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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에서 세상을 기록하다

문혜원 지음 | 큰나무


월 스트리트에서 세상을 기록하다

문혜원 지음

큰나무 / 2011년 4월 / 240쪽 / 12,000원



PART ONE 뉴욕, 20대의 마지막 일탈




월 스트리트 인연

"Welcome aboard!” 새벽 4시 반에 걸려온 전화로 세계 금융의 중심 월 스트리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년 가까이 걸린 지원 과정을 끝내고 드디어 로이터 통신 뉴욕 본사 월 스트리트 담당 기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월 스트리트를 담당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지원한 지 10개월이 지나 얻은 결과였다. 월 스트리트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데는 딱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첫 5초의 이미지가 평생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첫인상 5초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월 스트리트와의 그 짧은 5초는 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08년 9월, 여행 차 뉴욕을 갔다가 로이터 통신 본사를 방문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칠 그때는 미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파산 신청, 메릴린치 매각, 보험업체 AIG 긴급 자금지원 요청 등 월 스트리트의 대혼란으로 세계 증시가 패닉에 빠진 상황이었다. 2008년 9월 15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는 전날보다 무려 4.42퍼센트 내린 10,917.51을 기록했고 이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일일 최대 낙폭이었다.

뉴욕 시에 있는 작은 섬, 맨해튼 끝자락에 붙은 그야말로 Street인 월 스트리트에 위치한 몇몇 투자은행 때문에 미 증시뿐 아니라 세계 증시가 하루아침에 폭락한 것이다. 그 소름 돋는 위력 탓에 나는 단 5초 만에 월 스트리트에 매료되었다. 당시 만났던 월 스트리트 담당 기자는 뉴욕 인근의 뉴저지 주에 살았는데, 그는 집에 다녀올 시간이 없어 3일째 당직 아닌 당직을 서고 있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흔들리는 급박한 상황을 경쟁 언론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능숙하게 기사를 써내려가는 그의 모습에서 한동안 잊고 지낸 저널리즘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월 스트리트에 입성하기까지의 난관은 지원 전부터 시작되었다. 뉴욕에 가겠다는 말에 주변에서는 격려보다 반대가 많았다. 나름 잘 다져진 경력, 잘 알려진 외신 기자로 일하고 있는데 왜 굳이 뉴욕에 가냐며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는 게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조언했다. 29세가 어린 나이는 아니니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무조건 도전한다?' 29세의 나는 10대나 20대 초반의 도전 정신 따윈 없고, 자신의 능력을 항상 의심하며 불안해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데다, 주변의 이야기에 좌지우지하는 한마디로 '펄럭 귀'였다. 뉴욕에 대한 환상이 있다거나 꼭 그곳에서 살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 상위 1퍼센트가 모인다는 뉴욕에서 그곳 사람들과 경쟁해 이길 자신도 없었다.

우려 섞인 주변의 반응에 나는 Change vs Status Quo, 변화와 현상 유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변화를 좇기에는 남겨두고 가는 게 너무 많았고 현재 삶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못다 핀 꿈을 월 스트리트에 가서 좀 더 크게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줄다리기 끝에 승자는 Change, 변화였다.

왜 굳이 고집을 부려가며 이 선택을 했을까? 솔직히 말해 기자로서의 욕심이 가장 컸다. 월 스트리트에서 기사를 쓴다는 것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 신용 경색을 불러온 장본인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가깝고 자세하게 취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에 이은 미 투자은행의 연쇄 도산, 연방 은행을 대표하는 중앙은행들이 자금 유동성을 위해 수백억 달러를 시장에 투입하는 모습, 그동안 오만하고 탐욕스러웠던 월 스트리트의 어두운 면을 몸소 부딪쳐 취재하고 싶었다. 기자로서 잠시 보았던 총성 없는 전쟁터, 월 스트리트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내 오른손으로 그곳을 담아내고 싶었다.

