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운명과 맞장뜨기

박용배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운명과 맞장뜨기

박용배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6월 / 208쪽 / 15,000원



Part 1 인생의 화폭에 명작을 남기자




복이 된 감옥 (오 헨리 작품의 터닝 포인트가 된 감옥생활)

오 헨리(O. Henry, 1862~1910년)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어머니 역시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3살 무렵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의 가족은 할머니의 집으로 이사했다. 오 헨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촌이 경영하는 약국의 조수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다가 1881년 약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듬해 텍사스주로 건너가서 점원과 직공, 제도사 일을 하기도 했으며, 25세 때 17세 소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1890년부터 은행원 등으로 일했으며, 이 기간에 첫 작품 『구르는 돌』을 발표했지만 고작 1,500부가 팔리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1년 그는 아내의 내조를 받아 주간지를 창간하면서 문학과 본격적인 만남을 가졌고, 간간이 지방 신문 등에 글을 싣는 등 문필가로 활동했다.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닥쳐온 것이 1896년이었다. 1895년 휴스턴으로 이사한 후 우체국의 고정 작가로 글을 쓰고 있던 중, 2년 전 오스틴에서 재직했던 은행에서 그가 재직 중 계산 실수를 범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한 것이다. 급한 나머지 그는 일단 남미의 온두라스로 도피했지만 아내의 결핵이 악화되어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결국 아내는 1897년에 사망했고, 오 헨리는 체포되어 횡령죄로 5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오하이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는 감옥 안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것은 깊은 사색의 세계였고, 그곳이 그의 글쓰기의 발판이 된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 경험한 풍부한 내면세계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아름다운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30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소설을 쓴 작가로, 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오 헨리가 그의 대표작 『크리스마스 선물』과 『마지막 잎새』를 비롯한 아름다운 단편 300여 편을 남긴 배경에는 바로 3년간의 감옥생활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오 헨리가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아름다운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년의 세월 동안 오 헨리는 감옥 안에서 많은 생각과 사색에 젖어들었고, 그 고독 속에 멋진 작품들이 나왔다.

필자는 물론 감옥 예찬론자가 결코 아니다. 감옥은 가지 않아야 할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사람들이 불멸의 작품세계를 그려나갔다. 우리에게 감옥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가? 그럴 때마다 인생역전의 기회로 삼고 나만의 불멸의 명작을 그려보자. 역사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감옥을 거치지 않았던가.

성경에는 요셉이란 인물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레미야도 감옥, 즉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 큰 응답을 받았고, 바울도 빌립보 감옥과 로마 감옥에 갇혔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갇혔지만 살아 나와서 총리로서 더욱 큰일을 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오 헨리의 감옥생활 3년! 그는 그 감옥생활을 작가의 길로 가는 터닝 포인트로 삼았다.

인생의 화폭에 당신만이 그릴 수 있는 명작을 남기자_ 70세에 화가가 된 그랜드마 모제스 이야기미국의 화가로 유명한 그랜드마 모제스는 원래 1860년 뉴욕 북부 변두리 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이름은 안나 마리아였다. 가난한 농부의 장녀였던 그녀 밑으로 동생이 무려 10명이나 더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농사일과 가사 일을 장녀에게 가르쳤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발명가였으며 가정에 충실했다. 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했다. 안나 마리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안나 마리아는 12세 때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근처 어느 농가의 하녀로 일해야만 했다. 그녀는 15년 동안 하녀로 일하다가 27세 때 인근 농가에서 일하던 비슷한 처지의 토마스 살몬 모제스라는 총각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버지니아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아름다운 계곡을 보고 그 근처의 농지를 구입해서 20년간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자녀 중 5명은 질병으로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고, 남은 5명을 키워서 자립시켰다.

