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의 현장
한승헌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스피치의 현장
한승헌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10년 9월 / 432쪽 / 15,000원
축사: 기관·단체 행사
양심수와 압제 없는 세상을 향하여_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창립 30주년 기념식 축사(2002.3.28)>오늘,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창립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72년 3월 바로 오늘,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가 출범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결코 평탄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두루 아시는 바와 같이 국제앰네스티는 전 세계의 양심수를 돕는 국제민간인권기구로서, 1961년에 탄생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 지구상의 정치적 탄압과 권력적 야만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는 힘겨운 소임을 다해 왔습니다. 앰네스티가 표방한 얌심수의 석방, 사형의 폐지, 고문의 철폐, 공정한 재판의 촉구, 수감자 처우의 개선 등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갈망하는 온 인류의 보편적 염원에 부합하는 목표였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이 땅에 국제앰네스티의 깃발이 처음 펄럭이게 된 것도 당시의 어둡고 숨 막히는 국내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던 그 시절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앰네스티의 이념과 목표는 뜨거운 호응을 얻기에 족했습니다. 바로 이 국내 정세의 특수성 때문에 앰네스티의 이른바 ‘자국문제 개입 금지의 원칙’과 갈등을 겪어야 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독재권력으로부터 반정부 단체로 낙인찍혀 온갖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한국앰네스티는 AI(Amnesty International)가 지향하는 본래 목표에 합당한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 나라 각계의 지도급 인사와 양심적 시민들이 앰네스티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참으로 어렵고 험난한 여건을 무릅쓰고 참여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 봄, 정치군부의 내란으로 5.17과 5.18이 터졌을 때, 한국앰네스티에도 검거와 수색의 마수가 미쳤습니다. 한때는 한국앰네스티의 소재지가 런던으로 표시되기도 했고, 사무실은 폐쇄되고 조직은 마비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광기 어린 폭풍 속에서도 ‘철조망에 둘러싸인 촛불(AI의 로고)’은 아주 꺼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앰네스티는 오늘날 보듯이 재건과 발전의 역사를 이룩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한국앰네스티의 맥을 이어오신 한국지부의 허창수 지부장님을 비롯한 임원·회원, 그리고 후원자 여러분께 경의와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많은 기대와 당부의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지구의 여러 곳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짓밟히고 있으며, 전쟁과 기아로 생존권 자체가 허망하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면 국내에도 앰네스티가 오히려 캠페인과 시정 요구의 대상이 될 만한 문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이번에 《한국앰네스티 30년 약사》를 발간하고 세계인권포스터 전시 등 행사를 갖게 된 것도 매우 뜻있는 일입니다. 앞으로 한국앰네스티가 정의와 양심을 지키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역동성을 넓혀 감으로써 더욱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축사: 문화·예술·학술 행사 등
5.18 정신, 그 역사의 물줄기를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5.18민중항쟁 30주년행사위원회 주최 5.18 30주년 학술토론회 축사(2010.5.14)>어느덧 30주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국민을 지키라고 준 총으로 국민을 살육하던 전두환 계엄군의 만행이 역사를 피로 물들인 지 어언 30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 1980년 5월은 멀어져 가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오늘이자 다가오는 내일입니다. 우리는 30년 전 그 5월의 항거와 죽음과 피 흘림을 잊고서는 이 나라의 정의와 민주주의와 역사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5.18의 영령을 다시금 추모하면서 당시 저항의 현장에서 몸을 던져 싸웠던 광주 시민들에게 위로와 경의를 표합니다.
어느 의미로 보나 오늘의 이 학술토론회는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할 참으로 뜻 깊은 담론의 자리입니다. 저는 그해 5월 17일 밤,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남산 지하실에 묶여 있어서 광주 민주항쟁을 제때 알지도 못했으나, 그날 밤 김대중 선생이 전두환 군부 측에 연행된 사실도 광주 시민을 더욱 분노케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오늘의 이 토론회가 ‘학술’이라는 명칭에 묶여 어떤 관념적인 어휘들의 행렬에 그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5.18항쟁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 놓쳐버린 채 넘어간 것, 그 심연에서 숨 쉬고 있는 새 역사의 씨앗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고 북돋우고 꽃 피게 하는 배양토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처절했던 5.18을 말잔치에 올리면서 정작 행실에서는 그 숭고한 정신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아예 5.18을 제 속셈에 맞추어 왜곡시킨 사람들의 허물을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으로 오늘과 미래를 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적 저항의 원인을 조성한 자들이 진압과 소탕으로 민주주의와 주권자를 말살시키는 죄악이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폭력의 죄악을 역사에 각인시켜 그 책임자들을 가차 없이 노출시키고 규탄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겉으로는 5.18을 입에 올리면서도 내심과 행실에서는 딴 그림을 그리는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5.18의 참뜻을 왜곡시키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억압통치가 재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면 오늘 이 자리는 학술적이면서도 학술을 뛰어넘는 성장과 다짐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에 맞닿은 과제와 처방과 진로를 제시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토론회에서는 1980년의 항쟁을 광주에 국한시켜 논하지 않고, 서울 쪽의 반성과 채무를 따져가면서, 당시의 저항 주체와 저항수단에 관하여 현장 참여자들의 발언을 들을 수 있게 기획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람직스러운 착안입니다.
