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인생
구본형 지음 | 휴머니스트
깊은 인생
구본형 지음
휴머니스트 / 2011년 4월 / 224쪽 / 13,000원
깨우침,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깨우침 하나_ 우연은 운명을 이끌고(간디)
밤 9시 기차가 마리츠버그 역에 도착했다. 차장이 들어와서 내게 말했다. "너, 이쪽으로 와, 너는 화차로 가." 나는 일등실 차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나는 일등실 차표를 가지고 있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다시 말한다. 화차로 가!" 나는 거부했고 결국 경찰이 왔다. 나는 끌려 내려왔고 기차는 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남아프리카의 고원 지역은 겨울이라 혹독하게 추웠다. 나는 그 밤의 추위를 견뎌냈다. "난 변호사야. 내 권리도 보호할 수 없다면 누구의 권리도 보호할 수 없어. 그러면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되돌아가야 할까? 그래 굴욕을 당해도 견디자, 중도에 돌아가는 것은 사내가 할 행동이 아니야, 고난에 항거해야 해."
나는 프리토리아로 가는 열차를 이용하기 위해 일등석 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표를 팔지 않았다. "프리토리아는 일등석을 타서 갈 수 없어요." 나는 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정장을 입고 역장을 만나러 갔다. 역장 앞에 금화를 꺼내 놓고 일등실 표를 요구했다. 좋은 옷과 금화는 힘이 셌다. 역장이 말했다. "당신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내가 일등석 차표를 끊어주겠소. 그러나 차장이 당신을 끌어내리더라도 나를 끌어들이지는 마시오. 철도회사를 고소하지 말아달라는 겁니다." 나는 그의 호의에 감사했다. 열차가 오자 나는 일등실에 앉았다. 차장이 검표를 하러 왔다가 나를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삼등실로 가" 나는 승차권을 보여주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삼등실로 가." 일등실에는 영국인 승객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때 그가 차장을 꾸짖었다. "왜 그 신사를 괴롭히는 거요. 일등실 표를 가지고 있지 않소? 그 신사와 같이 있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소." 차장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손님이 함께 앉아 가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나는 동족들을 모았다. 그리고 부당한 대우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을 규합했다. 규합은 성공적이었다.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 인도 사람도 '옷차림이 적절하다면' 일등실이나 이등실에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회합이 일개 변호사였던 내가 정치적 지도자로 전환한 첫 순간이었다. 만일 내가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이 우연은 내 운명의 서곡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에 있는 내가 남아공에 갈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모욕과 구타를 당하면서 일등실 여행에 집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우연은 비로소 필연적 운명이 될 수 있었다. 장전된 대포에 불이 붙듯, 준비된 바탕 위에 우연이라는 불길이 나를 터지게 했다. 변호사 간디에서 정치가 간디로,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운명이 된 것이다.
간디가 마리츠버그의 모욕을 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사건이 그의 존재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옳고 그름의 문제에 민감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풀어주는 중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존재의 심연 속에 '중재력을 가진 도덕적 정치가' 간디가 도사리고 있었고, 영혼 속에 '그것은 그의 운명'이라는 각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마리츠버그의 사건은 다만 미래를 전달하는 전령관이고 도화선이었다. 사건이 사람을 이끌고 우연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우연도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제자가 준비되면 위대한 스승이 나타나듯, 사람이 준비되면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내(구본형)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지금의 내가 되게 한 내 인생의 마리츠버그 역, 그곳은 어디였을까? 1991년 나는 한국 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을 맡고 있었다. 직장 생활 11년 차의 매너리즘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여느 직장인처럼 나는 밥을 벌기 위해 주어진 일을 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소명의식도 천직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IBM은 변신과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격동의 장이었고, 회사에서는 혁신 전문가들을 양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본사에서 아시아 태평양 조직의 경영 진단과 평가를 수행하는 심사관으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자극을 찾고 있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IBM 싱가포르의 경영진단 심사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그 팀에서 평가 모델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채 참석한 유일한 옵서버였으며, 가장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그늘 속에 앉아 며칠을 보냈다. 마리츠버그에서 추위에 떨던 간디처럼 그 어두운 며칠이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월급쟁이의 생각과 태도를 버렸다. 한국 IBM 팀장은 이제 내 직업의 정체성이 아니었다. 대신 나는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내 존재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인생의 목표가 생기자 IBM 팀장이라는 좁은 정의에 갇혔던 과거는 사라졌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정으로 일에 달려들었다. 목표가 분명해지자 현업에 대한 자율성의 강도도 더 강해졌고, 애정도 깊어졌다. 모든 것이 그 초라한 '그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깨우침 둘_ 야생의 재능이 나를 부를 때(마사 그레이엄)
