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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질문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
잊혀진 질문

차동엽 지음

명진출판 / 2012년 1월 / 368쪽 / 16,000원



PART 1 생명의 몸살



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이 글을 쓰면서도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리고 어느 환자의 하소연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는 위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신음조차 나지 않는 밤을 꼬박 새웠다지요. 그 고통의 낱낱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도처의 재앙과 참사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또 얼마나 참혹합니까. 일부러 귀를 막지 않는 한 여기저기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소리는 늘 들려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태어날 때(生) 울고, 나이 들도록(老) 온갖 인연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병(病)들어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마지막 죽음(死)마저 고통 속에서 맞이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겪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이별, 상실, 질병, 사고, 좌절의 아픔, 외로움, 소외 등등으로 잠을 뒤척이고, 괴로워하고, 신음합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절로 묻습니다. 왜, 왜, 왜? 고통 앞에서는 누구도 초연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이 물음의 답을 고뇌하기 전에, 고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이 초래됩니다. 그 결과가 고통으로 체험됩니다. 그런데 현대 과학은 그 지진과 해일이 신이 일으키는 조화가 아니라 자연현상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또 사회적으로도 이혼, 이별, 상처 등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 역시 철저하게 사회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은 3차원 공간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고통의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데 익숙합니다. "신은 왜 태초에 고통이라는 것을 허락했는가?"를 따져 묻거나 "왜 전능한 신이 내 고통을 막아주지 않느냐?" 하는 원망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저의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고통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통에도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로 보호의 기능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줍니다. 고통이 없다면 겨울에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며,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 고통은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 체계가 고장 난 병이 바로 '한센병'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손이 썩어들어 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못 느끼니 조심도 덜 하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이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둘째로 단련의 기능입니다. 흔히 박지성 선수의 옹이발바닥, 발레리나 강수진의 붕대발가락을 고통이 가져다 준 영광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만일 그들이 연습의 고통을 거부했다면 오늘날의 그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영광 뒤에 숨어 있는 고통의 또 다른 비밀입니다. 셋째로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의 기능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한마디로 고난 극복의 역사입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해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문젯거리가 생길 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합니다. 이를 빗대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최종적 포괄자'인 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최종적 포괄자와의 상관관계를 짚어보면서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병철 회장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그에게도 고통은 속앓이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은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PART 2 고독한 영혼의 초월본능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영혼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간에 관한 물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에 관해 물으면서 영혼의 존재와 기능을 빠뜨린다면 껍데기만 살피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인간은 물질 덩어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인가?"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나와 있는 주장들을 구분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은 결국 '물질적인 존재'라고 보는 '유물론'의 주장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 등이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 정신, 영혼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물질'이 거듭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봅니다. 단백질 덩어리가 고도로 진화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명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육신'이 수명을 다하면 인간의 '정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놓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고도의 훈련을 받은 수억 원짜리 개 한 마리가 있습니다. 또 거리에 스스로를 방치한 노숙자가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우리 사회에 노숙자보다 고가의 개가 더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의 잘못으로 이 값비싼 개가 죽는다면, 이는 동물학대죄로 벌금을 물고 손해배상을 함으로써 해결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잘못으로 노숙자가 죽는다면, 그가 비록 스스로 용도 폐기했을지라도, 이는 살인죄가 됩니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걸까요? 사람에게는 동물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영혼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관점은 물질을 넘어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되 육체를 나쁘게 보는 '이원론적' 입장입니다. 이는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설'을 내세웠습니다. 영혼들이 본래 이데아idea의 세계에 선재先在하다가, 죄를 짓고 그 벌로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고 본 것이죠. 육체는 악에서 기원한 것으로 영혼의 감옥이요, 속박이며,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얽매여 있는 욕망을 이성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결국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이러한 육체관은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 고행을 장려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뉴에이지 사상들이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고 수련이니 단련이니 명상이니 하는 것들을 통하여 더 높은 단계로 의식의 진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관점은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결점이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니 영혼을 선하게 보고 육체를 나쁘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셋째,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육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 '일원론적' 관점입니다. 곧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로 보는 입장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철저하게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 봅니다. 