이 뜻 깊은 행사를 마련하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5.18민중항쟁 30주년행사위원회에 대하여, 그리고 발제와 토론을 맡아주신 각계의 여러분께 두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이 학술토론회가 우리 모두에게 반성과 깨달음과 결집의 계기가 되고, 민중 억압의 대죄를 범하면서 득을 보려는(던) 세력에 대한 역사의 경고장까지도 아울러 띄워주기를 바라면서, 이로써 축사에 갈음합니다.
조사·추도사·추모 강연·고유문
고난과 영광, 그 양극을 한 몸으로_ <김대중 대통령 일본(도쿄) 추도식 추모사(2009.11.13)>대통령이 사형수가 되는 나라, 그리고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 한국은 그러한 격동을 되풀이하면서 역사가 바로잡혀나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역사의 흐름의 한복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런 흐름 속에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흐름을 이루어낸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인이 되신 그 분을 추모하면서 한 개인이 서거만이 아닌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인께서는 고난의 극과 영광의 극을 아울러 겪으신 분이었습니다. 납치와 수장(水葬)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신념을 꺾거나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이러한 강인함이야말로 훗날의 영광에 빛나는 인간 김대중의 진면목이었습니다.
고인은 매력과 감동을 수반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두루 알려진 대로 그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위 ‘10월유신’을 선포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해외에서 귀국을 포기한 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망명생활을 합니다. 그 무렵, 댈러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시를 쓰셨습니다.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 넓고 큰 광장에서 춤을 추면서 / 깃발을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 얼굴을 부벼 대며 얼싸안아요. /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 입춘의 매화가 어서 피도록 / 대지의 먼동이 빨리 트도록 / 생명의 몸부림 끊지 말아요.
1973년 6월 16일이니까, 도쿄에서 납치당하시기 50여일 전에 쓴 시입니다. 그때의 그 참담한 시기에 기내에서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또 다른 면모이며, 다른 정치 지도자에게서는 찾아보기 드문 매력이기도 합니다.
고인께서는 심지어 일본에서 납치되어 서울 자택으로 압송된 다음 날, 일본 기자들의 요청을 받고 이런 글로 자기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오히려 내일의 해돋이(日出)를 믿고, 지옥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지옥에 떨어져도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는 그러한 신앙이야말로 그분의 용기, 정의감, 역사의식, 인간 존엄에 대한 투철한 인식의 원천이었다고 봅니다. 고인께서는 서예도 달필이어서 많은 휘호를 남기시기도 했는데, ‘경천애인(敬天愛人)’, ‘인내천(人乃天)’, 또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란 글귀를 즐겨 쓰셨습니다. 사람을 하늘 같이 섬기라는 그 교훈은 곧 그분의 인생관이자 정치철학이었습니다.
김 대통령께서는 평생에 참으로 많은 말씀과 글을 남겼습니다. 연설과 문장에서 달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사간의 대화와 토론에서도 보통의 정치인들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 근저에는 그의 엄청난 독서와 깊은 사색으로 온축된 폭 넓은 지식과 심오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계 지도자들 중 그만큼 해박하고 논리적인 식견을 갖춘 분은 드물 것입니다.
