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
에드 샤피로, 뎁 샤피로 지음 | 생각의나무
체인지
에드 샤피로, 뎁 샤피로 지음
생각의나무 / 2011년 1월 / 378쪽 / 15,000원
Part 1.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내가 바뀌면 우리가 바뀐다
우주비행사 에드거 미첼이 말했듯, 달에서 보이는 지구는 한낱 작은 공에 불과하다. 아폴로 14호를 타고 귀환하면서 작은 공에 불과한 지구의 모습이 점점 크게 다가오는 것을 본 후,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머나먼 외계 탐사의 경험을 통해 미첼은 자신의 경험에서 더욱 심오한 의미를 구하기 시작했고, 내면세계의 탐구로 시선을 돌리면서 명상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가 최근에 이 책을 쓸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 역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요즘처럼 부패가 들끓고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경제 침체기에, 과연 무엇이 이 대혼돈에 빠진 세계에 더욱 폭넓은 자각과 인정 및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명상처럼 미미하고 정적인 행위가 과연 사회의 관행과 환경, 분쟁, 더 나아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할 만큼 명상이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까?
변화의 수용 : 마하트마 간디는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이 그 변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변화는 우리 안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변화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 삶에 사랑이 넘쳐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사랑을 나눠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테러가 종식되고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면, 우리 내면의 전쟁을 먼저 끝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아를 뿌리 뽑거나 말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명상 수련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측면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긍정적인 측면들이 부각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아가 아무리 변할 수 없는 존재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해도,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임을 잊지 말자.
명상은 무엇인가
명상은 자기암시 - 나는 날씬하다. 부유하다. 사랑받는 존재다. - 나 시각화 - 나는 흰 빛 속을 헤엄치고 있다. - 나 단전호흡 등 온갖 것과 결부되어 왔다. 그러나 명상은 이런 것이 아니다. 명상이 포괄하는 경험과 활동의 영역은 만물의 수용, 진리의 깨달음과 해탈, 호흡수 세기, 촛불 응시, 박자에 맞춰 움직이기, 경구 읊조리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명상으로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으며, 내면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명상은 진정한 나와 하나되는 체험인 동시에,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수련이다.
명상 체험 : 명상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 느낌은 어떻고, 맛은 또 어떨까? 어떤 효과가 있을까? 명상 체험을 하고 나면 전과 어떻게 달라질까? 어째서 명상 체험을 그토록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명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현듯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관념이 희미해지고 세상 만물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때, 이를테면 나를 둘러싼 경계가 사라지고 내가 하늘의 구름이나 나무에 내려앉은 새, 새가 앉아 있는 나무, 나무에 핀 꽃, 돌이나 흙과 하나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그런 경우다. 이때는 마치 '나'라는 관념을 확고히 형성해온 모든 재료들이 융해되어 만물과 하나를 이룬 듯, 굳건했던 자아관이 사라진다. 더 이상 인지하는 '나'는 없고, 단지 '인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로 자연 속을 산책하거나 말없이 앉아 있다가 명상 체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색色과 공空 : 우리는 아주 현실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세상에선 나무가 보이고, 유리잔을 쥘 수 있으며, 차를 마실 수 있고, 중력 때문에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일이 없으며, 대양이 하늘에 떠 있지도 않다. 이런 관점에서, '색(色, Form)'은 의미 있고, 파악과 식별이 가능하며, 실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반면에 '공(空, Emptiness)'은 의미의 부재,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픈 무無의 상태를 암시한다. 또한 공空은 뱃속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허전함 같은 것으로, 사람들은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 부어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의미를 찾고, 유대감을 느끼려 분투한다.
