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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정철상 지음 | 라이온북스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정철상 지음

라이온북스 / 2011년 7월 / 292쪽 / 13,800원



Part 1. 서른 번, 나를 바꾸다 -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봉제 공장 직공부터 대학교수까지

봉제 공장 재단 보조원, 우편물 분류, 전단지 배포, 개인 교사, 가내수공업 아트 디자이너, 직업군인, 외신 기자, 영상 번역가, 영어 교사, 기술영업, 국내 영업 관리직(지사장), 기술 분야 엔지니어, 해외 프로젝트 PM, 도서 판매 영업사원, 다단계 판매사원, 소프트웨어 해외 마케터, 무역 영업, 해외 영업, 헤드헌터, 외국인 채용, 기업 면접관, 커리어 코치, 웹 마케터, 웹 기획, 사업 기획, 전문 경영인, 강사, 작가, 칼럼니스트, 파워 블로거, 상담가, 대학교수….

내 기억으로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참 많은 직업을 거쳤다. 그래서 명함이나 프로필에 들어가는 문구 중 하나가 서른 가지의 직업 경험에 관한 내용이다. '봉제 공장 직공에서 대학교수까지 30여 직업을 거친 인재개발 전문가'라는 문구는 나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한번은 강의가 끝나고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그토록 직업을 많이 바꾸셨다면 선생님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옮기셨는지요?" 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시 학생이 기대했던 그럴듯한 직업 철학 같은 건 없었다. 무엇보다도 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청년들처럼 나 역시 입사 지원에서 수없이 고배의 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래서 '어떤 기업이든 나를 원하는 기업이 있다면 기꺼이 일을 하겠다!'라고 다짐했다. 나를 받아준다면 그곳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내가 별 고민 없이 옮긴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발 정신 좀 챙기고 한 곳에 붙어 있어라" 하고 충고했다.

사실 오리무중으로 살아왔다. 직업을 여러 차례 옮기다 보니 취업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업체들 중 자사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한 회사에 지원했다. 다른 회사였다면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닌 경력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오히려 나의 다양한 경력을 경험이 많은 것으로 평가해 주었다. 그렇게 HR관련 분야에서 일을 시작해 이 분야에서 일한 지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여러모로 부족하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 오히려 내 인생의 전화위복이 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진로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양한 연력의 수강생들과 공감대를 금방 형성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다양한 분야를 경험한 덕분이리라.

사람들은 나에게 다른 직업을 더 가져볼 생각이 있느냐고 묻곤 하는데, 물론이다. 지금 현재 일을 천직이라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일할 각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전할 만한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언제든 도전할 것이다. 도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황홀한 희열감을 지금까지 맛봐왔기 때문이다.

가난이 가져다준 선물

젊은 날 아버지는 10여 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지만 뜻하지 않게 불명예로 제대하면서 인생이 뒤바뀌었다. 억울하다고 통곡만 하다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결국 만석꾼 집안의 재산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날리고 말았다.

내가 여섯 살 무렵, 우리 집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외가 친척의 도움을 얻어 4천 평 정도의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여 명의 소작농을 부리던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집 한 채도 없이.

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은 폐차된 고철 버스를 구입했다. 우리 가족은 이런 곳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가난보다 더 싫었던 것은 비오는 날이었다. 장마철이 되면 밤새 내린 빗물로 버스 지붕에서 빗물이 샐 뿐 아니라 물이 가득 고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 집안 식구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밤새도록 바가지를 들고 빗물을 퍼내야만 했다. 학교로 다니던 길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리곤 했다. 친구들이 볼까 봐 부끄러웠다. 학교에 도착할 즈음이면 어느새 진흙이 굳어 있었고, 그러면 나 혼자만 잔뜩 흙을 묻혀서 교실을 더럽히는 것 같아 민망했다. 그래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책상 아래에 다리를 오므리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농사를 짓던 4천여 평의 땅이 팔렸다.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처음에 사뒀을 때보다 땅값이 20, 30배가량이나 올랐다. 하지만 부모님 땅이 아니었기에 우리 가족은 10여 년간 그곳에서 살았지만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다. 돈 몇 푼 받고 쫓겨나다시피 그 땅을 벗어나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부산 동래 복천동이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당시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산동네의 못살던 지역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부모님은 그곳에 조그만 사글세 집을 하나 얻어 만화방을 차렸다. 버스 집보다 더 작은 단칸방이었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내가 농사일에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여러 가지 장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서 내가 삶에 대한 절박함을 빨리 깨닫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지막 자존심이자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어린 시절의 내 가난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단순한 추억을 뛰어넘어 내 삶의 밑천이 되었다.

