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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엘링 카게 지음 | 라이온북스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엘링 카게 지음

라이온북스 / 2011년 4월 / 252쪽 / 13,000원



나만의 북극을 찾아라!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구 선수가 되어 월드컵에 나가고,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스키를 신고 광활한 황야를 건너고, 모하메드 알리Mohammad Ali처럼 살고,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에게 키스하고, 파괴돼가는 지구를 살리고,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같은 사람이 되고, 소방관이 되고, 알카트라즈(Alcatraz, 샌프란시스코 만에 있는 악명 높은 감옥, 알 카포네가 갇혀 있던 감옥으로 유명함) 감옥에서 탈출하고, 달과 화성을 여행하는 것. 꿈을 꾸거나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다. 머릿속에서 꿈꾸는 그것에 집중할 때 모두 실현 가능하다. 그리고 꿈이 단순한 정신 상태를 넘어 진정한 야망에 이를 때 우리에게는 힘이 생긴다.

이 책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다. 내가 경험하고, 읽고, 말하고, 생각한 것들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것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달라 보일지 몰라도 나의 경험과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그리고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내 글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에 나의 꿈과 한시도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생각, 바다와 빙하와 산에 도전하며 알게 된 동료들과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동료들 이야기를 담았다. 아버지이자 사색가이자 출판인으로서의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끝없이 진화하며 때가 되면 개인적인 야망과 함께 발맞춰 나가는 꿈에 대해. 1990년에 설상스쿠터도, 개 썰매도, 물자와 식량 저장고도 없이 뵈르게 아우스랜드Berge Ousland와 함께 최초로 북극에 도착한 이야기, 1993년 역사상 최초로 혼자 걸어서 남극에 도착한 다음 1994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이야기에 대해, 이로써 나는 지구에 존재하는 극지 세 곳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나의 야망을 이루었다. 나는 이 최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행을 하면서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정하기 시작했다.

나쁜 소식 하나는 도전하고 꿈을 이루는 건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물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꿈과 야망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이루어줄 수는 없다. 그 짐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는 쉽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누구든 스스로 그 꿈에 매달려야 한다.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해서 자신이 세운 목표를 쫓아가야 한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목표가 나 자신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 한 가지는 우리는 한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결심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그 기쁨으로 인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삶까지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해낸 일들을 이루라고 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 책이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북극, 자신만의 에베레스트, 자신만의 꿈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글은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세상은 당신의 발 앞에 놓여 있다. 당신은 스스로를 놀라게 만들며 언제, 어디서나 신나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럼, 부디 멋진 여행이 되기를!

용기는 보온병에 담아 보관할 수 없는 것



에베레스트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때를 기억한다. 최정상에서 남쪽으로 400m, 아래로 100m 지점에 작은 봉우리가 있다. 남쪽 정상이라는 뜻의 사우스 서밋South Summit이다: 여기서 최정상까지는 눈과 얼음이 엉겨붙어 튀어나온 아주 좁은 등성이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등반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독하게 좁은 길이지만 우리는 그 등성이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등성이의 동쪽은 네팔 방향으로 2,000m쯤 되는 낭떠러지였고, 서쪽은 티베트 방향으로 3,000m쯤 되는 낭떠러지였다. 만약 거기서 떨어진다면 간혹 여기저기 돌출된 노두(露頭, 광맥, 암석의 돌출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에도 걸리는 일 없이 계곡 바닥까지 직통이었다. 나는 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무섭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면서도 산소 부족으로 약간 멍해지기만 할 뿐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용기는 충분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용기는 없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 마지막 300m를 가는 동안 너무 지친 나머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잠을 잤다. 이성은 내가 돌아가야만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의 소리에 귀를 닫아 버렸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기만 했다. 짐승이 된 듯 오직 본능에만 의존해 움직였다. 나는 그날의 용기와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용감하다거나 비겁하다고 이름 붙일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이성의 소리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전제로 한다. 자신의 안전에 관한 염려도 전제된다. 하지만 그날 내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기력과 지혜도 없었다.