이것이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현실의 관계이며, 양자는 서로의 안에 내포되어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요, 만물이 동시에 공이며 색인 것이다. 보통, 색에 따르는 관념은 만물에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별개의 너와 별개의 나, 그리고 모든 감정들 -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 모두 - 의 구분이 이런 이원적 발상에서 나온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과 감정으로 규정지으며, 그러한 것들이 '나'를 구성한다고 믿는다. 우리 몸이나 목소리를 '나'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믿음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 확고한 실체를 다른 사람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그러한 감각을 외부와 연관된 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곧 확고한 '나'도 없고 확고한 '너'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인도의 위대한 현자였던 라마나 마하시는 이야기를 통해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워크숍 때 자주 인용하는 것이 '극장 이야기'다. 극장에 가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빈 스크린을 보게 된다.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면, 영화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분노, 열정과 고뇌 등 온갖 감정을 다 느낀다. 이윽고 영화가 끝나고 영사기가 꺼져 불이 들어오면 스크린은 다시 텅 빈 상태로 돌아간다. 마하시는 그 비어 있는 스크린이 우리의 비어 있는 의식과 같으며, 세상사와 온갖 감정들은 우리 마음에서 상연되는 영화와 같다고 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안에 있다
스트레스의 원인 : 스트레스란 말은 '팽팽하게 당겨지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여러 연구 보고서에서 직업상의 불만족, 이사, 이혼, 경제적 어려움 등이 우리를 가장 긴장시키는 요소들이라고 꼽고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도전이 될 만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롭고 벅찬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이혼은 일반적으로 심한 스트레스 요인일 듯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 비록 당면한 상황에 대해서는 통제할 능력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한 반응은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심신의 치유 : 신체적 곤란이란 것이 우리 몸이 내면의 불균형이나 에너지 저하에 대처하는 방식임을 깨달을 때 긍정적인 변화는 시작되며, 그런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치유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과 감정적 억압의 충격,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인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고통을 만나면 대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재빨리 없애버리려고 한다. 명상의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그 고통에 부드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저항과 겹겹의 자기방어, 뿌리 깊이 밴 사고와 행동, 감정에 대한 억압, 우리가 고수해 오거나 매달려 있는 모든 방식들과 연결된 끈을 놓음으로써 그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거나 듣지 않고는 인지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명상은 일종의 치료약이자 치유, 즉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특정 부위를 고치는 치료와는 다르다. 모종의 고통을 치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면면들을 전체에 통합하여 그 결과로 변모하게 하는 것이다.
Part 2. 안에서 밖으로의 변화퇴비로 기르는 장미
감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넬슨 만델라는 빌 클린턴으로부터 27년간의 복역 생활을 마치고 나왔던 날 기분이 어땠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들이 증오스럽지 않았습니까? 틀림없이 화가 나긴 하셨겠죠?" 이에 만델라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그랬습니다. 분노와 증오, 두려움을 느꼈죠. 하지만 차를 타고서 감옥 문을 나선 뒤에도 제가 계속 그들을 증오한다면,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에 전 증오심을 놓았습니다." 만델라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분노와의 어울림 : 분노는 선뜻 인정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자신이 짜증을 내고, 욕을 하고, 자제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놀라우리만치 관대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때때로 성질을 부린다 하더라도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 화를 내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문제는 분노는 한 번 치솟게 되면 우리 행동을 지배하고 조종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잘못이라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분노를 뿌리 뽑으려 하는 것은 그림자를 상자에 담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분노를 없앤다 함은 아마도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감정적 손실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결국 나중에 폭발하여 대개 훨씬 더 큰 손해를 입히게 될 때까지 꾹꾹 억눌러 두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를 꼭 '나'의 분노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저 나타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감정으로 바라보면 그만이다. 분노를 내 소유로 만들면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견고해지며 정당화된다. 분노를 내 소유로 만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화를 내는 모습이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닌, 단지 자신을 드러내고자 안달하는 자아의 일시적인 욕구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달의 어두운 부분 : 그림자 속, 즉 내면의 억압된 부분에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이 부분에 다가가기 시작할 때, 뭔가 잃어버렸던 것을 마침내 되찾은 듯 우리는 보다 완전해진 느낌을 받게 된다. 과거의 잘못이나 학대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나 슬픔이 겹겹이 쌓여 있는 층을 뚫고 들어갈 때, 수치심이나 버림받은 느낌이 고여 있는 곳에 접촉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 그림자와 직접 대면하여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인간다운 속성을 더 깊이 받아들이게 되며,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 특히 고통 받는 이들과의 유대감이 더욱 강해지게 된다.