그녀는 1905년 자신의 고향인 뉴욕주 북부의 농촌으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1927년 남편 토마스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때 그녀 나이 67세였다. 그녀는 남편도 떠나고 자녀들도 독립하여 집을 떠나자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먼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배웠던 바느질을 통해서 그림을 바느질로 수놓는 자수 그림에 몰두했다. 그렇게 자수 그림에 3년간 매달리는 동안 눈도 어두워지고 관절염이 심해지자 물감으로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70세 때부터 10년간 열심히 그림을 그린 그녀는 마침내 80세가 되던 해에 첫 작품전을 열었다. 그리고 계속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여, 자신의 꿈과 추억과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 화폭에 담겼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1,600점의 그림을 남겼다. 1960년 그녀의 100회 생일 때 뉴욕주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는 그 날을 '모세 할머니의 날'로 공포하고 널리 축하해주었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보통 사람들은 정년퇴직을 하고나면 별로 하는 일 없이 소일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얼마 전 어느 지방도시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93세가 되신 어르신 한 분이 상담하고 싶다면서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왔다. 그 어르신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는 어느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63세에 은퇴하기까지 강단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평생 교육자로 보냈다. 그는 은퇴 후의 세월들은 그냥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하는 일 없이 소일하며 살았다. 자녀들은 성장하여 분가했지만 사업한다며 한 칸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사업에 보태달라고 계속 졸랐다. 아파트를 팔아서 사업자금으로 도와주었으나 사업은 실패했고, 자녀들로부터 연락도 잘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부인은 치매를 앓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63세에 은퇴하고 93세가 되도록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한 것이 속상하고 억울하다며 하소연했다. 은퇴 후 30년의 세월은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데, 은퇴와 더불어 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고 눈물지었다. 자녀가 아파트를 팔아서 사업자금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는 외면했어야 하는 건데 결국 도와준 것이 화를 불렀다며 모든 것이 후회스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곧 적절한 때다.그랜드마 모제스는 7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600점의 작품을 남겼다. 70세 이전까지 그녀의 삶은 서론적인 삶이었다. 70세 이후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그의 본론적인 삶인 것이다. '나는 이미 늦었다'거나 '나이가 많아서 할 수 없다'고 혹시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이 탓하지 말고 도전하는 자에게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 수상은 '성공하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실패하는 사람의 특징은 희망 속에서도 절망만 본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 이제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자. 나는 무능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절망하지도 말자. 반드시 당신만이 잘할 수 있는 달란트가 숨겨져 있다. 그 달란트는 할 수 있다고 믿고 도전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랜드마 모제스처럼 인생 본론적인 일에 쓰임 받자. 나만이 할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나만의 명작을 그리자. 그리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자.

Part 2 꿈을 꾸는 자에게 그 꿈은 이루어진다



꿈을 꾸는 자에게 그 꿈은 이루어진다 (미국의 항공모함의 이름으로 남은 니미츠의 꿈)

미국은 세계의 맏형 역할을 하며 세계 질서를 위한 국제경찰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맏형' 역할과 '국제경찰' 역할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군사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가 된 미국의 군사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항공모함이다. '움직이는 야전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항공모함은 모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데, 그 중 예외적으로 유일하게 해군 제독 이름으로 불리는 항공모함이 바로 니미츠호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왔다간 니미츠호는 미국이 1961년에 건조한 것으로, 길이 318미터, 폭 39미터로 그 크기가 축구장 3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어마어마한 군함이다. 그 항공모함의 이름으로 남은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1885~1966년)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독일 상선의 선원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는 육군 장교가 되기를 희망하여 지원했으나 자리가 없어서 그 꿈을 접어야 했는데, 마침 그 지역의 하원의원이 그에게 해군 지원을 권했다. 그 의원의 권유대로 니미츠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여자친구는 그가 앞으로 해군 제독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별 4개짜리 계급장을 선물했다. 니미츠 소위는 가슴속 주머니 속에 계급장을 품고 다니며 언젠가 해군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꿈을 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근무하는 부대의 사령관이 옷을 세탁소에 맡겼는데 그만 계급장이 없어져버렸다. 사령관은 곧 사열을 해야 하는데, 계급장이 없어져서 낭패를 당하게 되었다. 사령관은 부관을 시켜서 혹시 누가 별 4개짜리 계급장을 갖고 있으면 급히 사령관실로 가져오면 상을 주겠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부관들은 별 4개짜리 계급장을 가지고 올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령부에는 사령관 외에는 별 4개를 단 다른 군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니미츠 소위가 자신이 품고 다니던 별 4개짜리 계급장을 가지고 사령관실로 달려왔다. 사령관은 반가운 마음으로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소위 신분인데, 어떻게 별 4개짜리 사령관 계급장을 가지고 있나?" 그러자 니미츠가 대답했다. "그 계급장은 제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여자친구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제 여자친구는 제가 해군 제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령관은 니미츠 소위에게서 빌린 계급장을 달고 무사히 사열을 마칠 수 있었다.