용기는 위험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도전을 할 때 성립된다. 자선 단체에서 좋은 목적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훌륭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굳이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크건 작건 정말로 뭔가를 무릅쓴 도전이어야만 용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용기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훌륭한 일일 수는 있으나 용기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용기를 내는 것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내가 자유의지로 좁은 길을 선택해 그에 따른 행동이나 말을 함으로써 무언가를 잃었을 때 인생은 내게 더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내가 용기를 권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용기라는 것이 간단히 보온병에 넣어 따끈따끈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마법의 약처럼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아스테릭스(Asterix, 프랑스의 대표적인 만화 주인공. 로마군단에 저항하는 골족의 이야기로 신관이 조제하는 마법의 약을 먹고 힘을 얻음)에게 힘을 주는 약과 비슷한 것일 테다. 이 경우에는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 왔을 때 등을 쭉 펴게 해주는 약이 되겠지만, 용기는 우리가 현재 상태가 아닌 앞으로 변화할 상태이다. 두려움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 용기를 내는 것, 그것은 필요할 때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도전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침에 일어나기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의 극지 탐험가들이 부딪히는 최대의 도전은 '아침에 제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빙판 위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아침에 제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북극 원정길에서 가끔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슬리핑백에서 머물고 싶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유혹이 찾아온다. 슬리핑백 밖으로 기어 나오면, 턱까지 얼어붙은 채 서 있어야 한다는 단테의 『신곡』 중 제9옥에 와 있는 것처럼 춥다. 짐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 안을 데울 연료나 내복을 충분히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63일 원정 기간 동안에 한 번도 옷을 벗지 않았다. 추위, 사나운 날씨, 질병, 피로, 부상 등 슬리핑백에 머물고 싶은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 나는 원정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분명 많겠지만 나와 교대하고 싶은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했던 로알드 아문센은 "슬리핑백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그럴듯한 날이, 하루를 시작하고 나면 가장 일이 잘 풀리는 날"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탐험가는 과거 로알드 아문센과 어니스트 새클턴 같은 전설적인 탐험가나 조지 말로이 같은 등반가들과 다르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점들도 몇 가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은 일어나기에 여전히 춥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처해온 나의 방식은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제때 일어나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도전은 과감하게, 귀찮아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내 첫째 딸 노르는 유당 분해요소 결핍증(장에 젖당 분해효소가 충분히 없을 때 발병하며, 복부 팽만감, 설사의 원인이 됨)을 앓았다.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병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원정이나 항해 중일 때 나는 주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다. 그런데 노르가 태어나자 나는 한밤중에 시도때도없이 일어나 아이를 안고 거실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아내와 내게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딸과 내가 가장 가까웠던 시기였으며, 그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값진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잠 못 이룬 밤들이 없었다면 내가 겪었던 온갖 힘든 일들 속에서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가끔 나는 내가 잠에서 깨어 알람 소리를 듣는 것인지, 꿈속에서 알람이 울리고 힘겨운 하루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혼란에 빠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기원전 4세기 사람으로 추정되는 도가 사상가 장자莊子는 자다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에서 깬 그는 자신이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약음기를 연주하는 떠돌이 약사A Wanderer Plays on Muted Strings』에서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은 처형 장소로 꿀려가는 죄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수는 수레에 앉아있는데 못이 자꾸 엉덩이를 찌른다. 아파서 자세를 바꾸자 죄수는 즉시 편안함을 느낀다. 행복한 순간이나 기분 좋은 경험, 함순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나는 행복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답이 나왔음에도 나는 곧 그 대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죽기 전에 체포되어 사슬에 묶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묶여 있던 다리의 사슬이 풀려나가자, 그 사슬이 얼마나 아팠던가를 느꼈다. 사슬이 없어지고 나자 그 아픔이 반추된 것이다. 상호 보완하면서도, 서로를 불러일으키고 쫓아내는, 기쁨과 고통의 단계를 몸소 경험하는 것이다.

행복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대개 중요한 것들이 그러하듯 복잡하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왜 행복한가?" "그 행복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정말로 행복한 것이냐고 묻는다. 예를 들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로 좋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보다 깊게 생각하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마 누구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어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온 사람은, 앉아서 피자를 먹으며 자신이 대박을 터트리게 될지 어떨지 기대감에 들뜨던 순간이 더 행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요점은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얼음 위에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을 전체론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끝이 올 때까지 결론은 유보되어야 한다. 나는 더 큰 그림이 나와야 인생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 생각에 동감한다. 동시에 나는 순간의 상태를 음미하기 위해 이따금 내가 가던 길에서 멈추어서는 것도 좋아한다.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지나고 다시 따뜻함이 찾아올 때나, 막내딸이 기쁨에 겨워 두 팔로 나를 껴안아 올 때, 멋진 축구 경기를 볼 때… 인생은 멋지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이제 행복한 기분이 들면 그 행복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렇게 인생의 최종 평가를 미뤄둔다. 나는 확실히 무언가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좋은 책을 읽거나, 가족과 함께 있거나,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뭔가 인정 넘치는 일을 할 때, 혹은 숲이나 언덕, 새로운 도시에 나가 있을 때. 즉, 나와 관계없다고 느껴지는 일이나 내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없는 일이 아니라거나 스스로 선택한 도전을 할 때 말이다(슬프지만 학교 교과과정은 대체로 그렇지 못했다). 잊어버리기 쉽지만 우주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한 자신만의 조건을 정립해야 한다. 삶에는 늘 고통이 따른다. 그러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짐을 질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나는 가끔 E. L. 닥터로우의 동명 소설 속 주인공인 빌리 배스게이트에 대해 생각한다. 책에서 갱단 우두머리인 더치 슐츠는 어느 한순간 그답지 않게 철학적인 면모를 보이며, "지구가 커다란 매춘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빌리 배스게이트는 열다섯 살에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닥터로우의 최고작은 아니지만(그의 최고작은 『랙타임Ragtime』이다) 내게 잊지 못할 장면을 선사한 책임은 틀림없다. 나는 배스게이트나 깡패 두목 슐츠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았지만 10대 초반에 '세상이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10대에 인생을 깨닫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안다. 정직이 영원한 것은 아니고, 엄마 아빠가 늘 서로에게 다정한 것도 아니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님을 말이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중 하나다.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척 팔라닉의 책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 제기하는 문제도 이것이다.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는가?" 이것이 이 책의 요점이다. "너는 네 은행 잔고가 아니다. 너는 네 직업이 아니다. 너는 네 가족이 아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 나이가 아니다… 네 희망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과제를 받았고, 두 사람 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할리우드와 아테네가 적어도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한 가지 면에서 일치성을 보인 것이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현상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신에게 편한 것을 찾는' 태도로 인간 행동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고 설명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한 가능성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태도다. 그는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태도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과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주도적으로 사는 방식을 구분해서 설명했다. 인간 존재의 문제는 돌이나 식물의 존재처럼 단순한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로워지려면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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