온전함을 향하여 : 명상의 치유력은 자기 자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나온다.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그곳에선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숨을 수도 없다. 이는 지금껏 알아왔던 접근방식과는 다른 것일지 몰라도, 훨씬 더 근본적인 치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명상 속에서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다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단지 지켜보기만 하기 때문에, 으레 그런 경우에 동반되기 마련인 정서적 혼란은 따르지 않는다.
명상은 또한 자신을 초월하여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우리가 그 그림의 단지 한 부분일 뿐임을 깨닫게 해준다. 별개의 독립된 주체로서 '나'에 대한 관념은 타인들에 대한 지각과 인류 사이의 본질적인 유대감으로 대체된다. 더 이상 내 이야기만이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게 되며, 고통 역시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즉, 내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경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나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의 토대가 된다. 그런 만큼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런 자신의 모습과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자신이 경험해온 모든 것,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데 기여한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신체적 특징, 심리적 감정적 색깔과 질감, 모양 무늬들은 우리의 역사, 즉 지금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우리가 거쳐 온 여정에 대한 증거이다. 자신의 한 단면만 거부하더라도 온전해지기는 불가능하다. 특히나 그 부분이 어두운 구석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자신의 모든 면을 인정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용납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사랑스럽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해,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자라면서 보고 배운 데서, 혹은 스스로에 대한 무능감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까지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 그리고 타인이나 세상과도 정직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상대방 인정하기 : 우리가 화나는 것은 십중팔구 상대방이 지금의 모습과 달라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상대방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뿐이다. 그들에게서 잘못된 점을 찾기보다, 다시 말해 그들의 단점이나 약점, 혹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 초점을 두기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그들의 방식대로 따라주는 아량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와 안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훌륭한 스승과도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 짜증이나 분노 같은 강렬한 반응을 부추기는 사람들 - 이 없다면, 자비심과 연민의 감정을 키울 이유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인과 관용의 정신, 그리고 평정심을 기를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화를 부추겨 인내심을 키울 기회를 제공해주는 배우자, 친척, 친구, 동료들은 진정 고마운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소통의 중요성 : 우리들 저마다의 가슴에는 공감을 얻고자 하는,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줬으면 하는 깊고 깊은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의사소통이란 주고받는 것, 이야기하고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건 어떤 숨은 의도도 없이 그 순간에 온전히 임하는 것을 뜻한다. 즉, 비난하거나 창피를 주거나 충고하지 않고, 미리 예상치 않으며, 상대방을 고치거나 개선하려는 마음 없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와 비교하지 않고, 내 경험이 의견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들을 수 있다. 꽤 까다로운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 이야기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줄 때, 우리 내면의 사연을 들어주고 받아줄 때, 우리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의 아픔은 상당히 치유된다. 그때는 더 이상 혼자만 아픈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굴 속의 진주
무지의 인식 : 용서는 고통을 부인하거나 마음속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망각과도 다르다. 망각은 그저 감정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두는 것이며, 그 감정들은 대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훗날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 또한 용서는 발생한 일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극악무도하고 통렬할 만한 행위는 그대로 엄연한 사실이며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용서란 일어난 일을 정당화하거나 옳은 일로 탈바꿈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유발한 무지, 즉 우리의 본질적인 상호연결성 -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 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사실 - 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런 무지 때문에 욕심과 증오심이 우리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고통을 일으키는 그런 무지와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진정한 용서와 연민의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