1911년 4월 어느 날, 나는 그때 17세였다.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문제의 포스터를 본 것이다. 그 공연 포스터에서 그녀는 금빛 팔찌를 끼고 여신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동양의 신비로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공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포스터 속의 주인공인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인도의 여신으로 등장하여 홀로 춤추며 무대를 장악했다. 나는 그 매혹적인 모습에 넋을 잃었다. 나의 모든 세포가 일어서고, 모든 기질이 도발하고, 나의 모든 재능이 솟구쳐 당장 벌떡 일어서서 여신처럼 춤추기를 원했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17세의 나이에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할 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번개처럼 분명한 섬광이고,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계시였다. 춤은 그렇게 그날 내게 찾아왔다. 22세 때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일한 무용학교인 데니숀에 입학했다. 22살 무용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고, 나는 작고 유연성이 떨어지는 보잘것 없는 몸을 갖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나를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아주 어려운 자세와 기술을 놀라울 만큼 빨리 익혔다. 점점 더 나는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 분야를 이렇게 빨리 터득할 수 있고, 이것을 하면 지칠 줄 모르고, 누구보다 열심히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춤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현대 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마사 그레이엄은 1911년 4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그곳에서 루스 세인트 데니스라는 무용가의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다. 포스터와의 만남, 얼마나 하찮은 간접 만남인가! 그러나 이 만남으로 그녀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평범한 길에서 모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무용을 시작한 그녀는 신속하게 자기 분야를 숙달해 나갔다. 그리고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자기만의 욕망과 가치를 담은 무용을 시도했고, 약속대로 자신만의 무용을 만들어냈다.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중반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었네." 단테의 표현 그대로 나는 '인생의 중반에서 길을 잃었다.' 1997년 여름, 나는 한 달 동안 단식을 했다. 회사에는 휴가를 내었다. 다행히 상사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늘 차선책을 선택했다. 밥이라는 절체절명 앞에서 늘 현실을 선택했다. 한 달의 단식, 그것은 밥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한번 마음먹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나의 성전이었다. 단식이 일주일 째 접어든 어느 날 나는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여름 태양이 떠오르고 방 안으로 햇살이 기어들어왔다. 그때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인생의 절반 지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이렇게 환한 낮이 밝아오는데 시체처럼 방 안에 누워만 있구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때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글을 써라. 너는 글을 써보고 싶지 않았느냐?'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일어나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43세였다. 그전까지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그 책 덕에 나는 1990년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날 그 아침이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이 바로 내게는 마사 그레이엄이 루스 세인트 포스터를 본 날이고, 그녀의 춤을 격정 속에서 관람한 날이기도 하다.
견딤,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두 번째 문견딤 하나_ 끈질기게 삶에 달라붙다(윈스턴 처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나는 영국의 해군장관이었다. 나는 영국 해군을 재정비하여 세계 최강으로 만들었다. 독일의 대양함대를 누를 수 있는 새로운 함대를 건설하고, 종전의 12인치 대포 대신 15인치 대포로 무장하도록 만들었다. 멋진 함대를 건설하는 일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1914년 내가 정부에 제출한 예산안은 세계 해군 역사상 가장 큰 예산안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15인치 함포는 성공적이었고, 함선의 동력 원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예산도 따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나는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의 지분 51%를 확보하여 안정적으로 군함에 석유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담한 결정이었고, 결정적인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이때 30대의 젊은 나이였고, 1차 대전의 전쟁영웅이 되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것에 대해 내가 신념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현실을 감시하고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 해군이 운하를 넓히고 함선을 늘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군장관이 된 첫날부터 나는 모든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돌며 해군 전술과 능력에 대한 세부 사항을 끊임없이 배웠다. 대포를 다루는 기술부터 해군의 사기에 이르는 모든 정보를 알아냈다.
