로 명성이 높았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놓고 겨룬 초한쟁패시대에 유방의 부하였던 사마앙이라는 장수가 공적을 세우고 그의 일족들이 논공행상으로 하내 땅을 하사받아 정착한 것이 온 현의 사마 씨 집안이 출발하는 계기였다. 이후 8세대가 지난 후에 정서장군 사마균이 태어나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고 전한다.
사마균이 예장태수 사마량을 낳았고, 사마량이 바로 사마의의 조부 사마준을 낳았는데, 그는 학식이 높고 도량이 넓은 데다 신장이 8척 3촌에 허리둘레가 5척이나 되는 거한으로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은 품위 있는 선비였는데, 벼슬에 올라서는 진심으로 백성을 아끼고 돌보는 투철한 목민관 정신의 소유자였다. 사마방의 아들 여덟 명은 엄격한 가풍 속에서 기대 이상으로 자질이 뛰어나 사람들이 '팔달(八達)'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는데, 이 가운데 둘째 아들인 중달 사마의가 가장 특출하여 일찍이 '왕좌지재(임금을 보좌할 만한 유능한 인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야망을 한편으로 미뤄두고 본질을 생각하다: 사마의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동탁의 포로가 되어 장인으로 끌려갔던 헌제가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조조를 등에 업고 허도에서 새로운 조정을 열었는데, 그의 형 사마랑도 조조 진영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여기에 몸을 담았다. 그런데 사마의는 그로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은거에 가까운 고향 생활을 계속하였다. 사마의의 이런 처신은 군웅들의 야심과 암담한 현실에 실망하고, 먼 훗날 평화스러운 세상이 올 것을 기다리며, 고향에서 내공을 갈고 닦는 선비로서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조조에게 출사 제의를 받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에게 사마의라는 젊은 인재가 있으니 발탁하라고 추천한 사람은 순욱이다. 바야흐로 조조군이 북방의 패자 원소를 물리치고 허도로 귀환했을 무렵이었다. 이제 거의 4배가 넘는 관할 지역이 생겼으니 당연히 더욱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순욱의 천거를 받자, 조조는 그의 형인 사마랑에게 전해서 사마의에게 허도로 올라와 자신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시 사자를 사마의에게 보냈다. 하지만 사마의는 당시 누군가를 주군으로 모실 의도가 없었으므로, 사신에게 병 때문에 허도로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마침 그때 조조는 국경 너머까지 원정(오환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의에 대한 일은 다음 순위로 넘어갔다.
출사 이후에도 묵묵히 맡은 일만 하다: 조조는 오환정벌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안 수군을 훈련하며 남정에 나설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남정 직전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하나는 인재를 불러 모아 내치를 정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 반대론자의 대표격인 공융을 처형하여 일사불란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었다. 먼저 공융을 처단한 조조는, 지난번에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사자에게 '이번에도 그가 병을 핑계로 삼거든 꽁꽁 묶어서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결국 사마의는 허도로 가서 승상부(조조는 남정 직전 승상이 됨)의 문학연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문학연이라는 자리는 고위직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육ㆍ문화 등을 담당하는 요직이었다.
사마의는 출사는 했지만, 평소 소신답게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숨어 지내는 길을 택했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나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허도정권의 양면성에 비롯된 것으로, 허수아비처럼 되어버렸으나 아직도 명분을 지닌 황제의 조정과 실제적인 통치를 담당하는 조조 정권 사이에서의 입장이다. 즉 사마의는 헌제의 조정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조조 정권에 봉사하여 조 씨 왕조의 출현을 보좌하는 길을 걸을 것이냐를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능력을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낼 것인가, 아니면 일반 관리들처럼 맡은 바 일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겠다는 자숙형 관료의 길을 택할 것이냐 사이의 갈등인데, 사마의는 조심스럽게 자기 직책에서 요구하는 업무만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깊이 생각하여 판단하다: 심사숙고_ 深思熟考
첫 계책과 연관된 고사 '득롱망촉': 사마의가 허도 조정에 출사한 지 7년 만에 내놓은 첫 번째 계책은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아 한중을 점령했을 때(219년) 나왔는데, 당시의 모습을 『진서』〈선제기〉, 『자치통감』〈권 65〉과 『삼국지연의』〈제67회〉에서 대략 비슷하게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한중의 지배자 장로가 마침내 항복하니, 조조는 크게 기뻐하여 장로를 진남장군에 봉하고, 장로의 측근들을 후(侯)에 봉하여 한중을 평정했다. 이때 주부 벼슬에 있는 사마의가 간곡히 고했다. "유비가 지금 유장을 몰아내고 파촉 땅을 차지했으나 아직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군사를 거느리고 파촉으로 나아가서 일거에 몰아친다면 그들은 무너집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들은 조조가 탄식하기를 "인생이 괴로운 것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이미 농서 땅을 얻었는데 다시 파촉 땅까지 바랄 게 있겠는가?"(득롱망촉得 望蜀)라며 군사를 이끌고 나아갈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러자 유엽이 재차 고했다. "중달의 말이 옳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유비 진영이 튼튼해져 다시 그들을 칠 기회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군사들이 먼 길을 와서 노고가 많으니 또한 휴식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라며 군사를 쉬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사마의가 제안한 파촉 진격은 실현가능성이 있는 제안이었다. 조조에게 어떤 복잡한 사안이 달려 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마의의 판단력이 정확했음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허도를 지키는 계책'을 내놓다: 사마의가 책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두 번째 계책을 진언한 것은 촉한의 명장인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고, 구원군으로 보낸 조조 진영의 우금과 방덕을 제압했을 때 나왔다. 조조는 관우군이 계속 북진하여 허도를 위협할까 겁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관운장이 이제 형주와 양양을 둘 다 차지했으니 이는 범이 날개를 얻은 격이다. 만일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허도를 향해 북진해 온다면 어찌할꼬. 과인은 도읍을 딴 곳으로 옮기고 그의 예봉을 피할 생각이다."
