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마음 버리기
오제키 소엔 지음 | 큰나무
흔들리는 마음 버리기
오제키 소엔 지음
큰나무 / 2011년 6월 / 252쪽 / 12,000원
마음의 용량을 키우다가난을 익히다_ 돈이란 무엇인가
활기가 사람을 살게 한다: 지금 지갑에 얼마가 들어 있는가? 10만원? 오, 상당한 부자다. 뭐 1,500원? 음 그것도 좋다. 이 책을 덮고, 있는 돈 전부를 아니 100원만 남겨놓고 다 쓰도록 하자. 조건은 오늘 중으로, 용도는 자유다. 아깝나? 자, 이제 다음 날. 당신의 주머니에는 100원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의 돈을 어디에 썼을까. 어디에 썼든 간에 기분만은 상쾌할 것이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부동심의 경지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아아, 어리석은 짓을 했다.' 하며 후회하는 사람은 나와 같이 '부동심'의 길을 걸어보자.
이어서 두 번째 수행이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그 100원 동전 하나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역시 용도는 자유다. 정액권을 이용해서 학교나 회사로 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도 좋다. 전당포에 가도 좋다. 공중전화로 애인을 불러내 도움을 받아도 좋다. 아침부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도 좋다. 인간은 2~3일 굶는다고 쉽게 죽지 않는다.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수행을 요구한다고 불평하지 않길 바란다. 단, 한 가지 알아줬으면 하는 건 '돈이란 무엇인가'이다. 인간은 돈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는데 그건 순 거짓말이다. 돈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는 생명의 활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요는 단돈 100원이어도 좋다. 지금 가진 걸 어떻게 쓰며 살아갈지 그 임기응변이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이다.
돈이란 활기가 있는 곳에 모였다가 곧 떠나간다. 말하자면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바람이 한곳에 오래 머물면 집착이 생긴다. 반대로 돈이 끊임없이 유통되면 집착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있는 절만 해도 그렇다. 스승인 칸세 화상이 주지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절은 다른 곳처럼 부유하지 않고 몹시 황폐하고 빈곤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자연히 절 안에 활기가 돌고, 그 활기에 빨려 들어오듯 조금씩 돈이 모이고, 그 돈은 다시 절 밖으로 내보내졌다. 그로 인해 더욱 많은 돈이 모이고 더욱 많은 돈이 나가게 되었다. 절에는 조금의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유한 절은 이렇지 않다. 재산으로 먹고산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활기가 없어진다. 모이는 돈이 적어지면 자연히 나가는 돈도 제한되고 거기서부터 집착이 생겨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는 대부분 구두쇠다. 부동산이 많다는 건, 즉 돈에 움직임이 없다는 소리다. 화장지, 연필 등을 낭비하지 말라고 늘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런 회사에는 활기가 없다.
장안은 사람이 많아 늘 번화하고 활기가 넘쳐흐른다. 그곳에는 큰길이 몇 개나 관통하고 있어 활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상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상인, 그것을 사서 나가는 사람도 있다.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훔쳐 달아나는 도둑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인간도 장안과 같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의 진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건 활기다. 즉 '나는 살아 있다'는 생명의 힘이다. 그것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릴 여유가 없을 만큼 그저 있는 힘껏 살아가면 된다.
고독을 견디다_ 철저히 고독하고, 고독을 드러내라
고독은 자신만의 것이다: 삶에 가장 고독했던 순간은 건강을 잃었을 때다. 예전에 위장에 병이 났을 때 정말 고통스러웠다. 좀처럼 몸이 말을 안 듣고 '남들은 안 그런데 왜 나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몹시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고독을 견디다'라며 잘난 척하고 있지만 실은 고독을 견디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어릴 적, 뒷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식이 없어 '나라오'라는 어린 아이를 맡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나라오가 사라졌다. 할머니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았다. 우리 어머니도 나라오를 찾으러 나갔다. "뒷집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가봐야겠다. 집 보고 있어라." 남겨진 건 나 혼자뿐. 커다란 집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한 칠흑 같은 어둠이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것만으로도 불안한데 갑작스레 예전에 겪은 무서운 일이 떠올랐다. 이 역시 나라오와 관련된 이야기로, 한번은 나라오가 친부모 곁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뒷집 할머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려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런데 발을 들인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우물 밧줄에 매달려 소리쳤다.
