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Eight: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
스콧 해밀턴, 켄 베이커 지음 | 이콘
Great Eight: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
스콧 해밀턴, 켄 베이커 지음
이콘 / 2010년 11월 / 248쪽 / 10,000원
제1장 넘어지고 일어나 첫 점프를 성공시키라내가 스케이팅과 처음 만난 것은 고향인 오하이오주 보울링 그린의 집 건너편 얼어붙은 도로에서였다. 그 때 나는 네 살이었고, 부모님은 나를 얼음 위에 세우고 스스로 가보게 했다. 나는 기꺼이 그 스케이팅의 첫 출발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 차례 머뭇거리며 앞으로 가다가 뒤로 발랑 넘어졌고, 눈물을 쏟으며 계속 울었다. 그 뒤 당연히 나는 다시 얼음판 위로 가기를 거부했고, 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다시는 그 어리석은 스케이트를 내 발에 신기지 말아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려서 나는 당시 '괴질'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병 때문에 정상적으로 음식을 소화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내 성장은 매우 뒤처졌다. 나는 입양아였는데, 친부모로부터 질병 기록을 받아놓은 것도 없기 때문에 의사들은 이 괴질이 유전적 원인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덧붙이면 각종 테스트와 검사를 한 뒤, 미시간 대학 의료진은 내 증상에 대해 '원인미상'이라고 결론지었고, 그들이 찾아낸 최선의 결론은 내가 흡수장애증후군으로 고생한다는 것이었다. 즉 내 몸이 음식물을 소화시키기를 거부하고 최대한 빨리 음식물을 몸에서 빼내버린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아홉 살이었는데, 네 살 반 이후로 성장이 거의 멈춘 상태여서 내 또래에 비해 키가 절반 정도밖에 안 됐고, 근육 또한 발육이 매우 떨어졌다. 또 영양소를 흡수시킬 수 없어 영양실조 상태였고 위도 팽창되어 있었으며, 가장 부끄러운 것은 코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보스턴 아동 병원의 존경스러운 해리 쉬와크만 박사를 만났다. 쉬와크만 박사는 소화 장애와 성장 저해를 겪는 아동에 대한 다년간의 연구 경험이 있고, 그 증상을 쉬와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 사람이다. 쉬와크만 박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내게 했고, 그의 결론은 나는 그 쉬와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님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저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이렇게 가정해봅시다. 우리가 과잉 치료를 했고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집에 가서 그 극단적인 식이요법도 풀고, 이 아이가 보통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나 관찰해봅시다"라고 말했고, 그래서 부모님은 쉬와크만 박사의 처방에 따라 내가 정상 어린이처럼 먹으며 살아내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마침 그 때 우리 가족의 주치의인 앤드루 클레프너 박사는 부모님이 이제 거의 탈진 상태임을 알고 "이보게. 스콧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스케이팅하러 보내지 않겠나? 그러면 자네들도 일주일에 한 번은 쉴 수 있네"라고 스케이팅을 권유했다. 하지만 집 옆 도로변에서 있었던 스케이팅과의 고통스러운 첫 만남의 기억 때문에 나와 부모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그렇지만 클레프너 박사는 "괜찮을 거야. 그저 스케이팅일 뿐인걸. 스콧이 뭔가를 해보게 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보게 하게" 라고 재차 권유해, 나는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케이팅은 4년 전 내가 이웃집 도로변에서 뒤로 넘어져 머리를 땅에 박고는 다시는 스케이트 타지 않겠다고 하던 그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스케이팅이야말로 내가 다른 아이들과 대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전보다 튼튼해졌고, 위장은 제자리를 찾았으며, 가래로 가득 찼던 내 폐는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다시 성장을 시작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 그 스케이팅 반에 계속해서 참가했고, 곧 코치는 내가 개인 레슨을 받아도 좋을 만큼 잘한다고 부모님께 말하게 되었다. 나를 스케이팅으로 인도하고 더 잘하려고 계속 노력하게 만든 것들, 나를 행복하게 했던 스케이팅의 매력은 여러분이 자신의 관심사나 취미에서 행복감을 갖게 하는 것들과 비슷하다.
스케이팅에서 여러분이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은 넘어졌을 때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인데, 먼저 개처럼 네 발로 얼음을 짚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양손을 밀어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별로 어렵지 않다. 사실 이렇게 일어나는 동작이 스케이팅하는 동작보다 더 쉽다. 그런데 왜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든 상징적인 의미로든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일어나는 법을 안다면 넘어지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도전이 운동, 비즈니스, 사랑, 건강, 학업, 예술 무엇이든 간에 일어나는 법은 다 같다.
