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내 인생이다

김희경 지음 | 푸른숲
내 인생이다

김희경 지음

푸른숲 / 2010년 9월 / 260쪽 / 13,000원




1. 지금 이 삶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인가



결단 - 늦지 않았다

이영이 : 신문기자에서 의사로

이영이 씨는 나의 전 직장 선배다. <동아일보>주말 섹션인 위크엔드 팀장으로 일하던 그가 2005년 의과전문대학원에 가겠다고 사표를 낸 '사건'은 사내에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뉴스였다.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마흔세 살에 그만두고 그 힘들다는 의대 시험을 보겠다니, 놀랍고 장하다고 격려하면서도 한편에선 '과연……' 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 이번엔 그가 이화여대 의과전문대학원 신입생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도전 정신에 감탄하는 사람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용기를 칭찬하는 사람들, 기자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보이는 의사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나 역시 부러워하고 감탄하던 사람에 속했는데, 그가 이제 자기 꿈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시절 둘이서 저녁을 먹을 때 그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불투명한 미래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문득 "나는 기자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해외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지속적으로 돕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살아보고 싶은 삶이라고 했던 말이 인상 깊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꿈을 좇아 삶의 방향을 튼 사람들에게서 종종 드러나는 어떤 공통점을 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꿈을 향해 좋은 뜻을 품고 일을 저지르면 마치 자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변에서 도와주게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남의 눈에 파격적으로 비치는 인생 전환도 들여다보면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때로는 스스로도 있는지 조차 몰랐던 씨앗에서 싹이 터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도전을 하건 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들이 다 쓰이고 결국에는 도움이 되었다. 두 가지 인생 전환을 결심하는 시점에서 예상하고 계획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지 않는 길을 골라 걷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다고? 왜?

그에게 길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꿈틀대기 시작한 때는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던 2001년이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칸다하르>를 우연히 보았는데 분쟁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의사의 모습이 눈에 쏙 들어와 박히더니 잊히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열병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기자로 오래 일해왔지만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게 느끼던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는 흑백을 갈라야 기사를 쓸 수 있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결론이 늘 불가지론으로 맥 빠지게 흐르곤 했다. 인간이 한 사건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에 시달렸고 기사를 쓰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취재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기사를 쓸 수는 없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저게 다는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직업적 태도가 몸에 배어버린 거야. 취재원을 만날 때면 '저들이 나를 어디까지 속일 것인가' 하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고, 용기를 보여줘야 나를 함부로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용감하고 사납게 보이려 애를 썼지……."



귀국 이후 예기치 않게 신문사 입사 동기와 결혼을 하고, 늦은 사내 결혼이 센세이셔널한 이슈가 되는 바람에 마음이 약간 불편해진 무렵이었다. 결혼 직후인 2005년 2월 남편과 함께 떠난 장기근속 휴가 여행이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이 여행은 이화여대 의대 이근후 박사가 해마다 가는 네팔 의료 봉사 캠프를 따라간 것이었다. '봉사 캠프' 같은 여행을 싫어하는 남편도 이번엔 어쩐 일인지 순순히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의사와 일반인이 어울려가는 캠프를 따라가 의사들의 봉사를 부러움 섞인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네팔의 포카라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던 날 저녁, 그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서든 몸만 있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의사 같아. 내 인생의 남은 절반도 저렇게 살 수 있으면 너무 좋을 텐데. 지금이라도 의과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말을 듣던 남편이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왜 안 돼?" 나이가 마흔도 넘었는데 이제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그의 말에 갑자기 남편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있던 의사들을 향해 "선생님들!" 하고 소리쳤다. "이 사람이 지금이라도 의과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안 될까요?"



난데없는 질문에 의사들은 왜 안 되겠느냐, 늦지 않았다 하면서 박수를 쳤다. 얼떨결에 '그래? 그럼 한번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일행 중에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그해 신설된 의과전문대학원 1기에 합격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에게 시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문과 출신도 비교적 어렵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 귀가 번쩍 뜨였다. 자기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귀국할 무렵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시험을 보겠다는 생각을 거의 굳혔다. 사표를 내고 퇴사한 날은 두 달 뒤인 2005년 4월 20일. 만 17년간 기자 생활을 했고 마흔 세 살이었다. 그의 쉽지 않은 결심에 "그 시험 어렵다던데, 네가 되겠어?" 하며 대놓고 빈정거리던 상관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격려해주는 분위기였다. 배수진을 쳤으니 이제 번복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서다

공부를 하던 첫해엔 시험을 통과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과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언어추론 정도만 어떻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수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건국대 의과전문대학원 시험에서 예비합격까지 갔다가 떨어졌다. 낙방했지만 실망하는 대신 짧은 기간에 예비합격까지 갔으니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하다. 이듬해에는 20점쯤 점수를 더 올렸고 이화여대 의과전문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었다.