무모한 도전 vs 현명한 포기

당시 나는 로이터 코리아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같은 회사라도 한 지사에서 다른 지사로 옮기는 건 무척 지난한 과정이었다. 전 세계에 있는 로이터 지사는 대부분 현지 채용을 하기에 아무런 연고 없이 아시아에서 뉴욕이나 런던으로 가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실제로 로이터 뉴욕 본사에 지원한 한국 국적의 기자는 그 동안 내가 처음이었다. 나는 로이터 코리아에서 경제 분야의 에너지 산업 관련 뉴스를 담당했고 싱가포르에 있는 로이터 아시아 본사의 에너지 뉴스 팀장과 같은 팀이 되어 일해 왔다. 에너지 뉴스 팀장은 월 스트리트 담당에 지원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팀장의 말대로 지원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증권 용어를 풀이하는 상식 시험을 치르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작성하고, 편집 실기 등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기자 지망생들이 시험을 보러 오면 감독관으로 참관할 경력에 입사 시험을 다시 봐야 하다니, 월 스트리트의 높은 벽에 맞닿은 느낌이었다. 내 경우처럼 2차, 3차로 계속 시험과 면접을 보는 경우는 드물지만 로이터 내에서 다른 부서나 직위로 가려면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1년 차나 10년 차나, 선임 기자나, 심지어 데스크까지도 말이다. 그다지 유쾌한 과정은 아니지만 확실히 공평하긴 하다. 한국 언론사에서는 데스크를 하다가 다시 평기자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외국 언론사에서는 비일비재하다.

나는 평소 열에 아홉은 포기할 정도로 '현명한 포기'의 열혈 팬이지만 결국 선택한 하나에는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나머지 아홉에 골고루 쏟아 부었을 노력과 열정을 그 하나에 쏟는다. 그 하나가 월 스트리트였다. 시험 날짜를 기다리며 마치 수험생 같은 공부 스케줄을 소화했다. 퇴근 후 꼬박 5시간을 공부했고 밤 10시까지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에도 공부를 거르지 않았다. 몇 주간의 이런 '고생' 덕분에 필기시험은 별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1차 인터뷰는 월 스트리트 팀장, 경제 뉴스 팀장, 뉴스 총괄팀장이 패널로 참여하고 전화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 질문은 지원 동기일 거라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상외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떤 식으로 월 스트리트 팀에 기여할 수 있느냐'가 첫 질문이었다. 총 지원자가 6명인데 다른 이들에 비해 내가 가진 경쟁력과 그 능력을 펼칠 방법을 설명하라고 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을 시작했다.