그때 사마의가 고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다소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만 우금군이 홍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손권 진영과 관우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따라서 손권 진영에서도 관우가 기세를 올리는 것에 대해 기뻐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사람을 보내 손권이 군사를 일으켜 관우의 배후를 쳐서 형주를 평정하면 그 땅을 손권과 함께 나누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손권군에 위협을 느낀 관우는 형주의 위기를 내버려 둘 수 없어 번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게 될 테니 위기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때 장제가 동조했다. 이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조는 도읍을 옮길 생각을 접고 서황에게 군사를 내주어 번성으로 파견하여 관우를 견제하는 한편, 손권에게 밀서를 보내 형주의 배후를 치도록 작전을 바꾸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손권 휘하의 강하 총사령관인 여몽이 병이 났다며 도읍으로 귀환하고, 현지의 사령관직을 어린 육손에게 맡겨 관우를 방심케 하여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적이 허위는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관우가 방심해서 봉화대를 점령당하고 전투에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사마의가 짜 놓은 계책에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결과로 관우가 잡혀 죽고, 유비에 의한 복수전이 전개된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은 이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지는데, 사마의가 운 좋게 마지막에 승리하여 패권을 잡았다고들 생각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초반부터 손권 진영과 관우의 싸움 자체를 유도한 책사가 사마의였고 그에 말려든 쪽이 제갈량이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중을 점령한 조조가 귀환하여 위왕으로 봉해지는 등 내부 문제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유비 진영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한중 땅의 태반을 점령했다. 화가 난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나아갔다가 전세가 여의치 않자 후퇴하여 업군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업군으로 돌아오자 허도에서 표문이 올라왔는데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조가 격노했다.
그러고 나서 '한중으로 쳐들어가서 유비와 승패를 가르겠다'며 군사를 소집하려 했다. 그때 사마의가 진언했다. "한때의 분노로 병사를 일으켜 원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게 계책이 있습니다. 강동의 손권은 그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냈다가 틈을 타서 몰래 데려갔습니다. 또 유비는 예전에 약속한 파촉을 점령하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해놓고도 이를 손권에게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사이는 예전과 달리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말 잘하는 사람이 친서를 가지고 강동에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형주를 치게 하면 유비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군사를 거느리고 한중과 파촉 땅을 치면 유비는 양쪽을 동시에 막지 못하고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사마의의 계책을 듣고 조조는 말 잘하는 사신을 강동으로 파견하여 손권을 설득해서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유비 역시 즉각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제갈량이 "군사를 일으켜 번성을 치라고 하십시오. 적군이 크게 혼이 나면 이 일은 자연 풀릴 것입니다"라며 관우의 선공책을 유비에게 진언했다. 관우는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출전하여 초반에 조인군을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조조와 손권 양쪽의 협공을 받았다. 그리고 성도로부터 후속 지원을 받지 못해 관우는 육손에게 당하고, 손권에게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 조조가 사망하여 조비가 뒤를 이었는데, 이 기회를 노려 손권이 조조 측의 번성과 양양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위나라 대부분의 중신들은 철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하여 새로운 점령지를 수습하기에 벅찰 지경이다. 따라서 손권의 공격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진언했다. 그런데 조비는 사마의의 방책을 따르지 않아 철수 번성과 양양은 손권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기에서도 냉철히 판단하다: 강목팔목_ 岡目八目
오로 침공의 계책을 내놓다: 사마의와 제갈량, 이 맞수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한 것은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여 오로군을 이용한 촉한 협공 전략을 세웠을 때이다. 수세 쪽의 제갈량은 고심했으나 적절히 대응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비가 관우의 복수전으로 시작한 강동 침공이 육손이 펼친 화공에 당해서 실패로 끝나고 그 자신마저 백제성에서 죽자, 촉한은 태자 유선을 즉위시키고, 제갈량이 승상으로서 촉한의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비가 문무백관 앞에서 "서촉 땅에 주인이 바뀌고 혼란한 틈새가 보이니 이 기회에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가면 어떻겠느냐?"고 묻자, 군사를 담당하는 가후가 시기상조일 뿐 지금은 군사를 성급히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렸으나 사마의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 기회에 그들을 치지 않으면 언제 때가 오겠습니까? 허나 우리 위나라 군사만 일으켜서는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섯 갈래의 침공군을 일으켜 사방에서 협공하여야만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우선 사자를 요동에 있는 선비국으로 보내 국왕을 만나 황금과 비단으로 회유하여 요서의 강병 10만 명을 출동시켜 먼저 서평관을 들이치게 하는 것이 제1로 침공군입니다. 그 다음은 사자를 남만으로 보내어 만왕 맹획에게 벼슬을 내리고 상을 주어 군사 10만 명을 일으키게 한 후에 파촉의 남쪽에 있는 4개 군을 격파하도록 하는 것이 제2로 침공군입니다.