그 뒤 나는 토요일의 스케이팅 수업만 받다가 일주일에 몇 차례 수업을 받았고, 드디어는 개인 교습을 받게 되었다.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나는 8자 그리는 방법 같은 테스트 전체 구조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또 개인 교섭에 덧붙여 일반인 세션에서 프리 스케이팅도 했다. 스케이팅을 배우던 첫 여름에 데이비드 로우리 코치와 리타 로우리 코치가 보울링 그린에 와서 스케이팅 프로그램을 이어받았는데, 그때 그들을 따라 세계 각국의 코치들이 왔다. 나는 거기서 많은 코치를 만났고, 나와 비슷한 수준의 스케이터들과 어울렸다. 예로 스콧 로우리는 그 링크의 총감독인 데이비드 코치의 아들이었는데, 내 또래였고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모든 것이 나와 비슷했다.
그 여름 스케이팅 학교가 끝날 무렵 우리는 큰 대회인 보울링 그린 초청 대회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내 첫 공식 경쟁 대회 참가였다. 불과 몇 주 안에 나는 음악에 맞춰 안무가 짜여진 1분 30초 정도의 프로그램을 배워서 심판들 앞에서 해야 했는데, 저연령 소년부 참가자는 스콧과 나, 나의 친구를 포함해 네 명뿐이었지만, 내게는 마치 전미 선수권 대회 같았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나는 2위를 했고, 파란 리본에 달린 은메달을 받았다.
스케이팅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질병의 희생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자신들 인생의 여러 상황이 그렇게 규정되었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나거나, 자신의 취약점을 발전의 계기로 삼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다 스스로의 잘못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이 말이 엄격한 사랑의 교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인생이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특히 어려운 일일수록 스스로 해내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의 삶에 책임감을 가져라. 세운 목표에 헌신하고 끝까지 지켜라.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의 금메달을 따는 과정에 들어가 있게 될 것이다.
제2장 당신의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나는 개인 종목에서 아주 뛰어난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나는 하느님을 '내 전능하신 코치님'이라고 부르곤 한다)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는데, 나의 전능하신 코치님에게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하는 과정은 올림픽 롱 프로그램(프리 프로그램)만큼이나 복잡하고 구불구불했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대체로 내가 수십 년간 배워온 훌륭한 스케이팅 코치들과의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스케이터에게 코치란 신과 같다. 특히 선수가 코치에게 신뢰감을 갖고 있지 못하면, 그 스포츠에서 그리 성공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설계자로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나의 신앙은 페퍼다인 대학 법대 교수의 설교로 인해 깊게 각인되었다. 나는 그가 연단으로 올라가 신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연이란 분명한 인과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빈도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곧 왜 그가 이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그가 생각할 때 우연의 일치란 소위 "하느님이 예정하신 기회"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예정하신 기회라고 그가 말할 때 내겐 뭔가가 분명해졌다. 임의의 사건처럼 보였던 것들 - 삶의 굴곡, 성공과 실패, 사랑의 발견과 이별, 내가 경험했고 이겨냈던 삶을 건 질병과의 투쟁 - 그런 것들이 이제 전혀 임의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성장시키고 학습시키고 그 분의 계획에 따라 살도록 하는 하느님이 준비하신 기회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하느님의 예정된 기회라는 시선으로 지켜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우리 인생관을 밝혀줄 뿐 아니라, 삶의 목적과 방향과 자신감에 대해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게 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2000년에 내 아내가 될 여인을 만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었다. 우리 결혼식에서 주례 목사님이 설득력 있게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만남은 신의 섭리였다. 트레이시와 내가 각자의 삶에서 서로를 찾은 때가 너무도 절묘해서 하느님의 예정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임의나 우연 따위로는 절대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불행에 빠졌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는 당신의 문제를 하느님께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과 대화할 만큼 하느님과 가깝지 않다고 느낀다 해도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을 확실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더 훌륭한 치료사는 없다. 게다가 심리 치료사나 스케이팅 코치처럼 한 시간에 백 달러씩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당신을 패배시키고, 상처 주고, 비참하게 만드는 다른 어떤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당신 삶의 방정식에서 제거해버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느님이 당신을 이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코칭의 모든 것이다. 당신의 전능하신 코치를 믿으라. 그러면 아름다운 일이 펼쳐질 것이다.