"살려줘, 살려줘!" 할머니의 목소리는 밤의 암흑 속에서 으스스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섬뜩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었다. 그런데 그날 혼자 집을 보고 있던 중에 그 일이 떠오른 것이다. 어디선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갑자기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어머니가 돌아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그저 홀로 울었다.
다툼을 피하지 않는다. 걸려온 싸움은 상대해준다.
다툼은 반드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사람과 사람 간의 다툼은 결코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먼 친척뻘 되는 집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 집은 작은 숲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계선 문제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공들여 돌봐온 나무를 이웃 사람이 베어다 내다 판 것이다. 본디 그 땅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내 땅에 있는 삼나무이니 내 맘대로 내다 판 것이다." 다툼은 먼저 문서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사는 사람들끼리 우편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양쪽 집 아이들끼리 싸움을 하면 부모들까지 끼어들어 결국에는 피를 보는 소동으로 번졌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눈길을 거두고 싶어지는 이야기인데, 재판이 시작되자 양쪽 집안의 싸움은 급기야 온 동네를 두 동강 내버리고 말았다. 양쪽 집이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발언을 해줄 것 같은 증인을 세운 것이 발단이었다. 그들은 각자 모여서 속닥속닥 의논을 했다. '저 집은 저쪽 측 증인이 될 것 같다.'는 소문이 돌면 그때부터는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길에서 만나도 서로 침을 뱉고 지나갈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마을이 2, 30그루의 삼나무 때문에 피 튀기는 싸움이 된 셈이다.
남들이 보면 '그까짓 2, 30그루의 나무 정도 가지고 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몇 십 년 동안 고생하여 키운 삼나무이다. '2, 30그루'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름 뙤약볕 속에서 잡초를 뽑고 잔가지를 치며 애지중지 키운 삼나무다. '싸움은 싫다'며 잠자코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나무를 자른 쪽에서도 할 말은 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소중한 토지에 다른 사람이 맘대로 나무를 심은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조상들의 노고를 헛되이 하는 게 된다. 이러한 싸움이 일어난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이 세상이다.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겠다.
전력을 다해 싸운 상대와는 싸움이 끝난 후 깊은 우정이 생긴다고 한다. 복싱에서도, 유도에서도 라이벌은 언젠가 친구가 된다. 그러나 어중간하게 싸우면 결국에는 어중간한 관계밖에 되지 않는다. 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고 있을 때 목을 베고 싶을 만큼 달달 볶으며 괴롭히는 노사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친밀감과 존경심이 생겨난다. 이렇듯 인간은 언제까지고 한 사람을 미워하고 두려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툼을 피하고 다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겉모습만의 평화로 생활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화는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단숨에 붕괴되고 만다.
한 등산 단체가 있다. 일정, 코스, 역할 분담 등 사전에 요란스러운 논의를 거치지 않은 단체는 상당히 위험하다. 우연히 날씨가 급변하다거나 사고 등의 변수가 생기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상사와 대립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겠는가 아니면 상대가 상사라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의견을 굽히겠는가. 이러한 일은 늘 당신의 인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납득할 때까지 철저히 싸워라. 싸움 속에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겨날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사와 싸우면 나중에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고민 따위는 하지 마라. 그런 고민은 직장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당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빼앗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_ 가지고 싶은 것에 솔직해지는 마음
꼭두각시 인형이 될 것인가, 인형의 조종자가 될 것인가: 조체, 조식, 조심이란 말이 있다. 몸을 다스리는 조체와 숨을 다스리는 조식이 잘못되면 마음이고 뭐고 없다. 그렇게 되면 '부동심'을 말할 처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무의식중에 건강해져야지, 강해져야지 하고 계속 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변소에도 가는 것이다. 항상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도록 하자. 더욱 강해지자.