고인께서는 그리스도인답게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고 또 실천하셨습니다. 자기를 납치 수장하려 했던 범인들에 대한 용서를 공언했는가 하면, 반국가범죄를 날조하여 사형선고까지 내린 전두환 씨를 석방시켰습니다. 자기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 사업에 200억 원의 예산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나아가 고인께서는 8.15 해방 후 반세기 이상 서로 적대관계를 계속해온 북한과도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통하여 화해를 했습니다. 그분에게 주어진 노벨평화상은 그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 및 공헌과 아울러 남북한 사이의 화해의 실천에 대한 평가였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아나가면, 고인은 강경일변도의 투쟁만 아는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합리적인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납치사건의 책임은 묻지 않겠으나 진상만은 규명해야 한다는 소신에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박정희정권과의 검은 거래 내지 정치적 유착으로 납치사건의 진실을 은폐한 채 이중성을 드러낸 일본정부는 김 대통령의 ‘원칙 있는 관용’을 제대로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에 미치지 못한 일본정부가 고인의 서거 직후 발표한 애도성명 내지 조의(弔意) 표명은 너무도 형식적이고 의례적이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고인께서는 부도덕한 일본정부에 대하여 서운해 하시기보다는 도덕적인 일본 국민 여러분에 대하여 여전히 감사하고 계실 것입니다. 고인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서 국적을 넘어선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일본 국민 여러분과 재일 동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해서 진력하신 고인의 뜻을 되새기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선린의 길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참다운 추모는 고인을 보내고 난 뒤의 슬픔이나 회상을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신 분의 유지(遺志)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고인의 변호인이었고 공동피고인이었으며, 그분을 모시고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정부의 고위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많은 사랑과 편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고인의 인정, 유머, 대인관계 등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서 더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오늘 여기서는 귀한 시간에 한정이 있는 만큼 이만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이 행사를 위해서 많은 수고와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삼가 김대중 대통령님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인사말씀: 기념사 민간행사의 주최 측 또는 주인공으로서
영광보다는 부끄러움이_ <임창순 학술상 시상식 수상자 인사(2007.4.12)>
제가 영광스러운 임창순 학술상을 받게 된 것을 과분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학술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실록물을 수상작으로 격상시켜주신 심사위원님들의 평가를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학술상 시상 규정에 불복조항 즉 이의절차가 없기 때문에 그냥 상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번에 수상하게 된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은 제가 지난 40년 동안에 법정 변론을 맡았던 시국사건의 기록과 자료를 모은 실록물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그중
저 자신의 글이라고 한다면, 각 사건의 성격 규정과 평가를 곁들인 해설 부분과 변론서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실록은 시국사건을 다루었던 사법경찰, 검사, 판사와 그들에게 끌려가 온갖 고난을 당한 피고인, 증인, 변호인 및 그런 사건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남겨주신 분들의 기록성 문장이 함께 모여 있는 집합저작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실록은 사건 당시의 배역 여하를 불문하고 어둠의 역사 속에서 악연을 같이 했던 그들 모두의 실체를 생생하게 기록한 전사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벌을 받은 사람과 역사에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동승하고 있는, 그야말로 오월동주의 희한한 열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역의 공헌도 역사 발전에 한 몫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사형판결이 있었기에 예수의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었다고 볼 때, 역설적으로 역대 독재자들도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자각과 범국민적 결집 투쟁에 원인 제공을 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저의 변론사건 실록도 박정희 씨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없었다면 쓰여질 밑천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 이러한 영광된 자리도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불법 집권과 독재에 분연히 항거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싸운 의로운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실록에 수록된 여러 사건이나 변론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실록은 국가폭력의 기록이자 민주항쟁의 기록입니다. 그 대결의 접점인 법정에서 저는 좌절과 보람, 분노와 승리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법정은 불공정 게임의 공간이었습니다. 심판도 규칙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단하의 피고인들은 분명 경기에서 이겼건만, 판정에선 언제나 패배였습니다. 재판관이 언제나 검찰관의 손만 들어준다면 피고인은 하느님을 변호인으로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절실하게 떠올랐습니다.
변호인석의 저는 처음부터 판결문상의 승리는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국민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증언자와 기록자로서의 역할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명 자각의 부분적인 성과가 바로 이번의 변론사건 실록입니다.
이 실록의 정리·집필·간행에 계속 프롬프터 역할을 해주신 박원순 변호사님과 수지타산에 매이지 않고 방대한 출판을 맡아주신 범우사의 윤형두 회장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해방 후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적 대결과 탄압은 분단을 빌미 삼은 독재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그것들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적이 적지 않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거나 구해보기가 어려운 아쉬움이 큰 것으로 압니다. 특히 재판기록은 지배자에 의해서 왜곡된 내용으로 넘쳐 있어서, 피고인의 진술과 변호인의 변론 그리고 양심적이고 공정한 증언과 자료 등이야말로 참과 거짓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 귀중한 실증 사료가 됩니다. 그러기에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들이 그런 자료의 수집·선택·정리·배포를 할 책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