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톱 STOP
빌 맥팔란, 알렉스 옐로우리스 지음 | 눈과마음
스톱 STOP
빌 맥팔란, 알렉스 옐로우리스 지음
눈과마음 / 2010년 7월 / 224쪽 / 10,000원
사랑에 목마른가요?<9월 27일 화요일> 서른여섯인 지혜는 크래커 봉지 하나를 뜯으며 TV 앞 소파로 몸을 털썩 던졌다. 지금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무언가가 계속 신경에 거슬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섯 살짜리 아들 연우는 게임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다.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인 최영철이었다. "고속도로가 난장판이야. 아홉 시까지는 집에 도착하도록 노력할게."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메시지 도착 신호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쳐다보던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문자 메시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랑에 목마른가요?'
"누가 장난질이야?" 휴대폰으로는 발신자를 찾을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광고겠지, 뭐." 지혜는 그렇게 결론짓고는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는데, 마침 새롭게 편성된 리얼리티 쇼 예고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었다. '사랑에 목마른가요? <사랑의 섬>에서 완벽한 연인을 찾는 열 명의 참가자 중 한 명이 되어보세요!' 지혜는 깜짝 놀랐다. 문자 메시지와 똑같은 '사랑에 목마른가요?'였다.
마침 영철이 들어왔다. "나 왔어." "당신 혹시 나한테 문자 메시지 보냈어요?" "아니, 고속도로가 엉망이라고 전화했잖아." "아니, 그거 말고 몇 분 전에 이상한 메시지가 하나 왔는데, '사랑에 목마른가요?'라고 왔어." "광고 같은데 뭘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똑같은 말이 TV 광고에 나오지 뭐야." "새로운 마케팅일 거야. 요즘 광고들이 얼마나 교묘한데. 또 과자 먹었구만." 영철이 빈 과자 봉지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들어 올렸다. "당신이 언제 올지 알 수 있어야지. 난 당신이 식탁에 앉기 한참 전부터 배가 고프다고." "그러면서 살찐다고 불평은 왜 해?"
지혜가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늘 기꺼운 마음으로 식사 준비를 한다. 그것은 그녀의 가족, 영철과 연우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십 대 시절부터 과식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없으면서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을까봐 늘 노심초사해왔다. 지혜는 피곤하거나 지루할 때 감자칩 따위의 과자를 먹으며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그 효과는 지극히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과식한 뒤에는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져서 며칠 후 혹은 몇 주 후에 또 다른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다.
당신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나요?<9월 28일 수요일> 영철이 지혜가 건네주는 서류 가방을 받아 들며 말갛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53분 후에 열릴 회의로 관심이 쏠리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강 부장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회의는 전국의 여덟 개 지부가 각각 인사를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회사의 매출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딱 한 가지만 빼고는, 그리고 부장이 그 딱 한 가지를 절대로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최영철 씨, 여기서 왜 우리만 뒤처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영철은 잠시 망설였다. "왜죠?" 부장이 압박을 가해왔다.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말해볼까요. 올해의 영업 이사는 배가 불러 뒷짐만 지고 있고, 그 밑의 영업팀은 사기가 바닥인 데다 형편없는 고객망을 보유하고 있지요. 동의합니까?" "전 뒷짐만 진 적 없습니다. 전……." 영철은 나머지 회의 시간 동안 목청을 높여 요목조목 따지고 드는 부장의 질책과 모욕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회의를 마치고 강 부장이 나갔다. 벽을 응시하는 영철의 마음속에서는 회의 시간 중에 오갔던 대화가 되풀이되고 있었는데, 부장의 날카로운 어조는 익숙한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영철은 중학생 시절에 성적이 아주 좋았다. 2학년 때는 반 평균 67점이 나왔던 영어 과목에서 91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오른 24점에는 관심 없이 "9점은 어디다 갖다 버린 거냐?"라며 다그치곤 했다. 그리고 졸업 시험에서 훌륭한 점수를 얻었음에도 그의 아버지는 '큰 재목감은 못 될 녀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되뇌곤 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모습과 삶에 대한 만족감에 매일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걸까? 우리 자신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외부의 시각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내부의 시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겉으로 봤을 때 영철은 자신의 일을 매우 잘해내고 있는 성공한 남자다. 작년에 그는 '올해의 지부 영업 이사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의 예전 상사는 그를 높이 평가했고, 지혜 역시 남편을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런 생각을 남편에게 직접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철 본인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이미 이룬 업적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큰 성공의 뒤꽁무니를 좇는다. 왜냐하면 더 큰 성공을 이룬 후에야 그의 표현대로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철은 예전 상사인 손 부장과는 죽이 잘 맞았다. 영철의 상사가 바뀐 것은 최근이었는데, 바뀐 상사는 비협조적이며 공개적으로 비판을 잘하는 성격이다. 어쩌면 그는 영철이 누리는 명성과 전임자와 이룩했던 좋은 관계에 위협을 느끼고 영철을 끌어내리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한편 영업팀의 여자 동료들은 예전에는 인간미가 넘치던 영철이 최근 들어 비합리적이고 요구 사항이 많아진 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까지 꺼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몇 해째 응원해온 축구팀은 요즘 부쩍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그의 자존심이자 기쁨이었던 BMW는 아반떼 HD로 강등되었다. 이렇듯 외부 세계가 여기저기 갈라지며 붕괴되자 덩달아 내부 세계 또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영철은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위기 상황으로 빠르게 치닫고 있는 것이다.