현대의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탈샐러리맨'이라든지 '독불장군'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 제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혼자서 일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정비가 잘되어 있는 조직에 배속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개인이다. 중요한 것은 혼자 있느냐 둘이 있느냐가 아니다. 하나하나의 일에 열심히 부딪치고 있느냐, 반듯하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는 라이벌 관계의 사원이 있다고 치자. 둘은 분명 사내에는 라이벌이자 적군과 아군 관계이지만, 만약 밖에서 외부 사람을 상대해야 할 경우에는 단단히 결속해 아군이 되어야 한다. 공통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한다. 즉 '여'가 필요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 '여'와 동시에 '탈'이 기다리고 있다. 진정으로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 성장시키고 싶다면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흡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설령 라이벌의 아이디어라도 필요하다면 가차 없이 빼앗아라. 이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좋은 점을 서로 빼앗고 또 서로에게 빼앗기는 절차탁마의 관계가 중요하다. 당신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금 하는 일에 회선을 다해 부딪치고 있는가. '탈샐러리맨'도 '독불장군'도 그 점을 알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다. 인형 조종자가 되려다가 가엾은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말 것이다. 겉모양만 신경 쓰고 있다가는 만족스럽게 일하기는커녕 꼴사납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저 사람에게 미안한 일인데.' '이제 이쯤에서 그만하자.' 하고 마음이 움직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해내야 한다. 정말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갖고 싶다', '하고 싶다'라고 간절히 바라면 '누구누구에게 미안하다'든지 '이제 그만하자'라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빼앗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마라. 적과 친숙해져라. 상대의 것을 정말로 빼앗았다면 그것을 완전히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해 생겨난다. 물건도, 돈도 그게 무엇이든 간에. 시시각각 죽어가는 생명을 불태우고 그것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생명이 담겨있다.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또는 빼앗기는 것이다. 주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생명이 싹트게 된다. 빼앗기기만 하면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노력해야 한다.
마음의 탄력성을 키우다괴로움을 가까이하다_ 멋있어 보이는 삶만이 중요한가
무심같은 건 없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괴로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시시한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모든 괴로움을 초월했다'라고 깨달음을 얻은 척하는 건 정말 엉터리 같은 짓이다.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고 철저하게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예를 들어,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죽었다. 문상을 하러 달려가자 친구의 아내와 아이들이 눈물로 밤을 새우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쥐어뜯기듯 괴롭다. 괴롭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다짐하게 된다. "적어도 나만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저런 슬픔을 겪게 하지 말아야지," 괴로움은 괴롭기 때문에 인간을 분발하게 만든다. 괴롭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서 기어오르려고 노력한다. 괴롭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 생겨난다. 가난은 괴롭다. '무사는 밥을 굶어도 이를 쑤신다'는 속담이 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센 척하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괴롭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괴로워해라. 더 많이 괴로워해라. 있는 힘껏 괴로워해라. 거짓 깨달음으로 괴로움을 얼버무리지 마라. 마음도 괴로움도 없는 것은 난봉꾼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고 그것을 되받아치는 마음의 탄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가까이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이별을 슬퍼하지 않는다_ 부모의 관 위에 올라앉아 울다
하늘의 하늘 덮개, 땅의 땅 덮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다 내편이다. 그것이 하다못해 세균이라도 좋다. 악한 자든 선한 자든 살려고 애쓰는 자라면 모두 나의 친구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야 한다. 아버지의 관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소리 내어 울던 그 남자는 그때 그곳에서 전력을 다해 살았던 것이다. 나는 알 수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장례식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히 여러 가지 것을 신경 쓰게 된다. 유족이 이성을 잃고 슬퍼하는 것은 손님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의 관 위에 올라앉는 것은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도덕관이 작용하게 된다. 유산 상속에 대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더울 때는 '아아, 더워서 못 참겠다'고 느끼고, 추울 때는 '추워서 못 살겠다'고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어째서 슬플 때 철저하게 슬퍼하지 못하고 기쁠 때 있는 힘껏 기뻐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진심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망설임이 있고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이야기속의 그는 아버지의 관 위에 올라앉아 목 놓아 울었다. 그때까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고민했는데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해 버렸다. 그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시골에는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다. 노인이 죽으면 천수를 다했다고 축하하면서 술을 마신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그것을 숨기기 위해 마시는 술이다. 숨을 내쉬는 것도 들이마시는 것도 모든 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지만 내일부터 다시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기운을 북돋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다. 또한 유품을 태우기도 한다. 죽은 사람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함이다. 물건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죽은 사람의 마음이 아직 그곳에 있게 된다. 죽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산 사람도 그렇다. 고향에 없더라도 살던 곳을 떠나 설령 타향, 이국땅에 살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물건이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의 마음은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