1905년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니미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대서양 잠수함부대 사령관 참모장으로 복무했고, 해군과 육군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친 뒤 1939년 미 해군의 항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함대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육군과 해군을 함께 통솔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격퇴시켰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44년 12월 니미츠는 해군 원수로 승진했고, 1945년 9월 5일 도쿄만에 있는 그의 사령선 미주리호 선상에서 역사적인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해군 참모총장이 된 그의 공적을 기리며, 항공모함 이름을 니미츠 호라고 붙인 것이다.

그렇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별 4개의 계급장의 선물로 받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나는 앞으로 반드시 해군 사령관이 되고 말겠다'는 꿈을 가진 니미츠!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뒤 그는 진짜 별 4개를 단 사령관이 되어있었다. 흔히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꿈을 가슴에 품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니미츠 소위가 사령관이 되고자 한 꿈은 성취되었다. 앞으로 4성장군으로, 사령관으로 최고의 제독자리에 오르고야 말겠다는 꿈을 가진 니미츠는 근무하는 태도도 꿈이 없는 사람과는 달랐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봐야 하겠다.

Part 3 기적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다



우리 안에 잠든 96%의 숨은 능력을 깨우자 (한강의 기적)

196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인도가 제일 못 살았고,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경제 규모가 12위이고, 거의 모든 부분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기적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반세기 만에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경우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경제적 부와 민주주의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적이 펼쳐졌다. 이것을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브랜드 상승, 삼성의 글로벌 기업화, 현대자동차와 대기업들의 세계 진출, 그리고 김연아를 비롯한 수많은 운동선수들의 선전과 국제 경기에서의 우수한 성적 등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은 곧 서울의 기적이고, 서울의 기적은 대한민국의 기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배가 고프고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최정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길이 많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기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한강의 기적'을 '나의 기적'으로 삼으면 어떨까? "나에게도 기적은 일어난다. 나는 기적의 주인공이다. 나는 기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사실 필자는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다. 한강의 기적을 나의 기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후 14살부터 중국집 배달부 일을 했다. 원래 허약한 몸인 데다 어릴 때부터 너무 굶어서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워서 쓰러졌고, 위장병이 심해 매운 것은 조금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항상 성공하는 사람으로 우뚝 서는 꿈을 가졌다. 24세 때 결혼했지만 부부 갈등이 심해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대학원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 목회 활동을 하면서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도 내고, 방송출연도 가끔 하면서 글을 쓰며 작가 활동도 한다. 그리고 탈북 청소년 무료학교인 '한민족렘넌트학교'를 세워서 탈북 청소년들을 공부시키며 그들을 전문인으로 양성하고 있다. 또 정부종합1청사와 2청사, 신우회 등에서 3년간 예배와 상담을 맡았고, 각 언론사 사역(使役)에 12년을 보냈으며, 지금은 청와대에서까지 사역을 이어가는 가운데 신앙과 인생 상담으로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방송국 앵커가 자녀 일로 고통을 당하면서 죽고 싶어 하던 중, 필자를 만난 후 행복을 되찾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기적은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고, 내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1,000억 개의 뇌신경 세포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하루 10만 개씩의 신경세포가 죽어나간다. 1년이면 3,650만 개, 100살까지 살게 된다면 36억 5,000만 개가 없어진다. 그래도 계산해보면 4% 정도만 없어지고 나머지 96%는 써보지도 않고 그냥 죽는다고 한다. 우리 안에 그 96% 정도의 잠재된 능력이 잠들어 있다. 『내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라』는 책도 나와 있지 않은가!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적을 믿었고, 도전하여 성취했다. 한강의 기적을 우리는 직접 체험했고 누리고 있다. 그 기적을 나의 기적으로 만들자. '나는 기적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려보고, 적어보고, 도전해보자. 기적은 내 안에 잠들어 있다. 주인인 나 자신이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Part 4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자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