"로이터는 통신사라는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흡이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를 많이 쓰게 되어 있지만 현재 회복 국면으로 접어든 글로벌 경기에 대해서는 호흡이 긴 분석형 기사가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경기회복은 폭락에 비해 더디고 불투명하게 진행되는데 스트레이트 기사로는 단편적인 면밖에 보여줄 수 없습니다. 분석형 기사는 블룸버그나 다우존스에 비해 로이터가 보강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는 월 스트리트와 미국 증시를 깊이 있게 감시하고 분석하고 취재해 디테일한 기사를 쓰는 데 치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쓰려면 경제 분야만 다뤄본 기자의 시각보다는 사회, 정치, 문화 등 여러 분야를 두루 경험한 저 같은 기자의 시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조리 있게 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진부한 대답이 아닌 나만이 가진 확실한 장점을, 무기를 내세우길 바란 것이다. 월 스트리트와 감히 맞짱뜰 수 있는 '나만의 무기' 말이다. 그들은 단지 그뿐이냐고 물었고, 나는 순간 당황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I am fearless. 전 겁이 없습니다" 결국 고심 끝에 해답은 했지만 그와 동시에 후회했다. 겁이 없다니, 그토록 프로답지 않은 추상적인 대답을 하다니. 다시 주어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분명 MBA 학위나 CFA 같은 금융 자격증 또는 외국어 구사 능력에 대해 말할 텐데 , 나는 고작 겁이 없다는 걸 최대 장점으로 내세우다니. 그들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설명을 덧붙이라고 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제기구라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기자가 되고 싶은 꿈과 조국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내 나라이긴 하지만 낯선 땅인 한국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한국어는 기사를 쓰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낯선 환경에서도 언론사에 입사해 수습기자가 되었습니다. 사회부 경찰 팀에 배치되어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며 기자의 자질과 끈기를 키우는 훈련 과정을 견뎌냈습니다. 살인 사건 용의자와 일대일 대면도 하고, 국립과학연구소에서 부검을 참관할 정도의 담력도 키웠습니다. 월 스트리트가 아무리 상어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한들 저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 어떤 경쟁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아니 확신이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왜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대답하지 못했을까'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런데 다음 날 그들에게 메일이 왔다. 놀랍게도 2차 인터뷰 스케줄을 잡자는 것이었다. 나의 'fearless’한 대답이 통한 걸까. 뛸 듯이 기뻤지만 부담감은 배로 커졌다. 몇 주 후, 2차 인터뷰까지 1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 뉴욕에서 짧은 메일이 한 통이 도착했다. 딱 한 줄 "금융 위기로 인해 로이터 뉴욕 본사 및 미국에 있는 지사의 모든 채용 계획이 무한정 보류되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 흔한 인사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그 순간을 위해 몇 달을 고생하며 준비한 나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투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반나절 휴가를 내고 무작정 회사를 나왔지만 막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공원에 앉아 파란 하늘만 바라봤다. 그때의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던 기관차가 강제로 정지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정말 오랫만에 무언가에 100퍼센트 열정과 노력을 쏟고, 한길로 내달렸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옛 생각이 났다. 국제기구에서 일할 당시 만난 한 자기계발 컨설턴트가, 기자가 되고 싶어 진로를 고민하던 내게 해준 말이다. "도전은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도전은 밑천 없이 시작하는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원하는 바가 아직 나의 것이 아니니 잃을 게 없는 거고,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도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라는 이야기였다. 없이 시작했으니 실패해도 잃을 게 없다는 말, 맞는 이야기지만 그날 그 순간만은 마치 내가 가지고 있던 뭔가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큰 무언가를 잃은 느낌에 더는 어떤 일도 쉽게 도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실패 그리고 또 다른 제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현실로 복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싱가포르에 있는 에너지 뉴스 팀장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로이터 아시아 본사에 에너지 뉴스 담당 기자 자리가 났는데 지원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월 스트리트에 비교하면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일단 싱가포르에 가면 최소 3년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고 결국 앞으로 3년 동안은 월 스트리트에 도전할 수 없게 된다.

일주일 동안 고심 끝에 나는 팀장에게 아시아 본사 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그는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월스트리트 자리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자리가 언제 다시 날지, 그리고 다시 난다고 하더라도 그쪽에서 나를 원할지 알 수 없었지만 늘 준비가 되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노력을 비웃듯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만 되어갔다. 월스트리트는 투자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점점 더 큰 타격을 받았고 미국내 실업률은 20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만큼 내가 월 스트리트를 담당할 기회는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월 스트리트 담당 기자 채용 공고가 떴다. 그야말로 경이로움 자체였다. 공고를 보자마자 나는 들뜬 마음으로 나를 인터뷰했던 월 스트리트 팀장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새로 공고가 난 자리는 일전에 내가 지원했던 것보다 더 높은 경력을 요구했다. 점점 악화되어가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경력 10년차 정도의 기자를 찾고 있었다. 내 경력은 그 반밖에 되지 않으니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무슨 배짱이었는지 나는 그 자리에 지원했다. 차라리 떨어지면 깨끗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도전의 끝을 보지 않고 그만두기에는 그간의 노력과 시간이 아까웠다.