혹시라도 가난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라!

내게는 그 가난이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Part 2. 멋진 실패, 다시 도전해야 할 의무 -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다

젊은 시절, 내 직업 철학 중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영업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고당한 후 떠난 여행을 통해 영업직에도 도전해보자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보인다고 했던가. 영업직에 도전해보리라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에 끌리는 조건의 영업직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모집 조건이 까다로웠다. 전공이 영어였으나 토익 점수도 부족했고, 게다가 전기전자 분야의 이공계열 전공자들만 지원이 가능한 포지션이었다. 이에 더해서 '관련 경력 3년 이상자'라는 자격요건이 붙었다. 조건만 보면 나와는 거리가 먼 자리 같았지만, 일단 지원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입사원서를 우편으로 접수한 뒤 회사를 찾아갔다. 정식으로 면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채용담당자는 입사지원서를 보더니 자격 요건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공계열이 아니기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서 직업군인으로 4년 6개월간 복무하며 항공기 레이더 전자 장비 관련 경험과 경력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군대가 경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가 큰 도움이 됐다. 사장은 내게 자격 요건이 안 된다고 말했으나 나의 당돌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 했다. 덕분에 세일즈 엔지니어로서 영업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영업 수주 전쟁을 치르며 영업은 양자 간에 만족한 상태로 끝나는 것임을 배웠다. 강압적인 상사로 인해 힘들기는 했지만 이때의 영업 업무를 통해 나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이는 나의 커리어 전환에 큰 자산이 되었다.

영업과 관련한 또 다른 경험이 있다. 서른을 갓 넘겼을 때 소개로 만난 여성이 "정말 좋은 사업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한 중년 남자에게 소개시켰다. 교육장 같은 곳이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다단계? 내가 할 일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잘하면 돈 좀 되겠다는 욕심 또한 나를 흔들었다. 책과 오디오 테이프를 접하며 점차 이 사업에 호감이 생겼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매력까지 느껴졌다. '홀린다'는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업에 투자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시간을 내기 위해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새벽 1시경에나 집에 들어가곤 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잠을 줄이면서 일에 몰두해보긴 처음이었다.

다단계 일을 하면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점도 많다.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세일즈에 필요한 설득기술을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책도 한 권 썼다. 어느덧 1년만 해보고 결정하겠다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결정이든 선택해야 했다. 결국 '이 길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절친했던 친구 하나를 잃었다. 더불어 이 일에 환멸감이 느껴졌다.

세상에 어떤 경력도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다.

결국은 그 일을 대하는 한 개인의 태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실패가 아름다운 이유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건 작건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나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실패한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며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치부로 여기는가 하면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노력하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나 역시 잘못되면 남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힘들어도 실패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고자 노력했다. 내 사업 실패 경험이 당신에게도 삶의 작은 교훈이 되어줄 것이라 믿기에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해 보겠다.

일자리 정보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해서 유통되고 있기에 누구나 취업 사이트 한두 번씩은 방문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하나의 사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이러한 사업을 '웹 리쿠르팅 산업'이라고 부른다. 이는 인터넷 비즈니스와 인적자원 산업이 결합한 사업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취업 사이트, 인터넷 채용 사이트, 구인구직 사이트 등으로 불린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는 신종사업으로 분류되었다.

국내 취업 사이트 No.1으로 알려진 잡코리아의 김화수 사장은 이 분야의 대표 기업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때 동종업계에서는 상도가 없다며 매도되기도 했다. 상위권 기업으로 혼자 지독히 무료 채용 광고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뚝심으로 잡코리아는 국내에서 완벽한 선두를 탈환했으며, 결국 다른 모든 업체도 유료를 포기하고 무료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김 사장은 사업 성공을 위해 90퍼센트에 가까운 자신의 지분을 모두 내놓고 사업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독보적인 1위를 달성했다. 2006년 잡코리아가 미국 몬스터닷컴에 1천억 원에 매각되면서 김 사장은 천만장자 대열에 올라섰고, 여전히 그는 잡코리아의 선장을 맡고 있다.