유럽의 2000년 인문학을 통섭한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을 "동시에 육신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육체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악한 실재'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우리에게 어떤 기능을 할까요? 언젠가 한 체험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콜로라도에 있는 한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영성가 토마스 머튼이 생활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선 '성소자 식별 프로그램'을 6개월 단위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수도생활 체험과 영적 피정을 위해 그곳을 찾았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 친구는 뉴욕 증권가에서 성공한 펀드매니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다 보니 세상의 명예와 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싶어서 지원했다더군요. 담당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곳 열두 개의 수도원엔 항상 지원자들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또한 대부분 나이가 많고,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것을 얻어도 나는 늘 영적인 갈망을 느낀다. 내 삶은 공허하고 허무할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하여 몰려든 대부분 사람이,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는 아예 그곳에 들어와 살기로 작정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회적으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이 굳이 말년에 와서 하느님을 찾고, 신앙 안에서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이는 바로 그들의 영혼이 굶주릴 대로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적인 그 어떤 부도, 성공도, 행복도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부러울 것이 없는 저들이지만, 실상 내면으로는 한없이 가난한 영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필경 그간 외면당해왔던 영적 욕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을 터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그 무엇을 갈망하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 한 우리는 공허감에 점점 더 목이 탈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충족을 모르는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혼이 실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봤습니다. 비극은 많은 이들이 마치 영혼이 실종된 듯이 살고 있으며, 게다가 그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 한 마리가 나가면 찾으러 다니지만 마음이 도망가면 찾으려 하지 않으니 서글프구나" 하였던 맹자의 말은 모름지기 이런 실태를 두고 한 개탄이었을 것입니다. 집 나간 '마음', 곧 '영혼'을 되찾아서, 우리에게서 다시 사람 냄새가 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사람 냄새'는 '영혼'이라는 실재를 매개로 하여 '하늘 냄새'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 필요가 있을까?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당장 우리 모두의 체험에서 찾아집니다. 급하면 누구나 하느님을 찾습니다.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하느님" 하고 찾게 마련입니다. 또 수술실에서 마취를 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이렇게 우리는 무의식중에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왔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기대어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자신보다 큰 존재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종교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종족이건 어느 민족이건 간에 자신들 고유의 '종교'를 신봉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종교심은 인간에 내재한 본능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바로 이러한 종교심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를 심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도피처로 치부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현실의 부조리를 무마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낸 '민중의 아편'으로 몰아세우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현실론자들은 말합니다. "먹고살기 힘든 판에 종교는 무슨 종교, 절에 다닌다고 또는 교회나 성당에 나간다고 밥이 나와 돈이 떨어져!"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전투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도 등장했습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쓴 크리스토퍼 히친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과연 어느 입장이 맞을까요?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의 '세계종교인구 및 세계 선교 연례통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세계 인구 총 68억 5245만 7천 명 가운데 종교별 분포는 이슬람교 22.61퍼센트, 천주교 16.86퍼센트, 힌두교 13.84퍼센트, 개신교 11.50퍼센트, 중국종교 6.84퍼센트, 불교 6.68퍼센트, 정교회 4.00퍼센트, 민족종교 3.81퍼센트, 성공회 1.26퍼센트, 기타 기독교 0.50퍼센트, 유대교 0.21퍼센트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2.02퍼센트였습니다. 종교인의 숫자가 무신론자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은 집단적인 착각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리 그럴듯한 논증 앞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선택의 대상입니다. 갖고 안 갖고 하는 것도 선택이며, 어느 종교를 가질 것인지도 역시 선택입니다. 한 유명한 무종교인인 사언더스는 《아메리칸 매거진》에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저울질해보는 자신의 고뇌를 적나라하게 술회합니다. "당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무덤 다음에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몸과 성격을 구성하는 원형질과 정신원형질의 분해뿐이다. 하지만 이런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그는 어떠한 희열이나 행복도 발견하지 못한다. (…) 얼굴에는 용감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서, 왜 왔는지 모르는 채로 우주의 광대함과 웅장함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며 서 있다. 그는 우주 공간의 거대함과 시간의 무한함에 질리며 자신의 연약함, 가냘픔, 짧음을 깨닫고서 자신의 무한한 왜소함에 코가 납작해진다. 분명 그는 때때로 자신이 의지할 지팡이를 그리워한다. (…)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헤매고, 헤매는 그 뗏목 위에서 그의 마음은 모든 귀한 삶을 몹시도 동경하고 있다." 하지만 무종교인 사언더스는 계속 망설입니다. 왜일까요. 초월계에 대한 욕구만큼이나 물질계에 대한 욕구 또한 강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아, 두 개의 혼이 나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서로 멀어지고 서로 반발한다. 하나는 강한 집념으로 애욕에 사로잡혀 현세에 집착한다. 또 하나는 억지로 이 속세를 떠나서 높은 서조의 영계로 올라간다." 파우스트의 마음은 또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땅에 집착하는 의지와 하늘을 동경하는 의지, 지상적 쾌락의 갈망과 천상적 복락의 희구,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면,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악인이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꼴이야말로 '이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불공정한 사회의 전형입니다. 당연히 이 불공정사회를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탐욕과 착취가 그 마지막 배후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때 인간은 그 책임을 신에게 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묵인한 신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누구도 이런 반응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신이 가장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바로 부조리의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듯이 보일 때입니다. 특히 우리가 '악인'으로 부르는 그런 인물이 백주에 범행을 저지르고 버젓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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