회의 후 상담 고객에게 가기 위해 영철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멀리 은색 아반떼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다시 속이 뒤집혔다. 작년에 '올해의 지부 영업 이사'로 선정되어 부상으로 받았던 성공의 상징이요, 그의 자부심이자 기쁨이었던 BMW는 지난달 말에 내려진 지시에 따라 회사에 다시 반납해야 했다. 잠시 후 영철은 고객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늦을 것 같다는 고객의 연락을 받고 15분 정도 신문을 훑어볼 수 있겠다 싶어 다시 자동차로 돌아갔다. 그때, 휴대폰이 삑삑거리며 문자 메시지가 떴다. '당신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나요?' 영철은 지혜가 실없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한마디 해주려고 답장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다시 시도했지만 화면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신문을 집어 들었다. 구인란 좌측 하단에 자리한 작은 광고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은 작지만 헌신적인 우리 영업팀을 이끌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나요?'
힘겨운 하루를 보낸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걸친 맥주 두어 잔이 스트레스를 다소 무디게 했다. 영철이 도착했을 때 연우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지혜는 차 마시는 시간에 아들 녀석이 소동을 일으킨 바람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식사를 마친 영철은 지혜에게 문자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뭐였어요? 사랑에 목마른가요?" 지혜가 물었다. "아니,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냐고 묻던데." "자격? 무슨 자격이요?" "난들 알겠어? 난 내가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상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당신, 여전히 잘하고 있어요." "그런 기분이 안 들어. 사실, 잘나가던 작년에도 난 좋은 시절은 잠깐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땀 흘려 일한 대가로 포상 휴가를 보내는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로구나. 그런 생각."
감정 은행 잔고가 바닥났나요?
<10월 14일 금요일> 지혜가 주차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다. "지혜야. 저녁에 오는 길에 몇 가지 물건 좀 사다줄래?" 엄마에게 식료품을 사다주고 돌아와 집 현관문에 열쇠를 막 꽂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처럼 좀 늦을 것 같다는 영철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 채영이다. "지혜야, 속상해 죽겠어. 너랑 와인 한잔하며 수다나 떨고 싶어." '안 된다고 해야 해. 난 지금 너무 피곤해.' 간절한 목소리가 지혜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 애 재우고 나서 와인 꺼내두고 기다릴게."
피곤하고 배가 고파진 연우도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엄마의 관심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혜가 냉장고로 와서 와인을 꺼내자 연우는 그 틈을 타 오렌지 주스를 꺼내 들었고, 결국 통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주스는 사방으로 쏟아졌다. 연우는 쏟아진 주스보다 엄마의 반응에 더욱 놀라워했다. 그때 식탁 위에 놓인 그녀의 가방 안에서 휴대폰 신호가 또렷이 흘러나왔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당신의 감정 은행 잔고가 바닥났나요?' 지혜는 왈칵 큰 울음을 터뜨렸다. 지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고, 그런 그녀에게 쏟아지는 주위 사람들의 요구 사항은 끝이 없었다.
지혜는 지나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다. 모든 일에 그렇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는 물론이고 그녀의 도움이나 지원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라도 달려간다. 왜냐하면 지혜는 모두를 기쁘게 만들고 자신의 욕구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함으로써 그들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혜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잠시 후 현관문을 들어선 채영은 최근에 일어난 자신의 실연 사건을 몇 번째 되풀이해 설명하면서 허락도 없이 찬장에서 와인 잔을 두 개 꺼냈다. 그 시간 연우의 방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혜는 채영이 오기 전에 집 안을 치우느라 아이를 재워주는 일을 빼먹었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15분 후, 영철이 집에 돌아왔을 때 채영은 두 번째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훌쩍거리던 연우는 이제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영철은 연우를 달래기 위해 연우 방으로 들어갔다. 영철이 보기에 아내에게는 끔찍한 친구들이 세 명 있다. 그는 그들을 '세 마녀'라고 부른다.