최종 인터뷰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예전에 나를 인터뷰했던 데스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왜 싱가포르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나는 대답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전 아직 20대거든요." 나의 단순한 대답에 그들은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들은 나이가 많아 나처럼 무모한 도전은 생각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인터뷰는 그 질문 하나로 끝났다. 순간 내가 확실히 마음에 들거나 아예 마음에 들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잠을 자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단잠은 새벽 4시 반에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로 끝이 났다. "그곳은 새벽일 텐데, 일찍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우린 네가 월 스트리트 팀에 들어와서 매일 이 전쟁터 같은 주식시장을 함께 커버하길 바라는데, 어때?" 갑자기 잠이 확 깼다. "아, 네! 좋습니다." "OK, 우리 팀에 합류한 것을 환영한다. Welcome aboard!” 이제 시작되었다. 내 20대의 마지막 일탈이, 뉴욕에서!

PART TWO 상어가 득실거리는 곳, 월 스트리트



상어가 득실거리는 곳, 월 스트리트

누군가 월 스트리트를 '상어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표현했다는데 이는 언론사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타사 기자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지만 취재 경쟁에서 상냥함 따위는 없다. 취재하러 가는 티는 내지 않으려고 취재 수첩을 두고 마이크가 달린 펜 하나만 챙겨 객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취재의 치열함은 한국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겪어봤기에 그리 긴장하지 않았지만, 증시 시황 기사는 장이 움직이는 방향과 그 이유만 설명하면 되는데 왜 그리 경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월 스트리트 뉴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만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타사가 전달하지 않은 그 어떤 플러스알파를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을.로이터 통신과 같은 통신사의 역할은 일반 신문, 방송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신문과 방송은 독자와 시청자 즉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뉴스를 제공하지만 통신사는 신문사와 방송사, 정부 기관, 대기업, 금융기관 등 각종 기관을 대상으로 한다. 통신사가 뉴스 도매상이라면, 신문과 방송은 뉴스 소매상이고 할 수 있다. 신문과 방송사 기자들은 일차적으로 통신 기사를 참조한 뒤 추가 취재를 통해 기사를 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뉴스가 처음 탄생하는 곳이 통신사다. 내 손끝에서 뉴스가 시작되는 그 매력에 빠져 2005년 기자가 된 후로 계속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통신사 기자는 '기자 중에 기자'라는 말을 듣지만 동시에 '이름 없는 기자'이기도 하다. 통신사 뉴스는 일반인에게 직접 전달되는 채널이 아니기 때문에 기자의 이름이 덜 알려지는 편이다.

통신사 기자에게는 사실상 마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기하고 있다가 사건이 터지면 곧장 기사를 써서 넘겨야 한다. 실시간으로 기사를 보내야 하기에 일반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보다 불규칙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우스갯소리로, 기자의 수명이 보통 사람보다 짧은데 그중에서도 통신사 기자가 가장 단명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1851년,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사무실을 열고 주식시세와 증권 뉴스를 속보로 전하기 시작한 로이터 통신은 한때 '영국의 육군이나 해군보다 강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전 세계 뉴스의 흐름을 주도했다. 하지만 경제 뉴스의 중심이 미국에 맞춰지면서 현 뉴욕 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창립한 경쟁사 블룸버그 통신에 밀리기 시작하자 2007년 글로벌 미디어 그룹인 톰슨 코퍼레이션과 합병했다. 이후 뉴욕으로 본사를 이전해 현재는 150개국, 약 230개의 도시에 지국을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경제 통신사가 되었다. 로이터 통신은 돈과 물자의 흐름을 보도하는 경제 뉴스가 전체 뉴스 중 90퍼센트를 차지한다. 경제 뉴스의 생명은 속도다. 1850년, 로이터가 선택한 기술 병기는 비둘기였다. 증권 시세가 적힌 종이를 비둘기 발목에 묶어 보내면 기차보다 6시간 빨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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