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태
청완쥔 지음 | 미래의창
역도태
청완쥔 지음
미래의창 / 2010년 9월 / 408쪽 / 15,000원
역도태 : 개성이 강한 자는 아웃!
소동파는 누구의 사람이었을까?소동파는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천재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스물두 살 때 치른 과거시험 시 제출한 그의 시문에 시험 감독관은 경악했고, 송나라 인종은 시험 감독관이 올린 소동파의 대작,〈충직하고 온후함을 상벌함에 관한 소고〉와 그의 아우 소철의 시험지를 보고 손뼉을 치며 "짐이 후손을 위해 오늘 재상 둘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또 여섯 번째 황제였던 신종은 그의 글을 읽을 때면 수라를 드는 것도 잊고 천하의 기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인종이 낙점하였던 '재상 둘' 중에 어째서 재상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일까? 황제가 '기재'라고 여겼던 소동파는 왜 평생을 정계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채 시종 주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을까? 소동파는 그의 원대한 야심에 비해 재주가 모자랐던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찬연한 재능이 매몰된 탓일까? 그 해답은 당쟁으로부터 찾아도 무방할 것이다.
북송 중기, 문관제도가 번영하며 '유사 이래 재능이 출중한 세 사람'을 세상에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개혁가 왕안석과 대학자 사마광, 대문호 소동파였다. 그러나 북송의 당쟁은 철저히 이 3대 인재들의 협력 가능성을 불식시켰으며, 각자의 원대한 포부 또한 파멸시켰다. 참고로 왕안석, 사마광은 서로 나뉘어 무리를 거느리고 신종과 고태후의 대열에 각각 줄을 섰으나, 소동파는 줄 서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자기 목소리를 내었다. 당파 싸움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내면 깊숙이 있는 영혼과 양심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따져보면 소동파와 왕안석은 모두 구양수의 문하생으로 왕안석은 말하자면 소동파의 사형이 되는 셈이었으므로, 소동파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당시 재상이었던 왕안석에 빌붙는다면 그의 전도가 매우 양양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소동파는 당연히 신당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정치적인 견해로 대체되거나 치환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소동파는 신법에 고집스럽게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로 인해 왕안석과의 관계가 깨져버렸다.
"소동파는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왕안석이 판단을 내린 후 신당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소동파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소동파와 마찬가지로 변법을 반대했던 보수 인사인 구당의 당수 사마광은 왜 소동파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당시 사마광이 당수였던 구당은 소동파를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소동파의 태도는 구당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소동파는 독자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동파는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보수당의 당원이 되기를 거부했고, 이들과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즉 그는 왕안석 쪽 사람도, 사마광 쪽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소동파는 누구의 사람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시종 긍정적이기보다는 "개성 있는 자는 도태된다"는 비참한 결론을 도출해낸다. 1079년 신당의 일부 소인배들이 소동파가 쓴 시구를 두고 호들갑을 떨며 어사대에 탄핵문을 올렸는데, 소동파가 "국정을 공격했다"는 내용이었다. 난생 처음 수감되는 재난을 당한 소동파의 그 유명한 '오대시안(오대란 어사대를 말한다.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에 체포된 소동파를 어사들이 심문한 내용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이다)'은 이렇게 찾아왔다.
'오대시안'은 철두철미하게 '괘씸한 소동파 벌주기'로 얼룩진 억울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오대시안'은 벼슬길 내지 인생길에서 소동파가 만난 대지진이었고, 이 지진은 그에게 역도태 게임의 법칙(개성이 강한 자는 도태된다)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개성파 인격의 희생을 원치 않았던 소동파는 부득불 주류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었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도 버려야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연과 더불어 시에 자신의 뜻을 실어야 했다.
역도태 : 무게중심이 낮을수록 안정적!
장수한 풍도, 단명한 해진풍도는 평민의 자제였는데, 그가 사회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가 처음으로 만난 상사가 유주 군벌 유수광이었다. 그렇다면 유수광은 어떤 상사였을까? 유수광의 부친은 군벌이었는데, 유수광은 부친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천하가 혼란하고 군벌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시기를 틈타, 형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옥에 가두고는 스스로 대연 황제가 되어 훨씬 더 잔혹한 폭정을 휘둘렀다.
대연국은 걸연국이라고도 부르는데 2년 만에 붕괴된 단명한 정권이었으며, 정사에서는 5대 10국의 10국에도 포함시켜주지 않는다. 유수광이 후진 이존욱의 포로가 되어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자, 유수광은 죽음이 두려워 백문루에서 여포가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했듯이, 그 또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였다. 사건의 경위가 여포와 비슷하지만 용재보다 더 비루한 인간 유수광을 새로운 군주 이존욱이 거들떠나 보았겠는가. 결국 그는 여포와 마찬가지로 세간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젊고 혈기 방장한 풍도가 인간 말종 유수광이 얼마나 무서운지 어디 처음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사회에 첫발을 디딘 여타 젊은이들처럼 유수광의 서기와 비서업무를 맡게 된 풍도 역시 원기 왕성하고 기개가 늠름하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최고라고 여기는 상관 앞에서 풍도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고,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의견도 내놓았다. 더욱이 풍도가 유수광에게 주제넘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거나, 황제라 칭하거나, 영토 확장에 힘쓰지 말라고 간언하자 유수광은 점차 골치가 아팠다.