내가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근거와 정보가 부족한 경우는 없었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정력적이었다. 나의 예지력은 현장을 철저히 관찰하는 부지런함과 연역적 추론에서 나왔다. 미래를 보는 예지력의 소유자들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지력 하나만 갖고는 힘을 쓸 수 없다. 예지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마음이 미리 본 것을 지켜갈 수 있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있었기에 해군 개혁에 대한 엄청난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쟁영웅이었던 처칠은 1965년 91세의 나이로 죽었다. 드골은 그의 죽음을 듣고 "이제 영국은 더는 대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인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칠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잘 견디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불멸의 인간' 이것보다 그를 더 잘 묘사한 말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업적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기 전에 한 사람의 정신 속에 하나의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신은 언제나 먼저 본다. 그러므로 정신이 본 것을 비웃는 냉소는 결코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헨리 키신저는 처칠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냉소적인 사람은 결코 대성당을 짓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를 이곳까지 끌고 온 위대한 생각과 자세를 불굴의 투지로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20년간 직장인이었다. 46세에 회사를 나와 1인 기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1인 기업가의 그림은 직장 11년차가 되던 1999년, IBM 본사의 경영심사관이 되면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 회사의 혁신 팀장을 넘어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 전문가라는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꿈이 생기자 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소명 의식을 가지게 되자 일이 훨씬 더 재미있어졌고, 나는 좀 더 열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현업은 내 비전을 이루는 수련 과제가 되었다. 소명을 발견했고, 죽을 때까지 기쁘게 이 일에 헌신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견딤 둘_ 침묵의 10년을 걷다(조지프 캠벨)
나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음유시인들의 시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유럽에서 현대 예술의 맛에 취하기 시작했다. 1927~1928년 내가 머문 파리는 세계를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세계인들을 만나며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독일로 가서는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하며 힌두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부터 새로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필요한 과목은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논문만 쓰면 끝이었다. 그러나 그 논문이라는 것이 정말 쓰기 싫었다. 나의 관심은 이미 그곳을 떠나 하늘 멀리 날아가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숲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보고 싶은 책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덕에 나는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책임질 아무 일이 없이 하늘의 새처럼 자유로웠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삶이었다. 그 기간은 1929~1934년까지의 5년이었다. 나는 뉴욕 주에 있는 우드스턱의 작은 오두막집을 빌렸다. 거기서 나는 그저 책만 들이팠다. 그저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당시 사회는 대공황 상태였다. 나는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발트 슈펭글러, 토머스만의 글을 읽었다. 슈펭글러가 니체를 언급하면 니체를 읽고, 니체의 글을 읽다보면 쇼펜하우어의 글을 먼저 읽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책을 읽어나간 방식이었다. 우드스턱 시절은 그야말로 희열을 찾아 나서는 시기였다. 모든 것이 가능성이고,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내게 쏟아져 들어와 비밀을 털어놓고 있었다.
방황을 할 때에는 당장 그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되, 내일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묻지 말아야 한다. 방랑과 침묵의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자. 그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라고만 말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관심사여야 한다. 그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은 방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대책 없는 기이한 삶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랑을 하는 동안 나는 신비할 만큼 유기적인 우연을 즐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았다.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도 나무는 훌륭하고 아름답게 자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다보면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된다. 자신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빠져들어 지낼 일이다.
세계적인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유럽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그때가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된 해였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 그는 평생을 좌우할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반에서의 생활을 따라 해보는 것이다. 캠벨은 우드스턱이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5년간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섭렵했다. 그가 책을 읽어내는 방법은 매력적이다. 마음에 드는 저자 하나를 골라 책을 씹어먹듯 읽었다. 그렇게 한 저자를 들이파고 나면 그 저자가 중요하게 인용한 책으로 넘어가 같은 방법으로 지적 모험의 영역을 넓혀갔다. 독서를 통해 자신을 흠뻑 적시는 작업을 5년 동안 계속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현실을 꿈으로 채워갈 수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하늘을 나는 날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