다음은 서신을 동오로 보내 땅을 떼어 주고 우호를 다진 후 손권으로 하여금 군사 10만 명을 일으켜 파촉 땅의 동쪽 부성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 제3로 침공군입니다. 그리고 촉에서 항복해 온 맹달로 하여금 상용 지방의 군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한중으로 진격시키는 것이 제4로 침공군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대장군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아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 땅을 경유하여 양평관으로 진격하여 촉 땅을 취하는 것이 제5로 침공군입니다." 조비는 기뻐하며 네 사람의 인물을 뽑아 서신을 주어 보내고 조진에게 위나라 10만 군사를 내주어 양평관으로 진격하게 했다.
이 작전이 촉한에 전해지자 후주(유비가 죽은 후 그를 선주, 후계자인 2세 황제 유선을 후주라 했다)는 다급히 제갈량에게 오로군 침공에 대해 방비책을 물으니 제갈량이 말했다. "1로군이 서평관으로 치러 오지만 마초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래서 이미 사람을 급히 마초에게 보내 서평관을 굳게 지키되 사방에 복병을 두고 매일 교대로 나가서 적병을 막으라 했으니 그 방면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2로군의 경우 남쪽 4개 군으로 쳐들어오지만 위연으로 하여금 군사가 많은 것처럼 허장성세를 보여 막으라고 했습니다. 남쪽 오랑캐들은 원래 용맹하지만, 의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군사가 많은 줄 알면 감히 공격해오지 못할 것입니다. 3로군의 맹달이 한중 땅으로 온다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이엄과 친한 사이입니다. 신은 이미 이엄의 필적을 본떠 지은 서신 한 통을 사람을 시켜 맹달에게 보냈습니다. 맹달이 그 서신을 받아 본다면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5로군의 조진이 양평관으로 오는 것도 이미 조자룡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관소를 지키되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조진은 우리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이렇듯 네 곳 방면은 염려하실 바 없으려니와, 비밀리에 관흥(관우의 아들), 장포(장비의 아들)에게 각각 군사 2만 명씩을 주어 여러 요충지에 가서 주둔하다가 상황을 살펴 필요에 따라 각 방면을 지원토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4로의 동오군은 쉽사리 우리에게 쳐들어오지 않고 다른 방면의 진행 상황을 살필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언변 좋은 인물을 보내 손권을 이해관계로 타이르면 동오가 군사를 물릴 테니 나머지 침공군에 대해서는 걱정할 바 없는 것이지요."
사마의와 제갈량의 입장 차이: 오로군을 이용한 촉한 침공 계책을 내놓은 사마의와 이를 무산시키려는 제갈량의 방책을 통해 결국에는 제갈량의 뛰어남을 한층 더 확인시킴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심중을 후련하게 해준다. 하지만 사마의가 어떤 사정에 있었는지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이 무렵 촉한 조정에서의 제갈량과 위나라 조정에서의 사마의의 입장이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제갈량은 인물 등용은 물론이려니와 각 전선에 보내는 장수 선정이나 군사의 배치, 사신을 보내는 일 등, 일체의 국내외적 처리 교섭 방법에 대해서 최고 권력자와 동일한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의는 어떠했는가? 조조의 유탁을 받은 중신이라 하지만, 사마의에게는 지략을 통해 작전을 짜고 직언할 수 있는 권한은 있었지만, 작전의 세세한 곳까지 실행할 힘이 없었다. 즉 사마의에게는 계책만 있었고, 제갈량에게는 계책과 스스로 집행할 권한이 있었다. 모든 방면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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