영철이 연우의 작은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채영이 막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미안해, 여보. 저녁 먹었어요?" "응, 근데 좀 출출해." "피자 만들어 놓은 거 있는데 좀 데울까? 기다려요." 잠시 후 영철은 지혜가 가져온 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말없이 칼로 피자를 조각조각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선 "이게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는 에너지의 전부라고 상상해보자고. 한 조각은 나한테, 또 한 조각은 연우가, 또 한 조각은 장모님한테. 자, 이제 당신 에너지는 한 조각 남았어. 이걸 누구한테 줄 거야?" "채영이, 수진이, 경희." "맞아, 그 세 마녀." "여보!" "자, 이제 친한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에 당신의 에너지를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지?" "은수?" "아니." "현정이?" "아니! 당신을 위한 시간이 없잖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도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서 나오지요?" 지혜가 비꼬는 어조로 물었다. "자, 보라고." 영철이 다시 칼을 들고 피자를 잘라냈다. "잘 봐. 나랑 연우한테 똑같은 에너지를 쓰고, 장모님의 몫에서 반을 잘라내고, 세 마녀의 몫에서도 잘라내면? 이렇게 당신 몫이 생기잖아."
당신의 인생에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나요?<10월 17일 월요일> 영철은 상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고객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에 성사된 계약으로 당분간 상사의 고약한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불독'이라는 글자가 떴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그렇잖아도 지금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거 유감이네. 난 나쁜 소식이 있어서 전화했는데." "네? 무슨 일이죠?" "우리 회사 최고의 고객께서 자네의 음주 습관에 대해 불평을 하셨거든. 들어오는 대로 내 방으로 오라고." 영철은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점심시간에 맥주 한두 잔도 마시지 말라는 거야?' 그 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당신의 인생에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나요?'
방으로 들어가자 부장이 말했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고객을 대하는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야!" "점심시간에 맥주 한 잔도 하지 말라는 법은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그런 법은 없네. 그리고 고객을 놓치고 거래가 끊기게 한 영업이사를 해고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시정하도록 하게. 그리고 말이야, 누군가 여직원을 대하는 자네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하는 소리도 들리더군. 주의하게!"
건강한 성장을 위해 누구를 가지치기해야 할까요?
<10월 30일 일요일> 영철은 화창한 일요일에 우울해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주말 일간지의 원예 면을 펼쳤는데, 거기에는 "건강한 성장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십시오!"라는 기사가 있었다. 순간 영철이 소리쳤다. "바로 이거야, 여보! 이게 우리가 오늘 할 일이라고. 여름부터 줄곧 앞마당을 팽개쳐뒀잖아." 30분 뒤, 영철과 지혜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1층 아파트 앞마당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가지치기 준비를 했다. 그때 지혜의 호주머니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거기에는 '건강한 성장을 위해 누구를 가지치기해야 할까요?'라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이것 좀 봐요. 이 장난 메시지 이젠 멈춘 줄 알았는데." 영철이 휴대폰을 받아 들고 회신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신호는 가지 않았다.
"이 사람들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않아? 성장을 위한 가지치기라니. 우리가 화단을 손질하는 이때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 화단을 보면 당신 인생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이 채송화 좀 봐. 불과 4년 전에 이사 와서 심은 채송화가 얼마나 무성하게 퍼졌는지 보라고. 당신 친구 채영 씨와 좀 비슷하지 않아? 한 평을 줬더니 열 평을 차지한 꼴이야." 영철은 채송화 다발을 잘라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이제 수진 씨를 찾아볼까? 오래전 당신과 내 아내의 우정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썩기 시작했을 때, 그때 당신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했어. 당신은 이제 아웃이야!" 영철은 한껏 흥분해서 죽은 식물의 뿌리를 있는 힘껏 뽑아냈다. "다음은 누구지? 경희 씨는 어디 있을까?"
"잠깐만." 지혜가 끼어들었다. "이게 우리 화단이라면 당신의 말라 죽은 친구들도 솎아내야지. 이를테면 재훈 씨 같은 사람 말이야." 그녀가 장미 덤불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 집 케이블 방송으로 스포츠 경기 보고 싶을 때만 전화하잖아." "좋은 지적이야, 잘라내자고!" 영철이 말했다. "다음은 당신 회사 부하 직원 태호 씨." "뽑아버려!" 영철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지혜가 시든 덩굴을 힘차게 뽑아냈다. 이제 다시 그가 나설 차례였다. "배심원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에서 한별이네 부부를 없애기 위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시든 글라디올러스 줄기 밑 부분을 움켜잡은 채 말했다. "응? 말도 안 돼!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잖아." "맞아.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뭘 해줬지?" 지혜가 머뭇거렸다. "그것들은 그냥 정원의 가장자리로 옮겨 심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요." "이제 어려운 부분이 남았어. 화분 말이야." "무슨 화분?" 지혜가 물었다. "장모의 혀는 약간만 손보면 돼." "뭐어?" 영철은 종종 거실의 산세베리아를 가리키며 잔소리를 많이 하는 장모의 혀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지혜가 장난스레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 영철이 휑하니 자리를 떴다. 이날 가지치기를 통해 영철과 지혜는 친구들과의 건강한 관계가 자신들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