화가 난 유수광이 풍도를 감옥에 가두고자 하였으나 그의 구명에 나선 친구들 덕에 간신히 화를 면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풍도는 그만 새가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하는 일마다 신중을 기했으며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변했다. 다시 말하면 풍도는 역도태 게임규칙의 독수를 맛보고, 젊은 혈기가 도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무게 중심을 낮출수록 안정적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풍도는 절절하게 무게중심 제압에 나섰고, 그 결과 제왕을 여럿 바꿔가며 그 밑에서 신하노름을 했다. 바야흐로 5조 10제를 모신 오뚝이가 조용히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충성스럽지 못한 풍도는 일흔셋의 나이로 평안한 임종을 맞았지만, 충성스러웠던 해진은 마흔일곱 해밖에 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곱게 죽지도 못했는데, 해진은 명나라 때 기재였다. 재주로 따지자면 명나라 초기 세 번째 황제의 집권까지 해진은 조정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물론 여기서 가리키는 재주란 문재를 말함이지 천하를 다스리는 재주가 아니다.
졸렬하고 속된 정치학의 분석대로라면 해진의 죽음은 결코 억울한 죽음이 아니다. 누가 해진더러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한 채 황제 계승자의 권력다툼에 끼어들라 했던가? 누가 그더러 우쭐대며 '호성손(好聖孫, 주고치를 말하는데 그는 명나라 성조의 장자였으며, 성조가 세상을 떠나자 황위를 이어받지만, 보위에 오른 지 10개월 만에 향년 47세로 병사했다.)' 혹은 '경쟁을 불허하는 자'라는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으며 공개적으로 황제의 장자를 지지하고 황제가 편애하는 둘째아들을 폄하하라고 했던가? 폭군 주체(朱 )의 눈에 이는 심각한 월권행위였으므로 그는 이미 죽을 날짜를 미리 받아놓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해진이 월권으로 인하여 최후를 맞았지만, 이 대목에서 조금은 억울한 구석이 있다. 그가 능동적으로 월권행위를 했다기보다 주체가 해진을 찾아 의견을 물었기 때문이다. 흔히 황제가 누구를 친히 찾아서 의견을 물을 때, 사실 황제는 상대가 별다른 의견이 없기를 바란다는 사실이 중국 역사에서 대를 이어 보여주고 있는 게임의 규칙이다.
결국 황제가 실제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는 데 있어 해진은 선배인 풍도만큼 총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오대 시기 오뚝이 원로대신이었던 풍도는 목소리 톤이 낮았으며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고, 절대로 주인이 하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숨을 일흔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해진이 죽은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그가 그토록 사력을 다해 충성했던 주고치는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해진은 억울함을 씻을 수 있는 계기를 맞았지만, 이미 동사한 지 10년이 지난 그에게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역도태 : 얼간이처럼 구는 게 더 안전하다
자고로 얼간이는 편애를 받았다이세민은 정교금을 편애했으며, 이용기와 양옥환은 안녹산을 총애했다. 양산박의 송강은 이규를, 악비는 우고를, 이자성은 유종민을 아꼈다. 이렇듯 역사에서 총애를 받은 장수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2인자를 자처했으며, 다소 바보스러웠다는 점이다. 그런데 2인자 혹은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지는 않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정말 어수룩하고, 어떤 이들은 어수룩한 체했다. 앞에서 예를 든 인물 중에 이규와 우고는 정말 바보들이고, 유종민은 실제 바보이기도 하고 바보스러운 척 하기도 한 반반씩 섞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안녹산은 가장 능청스럽게 바보처럼 굴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좀 모자라는' 얼간이 장군들이나 윗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던 자들은 대개 '순박'해서 윗사람의 눈에 들었다. 윗사람들은 꾸밈없고 순박한 이들을 편애했고 웬만한 잘못도 눈감아 주었다. 윗사람들은 정곡을 찌르는 이견보다는, '꾸밈없고 순박한' 이들의 이견을 더 좋아했다. 예컨대 이자성의 경우, 유종민과 이암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유종민에게 이자성은 한없이 관대했다. 그러나 온화하고 교양 있는 이암과는 마치 물과 불이 만난 것처럼 상극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암은 영리했고 그의 재능은 상관인 이자성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유종민은 비록 다소 난폭하긴 했지만 총명하지 못했으므로, 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자성의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암이 이자성의 손에 죽게 된 이유도 이자성 앞에서 모자라게 굴지 않아서였다. 이암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그 돌아가는 정세를 뻔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암의 견해는 독창적이며 예리했다. 그렇게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암을 이자성은 과연 곁에 두고 싶었을까?