문과에다 기자 출신 만학도로서 공부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된 호기심이었다. 오랜 사회생활에서 보고 익힌 것이 공부에 유용하게 쓰였다. 갓 대학을 마친 이십대 수험생에 비해 전공지식은 부족할지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생각하면 처음 듣는 이론도 쉽게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 주변에 질병을 앓는 친지나 지인들도 그에겐 공부에 흥미를 더해주는 훌륭한 도우미였다. 생물 시간엔 늘 주변의 사례를 떠올리며 질병의 메커니즘을 더듬었다. 물만 하더라도 단순한 H2O가 아니라 원자 단위에서부터 우주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우르고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그는 자신의 인생 전환이 혼자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인연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칠 때도 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바꾼 2005년의 여행은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만나 오래 알고 지내온 원불교 김지정 교무의 소개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수습기자 생활을 막 마치고 어린이 청소년 기사를 담당하는 '초짜 기자' 시절 김 교무를 처음 만났다. 원불교에서 하는 난민 돕기 바자회를 취재하러 갔던 그가 김 교무에게 "저도 나중에 이런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안 되지만 이다음에 꼭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이 말을 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기자의 다짐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김교무는 그 이후 계속 엄마처럼 그를 챙겨주었다. 일본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이근후 박사가 운영하는 가족아카데미와 네팔 의료 봉사 캠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언제 시간을 맞춰 같이 가보자고도 권했다. 그가 2005년 장기근속 휴가 여행에서 인생 전환의 계기를 만나게 된 것도 마침 김 교무가 의료 봉사 캠프 일정이 있다고 알려준 덕분이었다.



또 그의 인생에서 줄곧 큰 나무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그는 아버지가 여성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전문직이 필요하다면서 의대에 가라고 내내 권유하던 고교 시절, 공부할 자신도 없고 돈만 밝히는 의사로 살기 싫다면 끝까지 안 가겠다고 버틴 전력이 있다. 이과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몰래 서명을 위조해 문과로 옮긴 다음, 고3 담임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겨우 자신의 뜻대로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1학년 때 개인 지도를 맡아준 대학원생이 두꺼운 안경을 쓴 채 학교와 도서관만 오가는 것을 보고 일찌감치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은 채 내리 놀기만 했다고 한다.



대신 그가 집중했던 일은 봉사활동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아직도 학교에서 배우던 '남을 돕는 삶이 훌륭하다'는 유아기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만큼 남을 도우며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런 열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대학 시절 3년 내리 YMCA의 정신박약아 봉사 서클에 참여했던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자기 동네인 수색에 검정고시 야학을 차렸다. 아버지와 함께 수색 가구 공장 사무실의 지하를 빌리고, 안내 벽보를 붙이고, 초등학교 동창들을 선생으로 불러서 2년간 검정고시 야학을 운영했다. 대여섯 명 안팎, 많을 때는 열 명 남짓했던 학생들이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하고 나니 그 자신도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계속 운행할 사람을 찾지 못해 야학의 문을 닫을 때 그는 '내 갈 길이 있는데 언제까지 여기에 붙들려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과 그 일을 지속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 말 일이라면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았고, 충동적으로 잠깐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익혀 어디를 가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억들도 의과전문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한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그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하다가 중간에 주저앉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2001년에 의대 진학 이야기를 꺼냈다가 금세 포기한 것도 일을 저지른 뒤 야학처럼 몇 년간은 어떻게 열정으로 한다고 치더라도 도중에 시들해져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두려워서였다. 어찌 보면 저지르는 일은 쉽다. 누가 더 오래 버티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가가 더 중요하다. 끝도 없는 공부를 혼자 했더라면 금방 지겨워져서 포기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옆에서 붙들어준 남편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다

그는 삶의 방향을 튼 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쁘다고 했다. "기자를 할 때는 자신이 없어도 있는 표정을 지어야 하고, 약간 남이 옳은 것 같아도 내가 더 옳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야 하고, 나조차 속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편안하고 좋아,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더 캐묻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게 다라고 믿어도 되는 것,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게 기뻐."



