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스타일
김태광 지음 | 글로세움
박정희 스타일
김태광 지음
글로세움 / 2011년 5월 / 264쪽 / 12,800원
CHAPTER 1 박정희처럼 "살아라"가난은 나의 스승이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대통령 박정희, 그는 독특한 패기와 추진력,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인공이다. 그런 박정희도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그의 열등감은 작은 키와 지독한 가난에서 비롯된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80퍼센트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특히 어린 그에게 가난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군인이 된 후와 결혼해서도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 고통 받아야 했다. 물론 다른 이들처럼 그 역시 마음먹고 부정축재를 했다면, 충분히 경제적으로 넉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질 못했다. 어릴 때 가난을 몸소 겪으며 자란 그였던지라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이 그의 인생 원칙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난은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종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회상하곤 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와 같은 처지였다면 기가 죽어 자신감 없는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강한 자존감으로 자신을 지키고 성장시키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최고의 약점이 최대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다
우여곡절 속에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7년 4월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지금도 교사라는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서는 이제 가난을 좀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한편 그는 교사생활에 열성적이었다. 사랑과 열성으로 가르쳤기 때문인지 학생들도 그를 존경하면서 잘 따랐다. 그는 또한 자신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아픈 성장기를 보낸 탓인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겐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열성적으로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갈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두겠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그리곤 홀연히 만주로 떠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으로 군인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바로 자신의 꿈 때문이었던 같다. 그 후 그는 다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되었고, 육군 대위가 되었다. 그리고 1953년 37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대통령이 된 것이다. 아무튼 박정희는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면 과감히 그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달려 나갔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같다.
시련은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보면 시련에 처하게 된다. 순탄치 않았던 박정희의 삶 역시 그랬다. 살펴보자.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순천 지역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는 즉각 반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군을 투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반군토벌사령부에 참여, 정보장교로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 등을 맡았다. 그리고 여순 반란이 진압된 후 서울로 올라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과장 요원으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1948년 11월 11일, 그에게 갑작스런 시련이 닥쳤다. 과거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박정희는 군 수사팀에 체포되어 남산 기슭에 있는 헌병대 영창에 수감이 되었고, 그곳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모진 전기 고문을 받으며 취조를 받았다. 강심장이었던 그였지만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진술서를 적었다. 참고로 그의 남로당 가입은 정치적 신념에 뿌리를 둔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었다. 한때 욱하는 성격을 다스리지 못한 단순한 실수였다. 그는 자술서를 써내려가면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함께 남로당에 가입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밝혔는데, 이것 또한 그의 인생에 최대의 오점으로 남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이렇게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사책임자인 백선엽 정보국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런데 백선엽에게 결코 무죄라거나 억울하다는 식의 변명을 하지 않았고, 그것보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다. 인간적으로 호소한 것이다. 그의 간절함이 결국 백선엽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백선엽이 선뜻 박정희의 구명에 나선 것은 그가 지닌 무형의 자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군 내에서의 평판이 좋았을 뿐 아니라,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에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게다가 그를 향한 후배들의 존경심과 그가 쌓은 연륜이 그를 '큰 그릇'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아무튼 백선엽은 적극적으로 박정희의 구명운동을 펼쳤다. 참고로 박정희는 군 검찰의 사형 구형에 이어 1949년 2월 8일, 군사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체포된 지 한 달 만인 12월 10일에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육군본부로부터 정식으로 파면 통보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군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면서도 군에 남았다.
어쨌든 1948년에서 1950년의 2년이라는 시간은 박정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기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만큼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았다. 누구나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굴하지 않고 박정희처럼 오히려 이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 인간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편안한데 굳이 그런 초능력을 발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련에 처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예로 이틀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하면 강한 허기로 인해 눈이 뒤집혀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찾을 궁리를 하게 된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박정희'보다 '인간 박정희'
흔히 사람들은 박정희를 '대통령 박정희'라고 일컫기보다 '인간 박정희'라고 말한다. 이는 평소 그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소탈한 모습으로 세심하게 주변을 챙기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남모르게 고민하는 따뜻한 인간적인 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읽었다. 그 과정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혼자 몰래 눈물을 훔쳤던 때가 적지 않았다. 그만큼 박정희의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나라, 국민 걱정으로 매일을 보냈다. 물론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해한다. 모든 사람들이 박정희가 걸어온 길에 대해 같은 색의 안경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떤 청년기를 보냈으며, 왜 군사혁명을 일으켜야 했는지, 그리고 그 후 그가 어떤 행보를 걸었는지를 세세하게 알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박정희는 절대 대기업과 잘나가는 사람들만 챙기지 않았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큼 누구보다 힘없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애환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보살폈다.