이암은 너무 명민하게 굴어 죽임을 당했고, 반대로 안녹산은 어수룩한 체했으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번영을 누렸던 당나라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멸망했는데, 그 안사의 난을 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오랑캐 안녹산이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발생하기 전까지 당현종과 양귀비는 안녹산이 오랑캐로서 은혜를 입은 자라는 이유로 방심하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녹산이 바보짓을 너무 잘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당현종이 안녹산에게 태자를 알현하도록 하였는데 안녹산이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대신들이 그에게 어서 절을 하라고 했지만, 안녹산은 여전히 선 채로 "저는 오랑캐라서 조정의 예를 잘 모를 뿐 아니라, 태자가 어떤 벼슬인지는 더더구나 잘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당현종이 "이 아이는 황태자다. 내가 죽고 나면 태자가 날 대신하여 너희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녹산이 "소인 우둔하여 여태껏 폐하 한 분만 알고 있었지 황태자는 몰랐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마지못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현종이 양섬, 양기, 양귀비 세 자매와 안녹산에게 서로 의형제를 맺으라고 권하자, 안녹산은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어 했다. 이에 당현종과 양귀비는 나란히 앉아 수양아들이 된 안녹산의 절을 받았는데, 안녹산이 양귀비에게 먼저 절을 하자 현종이 왜 양귀비에게 먼저 절을 하는지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안녹산이 "우리 오랑캐들은 어머니에게 먼저 절을 오린 후에 아버지께 올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황태자도 몰라보고 오직 아내인 양귀비와 현종만을 존중하는 덜 떨어진 안녹산이 황제 마음을 기쁘게 만들고 마음을 푹 놓게 만들었으니 어찌 이런 안녹산을 예뻐하지 않았겠는가? 황제는 그런 그에게 저절로 무장해제가 되었다.
당시 충성스러운 척을 한 자는 안녹산 하나만이 아니었다. 안사의 난 초기, 당현종은 반란군을 쉽게 진압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황제의 수중에는 안녹산과 견줄 만한 비장의 카드, 가서한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현종의 기대주였던 가서한 장군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가서한 장군은 반란군을 저지하던 중 반란군의 복병을 만나자 안녹산에게 무릎을 꿇고 투항했기 때문이다.
가서한과 안녹산 두 경쟁자는 황제 앞에서는 충성을 다 할 것처럼 연기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는 반역자요, 하나는 적에게 투항한 배신자였으니 이들의 충성은 모두 거짓이었다. 예로부터 '좀 모자라는' 사람이 복이 많다는 것은 중국 역사상 성문화되지 않은 역도태 게임법칙인데, 다소 바보스러운 아랫사람을 편애한 상사의 눈에 비친 얼간이의 장점이라면 송강이 끊임없이 이규를 편애한 것처럼 너무 많아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법하다.
얼간이는 평생을 가도 윗사람만큼 총명할 수 없다. 이들은 한번 자신이 모셔야 될 상전이라고 인식하면 아무 생각 없이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원한도 후회도 없이 해낸다. 똑똑한 아랫사람을 두려워하는 윗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얼마나 다루기 쉬운 인물인가? 한편 복이 많다는 얼간이도 희생양이 될 수 있고, 얼간이 가면을 벗고 반격을 가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감쪽같이 바보행세를 하여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오히려 복이 따를 뿐 아니라 일생 동안 총애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규와 안녹산의 결말이 어떠하건 간에 '다소 바보스러운' 사람은 오랜 세월 역사에 줄곧 나타났다. 역사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역도태 게임 중 얼간이 게임이 있었으며, 이 게임으로 인해 후천적 지적장애를 가진 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결론 :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범문정, 홍수전 그리고 손문의 재능범문정, 홍수전, 손문, 이 세 사람이 생존해 있던 당시 역사는 이들을 선량한 사람들로 바라보지 않았다. 범문정은 명나라 군신과 백성의 눈에 확실히 매국노로 비춰졌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은 홍수전을 역적이라고 불렀다. 또 중화민국을 설립하여 국부가 되기 전까지 청나라 조정은 손문을 '도둑'으로 몰아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견해는 논외로 하고 재능만을 두고 평가하자면 이 세 사람은 과연 인재였을까? 이들의 라이벌이나 원수라 해도 이 물음에 대해 '아니오'라는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이들은 확실히 인재였다.
'매국노' 범문정은 청나라 기초의 절반을 닦아준 인물이다. 그는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해주듯이 후금(後金)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해결책을 바로바로 내주었고, 그가 내놓은 기묘한 계책은 후금이라는 변방의 유목민이 중원을 탈환하고 환골탈태하여 청나라로 변모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범문정은 매국노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의 계략은 조금도 시시하지 않았다. 명나라 원숭환과의 전쟁에서 범문정이 사용한 반간계(적의 첩자를 이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계책) 덕분에 황태극은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명나라 군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그는 한족의 장수나 군신들이 항복하면 변발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변발을 하는 자들에게는 살길을 열어주어 청나라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진정한 한족(漢族)의 인재였다. 한족이었던 그가 어째서 명나라가 아닌 후금을 위해 일했을까? 우선 그의 출신배경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범문정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저명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이며 문학가인 북송의 명신 범중엄이었고, 범문정의 조부 범홀은 명나라의 병부상서를 지냈다. 그러나 범홀은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엄숭에게 밉보여 배척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온 가족을 거느리고 이사를 가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