이 분야 사업을 시작했던 2002년 당시 나에게도 성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사업 4년 만에 능력 부족으로 사실상 사업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 실패의 원인으로는 총체적 경영 지원 부족 등 다양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밝힌다. 좀 더 작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전문화된 시장을 노렸다면 작은 시장이나마 선점할 가능성이 있었다. 좋은 콘텐츠와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음에도 결국 사업에 실패했다. 취업 사이트를 소유한 모회사의 역량과 나의 역량을 과신한 탓이다.

나처럼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선택과 판단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마주치기 마련이다. 중요한 순간에는 무엇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절대 집중해야 한다. '과연 내가 내린 판단이 올바른가, 내가 계획한 일이 어떤 면에서 장점이 있는가, 어떤 면에서 취약한 점이 있는가, 수익성은 어떤가, 실용성은 있는가, 현실적인가, 고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 자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 나는 내 판단을 뒤따를 만한 행동력이 있는가, 자금 동원력은 있는가, 이 일을 해내기에 시간적으로 충분한가, 시기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은 언제인가, 지금의 결정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과연 현명한 결정인가’ 등의 질문을 냉정하게 던지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된다. 일단 결정을 내린 뒤에는 행동에 몰입하고 헌신해야 한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머리로만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 고민을 글로 적어서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분석해보자.

너무 간단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탁월하다.



Part 3. 인생의 바닥에서 일어서게 하는 힘 - 같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사람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사람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일이라도 불만족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2007년 2월, 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뜻한 어느 날이었다. 대구에서 오전 강의를 끝내고 부산 강의를 위해 택시를 타고 급히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분이 앞에 가는 차량에 대한 투정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정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욕하면서 선택을 잘못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것이다. "아, 날씨는 뭐 요따위야. 2월이면 겨울인데, 겨울이면 겨울다워야지. 날씨까지 X나 덥네!" 이 아저씨의 상스러운 불만을 더 듣는다면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다. 택시기사와 함께한 불과 10여분 동안 세상의 욕이라는 욕은 다 들은 것 같다.

부산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니 대구 아저씨보다 더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기사분이 "사탕 좋아 하십니까?" 하고 부산 특유의 억센 억양으로 묻는다. 이번에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날씨가 좋지예~ 봄이 온 것 같심더~"라고 말한다. 그 말에 잔뜩 긴장해 있던 내 얼굴에 웃음꽃이 절로 피었다. "아저씨는 운전을 즐겁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운전 안 힘드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운전예, 힘들지예. 마, 그렇지만 즐겁게 운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손님들한테 껌이나 귤이나 사탕 드리면서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재미로 삽니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똑같은 2월이지만 어떤 사람은 겨울 날씨가 덥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봄이 왔다고 즐거워한다.

왜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 살아갈까?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아가든,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행복과 불행을 가르기 때문이 아닐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30대 중반의 한 구직자가 찾아왔다. 내 강의를 들었던 한 여성분의 남편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벌써 9개월째 실직 상태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다 화가 나려고 했다. 9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력서도 대학 졸업할 때 쓴 것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첫 직장도 아는 사람을 통해서 들어가고, 두 번째 직장도 아는 사람을 통해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세 번째 직장도 아는 통해서 들어가리라 기대하고 무작정 기다렸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막연한 긍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긍정성으로 포장한 게으름일 뿐이다.

나는 가만히 다 듣고 나서 쓴소리를 했다. 도대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고, 삶의 기본적인 자세가 너무나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는 취업해도 소용없겠다 싶었다. 또다시 문제가 발생해 40대로 접어들면 더 이상 기회도 없을 만큼 나락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책부터 읽으라고 권했다. 읽어야 할 10여권의 도서목록을 그 자리에서 바로 적어줬다. 이와 더불어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그동안의 무책임함에 대해 당장 사과를 하고, 앞으로 열심히 노력할 테니 자신을 믿고 조금만 더 지켜봐 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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