제3장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키라인생에서 나는 항상 패배를 승리로 바꾸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어느 수준의 행복을 찾으면 꼭 또 다른 비극이 터지곤 했다. 그러고는 2002년 6월 2일이 되었다. 그날은 내가 내 삶의 패턴을 전적으로 잘못 보고 살았다는 것, 사실은 내가 내 삶을 뒤로만 보고 살아왔음을 알게 된 날인데, 내 삶을 변화시킨 그 혜안은 13세의 암 생존자의 한마디에서부터 왔다. 암과 싸워오면서 나는 전국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는데, 이제 막 암의 회복기에 접어든 나는 주로 마지막 연사였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행사에서 나는 연설할 때 긴장하는 편이라 보통은 자리 뒤편을 슬슬 걸으며 내가 할 말을 생각하면서 다른 연사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그날 내 바로 앞의 연사는 샤나 컬프라는 이름의 13세 소녀로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선수였으나 암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녀였다. 그날 그녀는 오른쪽 의족을 달고 절뚝거리며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연단으로 올라서서 말했다. "내게 일어난 가장 나쁜 일은 암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은 그것도 암을 얻은 것입니다." 강연장의 뒤편에서 나는 청중 거의 모두가 그녀의 이 역설적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곧 이어 그녀는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처음의 충격,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잃은 일, 암으로 인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된 것 등의 이야기를 하더니, 이어서 자신이 어떻게 그 끔찍한 저주를 의미 있는 삶의 스승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어떻게 암이 자신을 보다 나은 체육인,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녀 생애 처음이었을 그 5분간의 연설에서 그녀는 내게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그 시카고의 연설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샤나는 미국 휠체어 여자 농구팀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녀의 암은 회복 중이다. 나는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내 연설은 샤나의 연설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저주'라고 하던 것들을 축복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사물을 뒤집어볼 수 있는 능력이, 완벽한 트리플 러츠 점프를 수행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삶의 챔피언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제4장 앙금을 없애라개인 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들은 원하지 않는 길로 자신을 몰아넣고는 후회하곤 한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직업을 갖고 행복하지 않을 때 그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런 건강하지 못한 관계 속에 빠져 있곤 한다. 또 부정적인 답변을 들을까 두려워서 승진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잘못 대하고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들과 부딪칠 용기가 없어 분노와 쓰라림을 참아버린다. 나는 그런 앙금을 없애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고통을 겪으며 배웠는데, 내가 어떻게 이 부분에서 실패했고 또 그것을 만회했는가에 대한 완벽한 예가 IMG에서의 내 오랜 매니저였던 전설적인 밥 케인과의 관계다.
나는 1984년 프로로 전향하려 할 때 매니지먼트 회사가 필요했는데, 세계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인 IMG는 그동안 내 주변을 맴돌았지만 내 화려한 경력에 상응할 만한 제안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1984년 3월이 되자 그들은 고위층인 밥 케인(테니스 선수인 비에른 보리 등을 담당했는데, 보리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였다)을 내게 보냈는데, 케인은 자기가 나를 어떻게 아마추어에서 프로의 길로 안내하며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그런데 나는 밥에게 "당신이 비에른 보리를 담당하고 있으니 기꺼이 당신의 고객 리스트에 저를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로 좋았다.
밥과 나의 우정과 비즈니스 관계는 단단했다. 그는 열심히 나를 위해 협상했고, 화려하며 고급스러운 방법으로 나의 프로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밥의 지위가 IMG 내에서 높아질수록 우리 사이가 멀어져감을 느꼈다. 즉 그가 수석 부사장으로 승진함에 따라 이제 더 이상 내 일상을 확인하는 위치가 아니었고, 내가 전화해도 즉시 응답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통화가 가능했을 때도 일 이야기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자 나는 회사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나는 그 이슈를 꺼내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대롱으로 낙타의 혹을 뚫는 것 같았던 우리의 언쟁은 1991년 12월에 벌어졌다. 나는 덴버에서 열린 스타즈 온 아이스쇼에 있었고, 밥은 돈을 지불하기 위해 흔치 않은 방문을 했다. 그 날은 그 시즌 투어의 첫날밤이었고, 나는 IMG가 나를 세계 프로 피겨 선수권 참가 선수로 등록했는지 궁금해 밥 옆으로 다가가 "나, 프로 선수권에 참가하는 거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난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며, 동계 종목 담당 부사장을 불러 내가 세계 프로 선수권에 참여하는 협상을 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제이는 그 대회 참가에 대해 내게 지급해야 할 적당한 보수를 책정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나는 우선 그런 큰 협상에 제이가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나의 오랜 친구 밥이 그 자리에 나를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IMG가 그 프로 선수권에 50%의 지분을 갖고 있고 부분적으로 참여 스케이터의 필요비용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므로 적당한 가격에 나를 참가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혼란한 상황 자체가 밥이 이미 내 커리어가 어찌되는지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무척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싸우고 언쟁을 벌이는 대신, 그 울분을 한 달 후 밥과 마주앉아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눌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밥, 너 지금 나를 돌봐줄 수 없는 상태지? 그렇지 않아?" "사실 그래." "그래서 이제 나는 IMG와 더 이상 같이할 수 없어." 밥은 내 발언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IMG를 떠나서) 뭘 할 건데?" "지금은 아무 계획 없어." 나는 매니저를 따로 두지 않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일을 진행시킬까 한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매니지먼트 회사를 택하면 스타즈 온 아이스쇼에 관한 IMG와의 계약 사항 때문에 투어에서 빠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우리의 우정은 상처가 났고, 일 년 동안 내가 그 아이스쇼를 더 이상 즐기면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