CHAPTER 2 박정희처럼 "도전하라"강한 집념은 산도 옮긴다
강한 집념 없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강한 집념은 어떻게 발휘되는 걸까? 먼
저 자신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왜 성공해야 하는지 절실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상황이 절박하거나 절실한 이유를 찾게 되면 우리의 뇌는 강한 집념 모드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는 결코 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오로지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만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가장 먼저 꿈을 이루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는 진정 강한 집념의 사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가지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는 절대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로지 좀 더 빨리 목표를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 그가 지녔던 집념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 역시 강한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소 건설 역시 박정희와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의 강한 집념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소 건설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 외환 사정은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 건조 기술 역시 미미했다. 하지만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박정희와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을 성공시켰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다. W. R. 휘트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수천 가지 이유를 찾고 있는데, 정작 그들에게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 한 가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지금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이 일을 그만두면 안 되는지, 성공해야 하는지 그 절실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안전한 길은 죽은 자의 길이다
사람들은 가지 않은 길에 들어서거나, 익숙지 않은 일을 접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 그러니 주위에는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고, 안전한 길을 택하는 순간 자신은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박정희는 안전한 길은 죽은 자의 길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진취적인 사고로 개혁을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훗날 5/16 군사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실행에 옮겨진다. 물론 5/16 군사혁명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이 혁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는 것에 무게를 둬야 한다.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많은 나라들이 이를 연구하며 배우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면 결코 현실에 안주해선 안 된다.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새로운 길의 개척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들 가운데 시간 부족을 꼽을 수도 있다. 공부하고 일하고……. 해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탓에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늘 앞서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늘 여유롭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안철수 교수의 말을 경청해보자.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바이러스 백신을 연구할 때 최대의 고민은 바로 백신개발에 필요한 최첨단 기술을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잡지사에 전화해서 최신 기술에 대한 기사를 연재하겠다고 했어요. 당시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만 매번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원고 마감까지 자료를 찾고 원고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덕분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쌓아야 하거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데드라인을 정해 자기 자신을 가혹하리만치 힘든 상황으로 내몰았는데, 바로 그것이 나날이 성장하는 안철수의 성공 비결이다. 편안한 지금, 현실에 안주하지 마라. 오히려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아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힘든 상황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아라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벼랑 끝에 서본 사람들이다. 박정희가 이뤄낸 모든 성공 또한 벼랑 끝에 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와 힘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고 싶었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군인이 되어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마음에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나갔다. 또 사는 동안 그는 죽음의 벼랑 끝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삶의 줄을 놓지 않으려고 부끄러운 행동도 하게 된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나은 길인지, 아니면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나은 길인지 규정짓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벼랑 끝에서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부정부패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그는 군인의 신분으로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혁명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대통령이 된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우리나라가 잘사는 것이고, 나머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독재도 서슴지 않은 강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고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탈바꿈하는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다. 이렇게 박정희가 이룬 모든 업적과 성공은 그만이 지닌 벼랑 끝에서 나온 리더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벼랑 끝에 서게 되면 누구든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눈부신 성공을 꿈꾸고 있다면 다음의 말을 귀담아 들어라. "때로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몰아라. 벼랑 끝에 서 보면 저 멀리 당신의 성공이 보일 것이다."
CHAPTER 3 박정희처럼 "일하라"두려움 없이 소신껏 일하라
1962년 4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한 통의 서한(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공산당의 위협이 심각하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배달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문제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만큼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에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이동 외과병원을 하나 지어서 베트남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아울러 태권도 교관도 함께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박정희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말이 이동 외과병원이고, 태권도 교관을 보내달라는 것이지, 이는 사실상 파병 요청이었다. 박정희는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기로 결심했다. 과거 한국전쟁 때 미국 정부가 개입한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고, 약소국으로서 미국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1964년 7월 18일, 한국의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 동안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공산군과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했는데, 그동안 총 31만 2,853명이 참전하여 이중에 4,960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수가 1만 5,933명에 달했을 정도로 격전이었다.
참고로 이때 파병된 한국군은 미국 정부로부터 파병의 대가로 월급을 받았는데, 당시 파병 군인들이 본국에 송금한 월급은 약 3억 달러로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기업들도 한국군과 일부 미국 PX에 물품을 공급하면서 10억 달러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고, 아울러 당시 영세하던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군의 납품 조건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라도 장비나 인력 등을 현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신을 가지고 일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박정희 스타일이다.
지금 즉시, 될 때까지 하라!
박정희는 1964년 에르하르트 총리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말로만 들었던 아우토반을 직접 달려보는 경험을 하고, 우리나라도 한시바삐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박정희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대한 기록과 도로 전문가들의 연구 보고서를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검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