의과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도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어디까지 밟아야 할지, 어떤 전공을 택해야 할지 숱한 선택의 과정이 남아 있다. 처음에 일을 저지를 때는 의사 면허만 따면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고 곧장 현장에 뛰어들겠다고 생각했는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인턴 과정을 밟지 않으면 실기를 손에 익히는 체험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어디 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도록 만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정의학과를 선택하고 싶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처음에 일을 저지를 때는 의사를 필요로 하는 구석진 곳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의대에 와서 보니 이젠 어지간한 섬마을에도 의사가 없는 곳이 없다.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하고, 선택과 수련의 과정이 첩첩산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처음 방향을 틀 때의 설렘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저런 한계와 치열한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나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할거야" 하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이제는 나를 위해 다르게 살기로 했다



성장 -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어가면서 배우는 것이다

김용규 : 벤처 기업 CEO에서 숲 생태 전문가로



산속으로 한참 올라가자 멀리 오두막집 한 채가 보였다. 산 위쪽 꽤 높은 지대에 터를 잡았는데도 어떻게 산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지 희한했다. 저런 곳에 살면 세상 소음이야 들리지 않겠지만, 무섭지 않을까……. 하지만 웬걸. 갑자기 개 두 마리가 컹컹 짖으며 적막을 깨뜨렸고 그 뒤로 여자아이가 웃으며 달려 나왔다. 김용규 씨가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토요일 아침. 늦은 식사를 막 마쳤는지 그의 아내는 달그락달그락 접시를 씻고 있었다. 산속에서 막 기지개를 켠 가족의 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두막집이 들어선 곳은 말 그대로 그의 숲이다. 그는 6년 8개월 동안 CEO를 맡아 운영해온 회사를 2006년 그만둔 뒤 뜻을 같이하는 사람 다섯 명과 함께 이곳 숲 7만 5천 평을 샀다. 숲에 공동체 겸 생태 교육 장소를 마련할 계획으로 저지른 일이다. 2008년에는 그가 먼저 숲속에 집을 지어 자리를 잡았다. 가족들은 아이의 학교 때문이 인근 증평군에 살고, 그는 숲에서 혼자 지내며 농사를 짓고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숲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열심이다. 2009년에 《숲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을 펴내고, TV에도 두어 번 나갔더니 그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귀농 방법을 묻거나 땅을 팔라고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벽에 다짜고짜 전화해 "당신 행복해?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낯선 이들도 있다. 한번은 자칭 지리산 선녀가 난데없이 찾아와 "당신은 땅이고 나는 하늘"이라면서 함께 살자고 우기는 통에 당황스러웠던 적도 있다.



2009년 봄 그의 숲에 다녀온 지 1년이 지난 뒤 그에게 다시 연락해 숲 생활 3년차의 소감을 묻자 그는 자신의 달라진 생체리듬을 들려주었다. "도시에선 사계절 내리 수면 시간이 비슷하잖아요? 숲에선 겨울이 되면 잠이 늘어나요. 해가 길어지니까. 또 요즘처럼 봄이 되면 잠이 점점 줄어들어요. 몸의 숲의 리듬에 적응한 거죠. 나는 가끔 서울에 갈 때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30분만 지나도 눈이 따가워요. 내 몸이 숲의 공기에 적응한 대신 도시 공기에는 부적응 사태가 되어버렸어요.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 안에 들어가면 목이 건조하고 몸이 힘들어요. 습도가 잘 유지되는 산방의 흙집에 어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나고……."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은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불편함이 왜 없겠어요. 도시 생활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서양이 지난 2백 년간, 한국은 지난 50여 년간 과거 어떤 시대보다 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생활이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내가 나폴레옹이나 세종대왕보다는 훨씬 편리하게 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잖아요."



2010년 초 폭설이 내렸을 때는 보름간 산속에 고립된 적도 있다. 쌀과 기름이 떨어지는 통에 할 수 없이 지게를 지고 마을에 내려가 식량과 연료를 짊어지고 올라왔는데 서툰 지게질에도 몸이 이기심에서 깨어나는 묘한 즐거움에 혼자 재미있었다고 했다. 4, 5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 깊은 숲 속에서 혼자 벌을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지게질을 하게 된, 이 간단치 않은 전환의 씨앗이 뿌려진 건 언제였을까?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