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
이인호 지음 | 새빛에듀넷
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
이인호 지음
새빛에듀넷 / 2010년 5월 / 300쪽 / 15,000원
제1장 節慾(절욕) : 행복의 낙원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지요
순리에 따르는 삶우리 개개인의 생명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거의 대부분 국가나 사회의 큰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도가 중에서도 특히 장주는 그렇게 큰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생명이나 행복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개체 생명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즐겁고 행복한가 하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장주는 특별히 「양생주(養生主)」라는 글을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 숙고했습니다. '양생(養生)'이란 무슨 뜻인가 하면, 생명을 잘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근자에 많이 사용되는 '웰빙'이란 용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주가 제시하는 웰빙의 으뜸 조건은 무엇일까요? 장주는 소를 잡는 백정 이야기로 설명했습니다.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 잡는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손을 대고 어깨로 기대고 발로 디디고 무릎으로 받치는데, 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칼날을 움직일 때마다 사사삭 나는 소리는 너무도 운율적이었다. 소 잡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했고, 들리는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문혜군이 놀라서 소리쳤다. "하, 정말 대단해. 어떻게 기술이 저리 좋을 수 있단 말인고!"
백정은 칼을 놓으며 아뢰었다. "소인이 추구하는 바는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소인이 초창기 소를 잡을 때는 보는 소마다 온전한 소였습니다. 3년을 잡다 보니 그때부터는 모두 해체되어 보였습니다.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정신으로 대합니다. 이목구비의 감각적인 기능을 정지시키자 정신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인은 그저 소 몸속의 결을 따라 그 빈틈으로 칼날을 놀리고 사이사이로 길을 내는데, 모두 원래 소의 구조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섬세한 힘줄과 근육 그리고 뼈와 살이 복잡하게 엉킨 부위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데, 굳이 큰 뼈다귀를 칼로 쪼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상급 백정은 1년에 칼을 한 번 간답니다. 왜 1년에 한 번 갈까요? 칼로 베기 때문입니다. 일반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간답니다. 왜 한 달에 한 번일까요? 칼로 찍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19년째 수천만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여전히 새것입니다. 소의 관절과 힘줄 그리고 근육 사이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너무도 얇으니, 그 얇은 칼날은 틈새를 여유 있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19년 칼을 놀렸지만 숫돌에서 막 꺼낸 칼날처럼 얇습니다.
이렇게 노련하건만 근육과 뼈가 어지럽게 얽힌 부위를 만날 때마다 소인은 여전히 조심스러워, 마음을 칼끝에 싣고 칼날을 천천히 스치면 소 한 마리가 훌러덩 해체되어 흙이 땅바닥에 쏟아지듯 와르르 주저앉습니다. 이때 소는 자신이 이미 낱낱이 해체되어 죽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그제야 소인은 칼을 내려놓고 바로 서서 사방을 느긋하게 둘러봅니다. 곧이어 소인은 흡족한 마음을 수렴하고 칼을 거두어 고이 보관합니다." 문혜군이 탄성을 질렀다. "훌륭하네. 자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로소 양생의 도리를 깨달았네."
장주는 양생의 관점에서 백정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살아 있는 소의 복잡한 관절, 난해한 힘줄과 근육 그리고 얽히고설킨 살점 등은 명예와 이익에 혈안이 된 험악한 사회와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비유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다른 인간과 부대껴 살아가려면 어떤 태도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좋겠냐는 것입니다. 칼날이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으려면 관절, 힘줄, 근육, 살점 사이로 자연스럽게 칼질을 해야 합니다. 힘줄이나 근육 혹은 살점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고기는 고기대로 망가지고 칼날을 칼날대로 무뎌질 것이며, 심지어 관절을 잘못 건드리면 칼날이 나가거나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로 사람에게 치였다느니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칼날이 망가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할 때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는 좋을 게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매사에 순리대로 할 것이지 무리하게 강행해서는 안 됩니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꼭 후유증이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으면 힘든 일도 없습니다. 힘들지 않으면 짜증날 일도 없습니다. 짜증내지 않으면 성격이 밝아집니다. 성격이 밝아지면 설령 힘든 일이 생겨도 낙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는데 힘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힘들지 않으니 무리할 일도 없지요. 이런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마음의 여유는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즐겁고 여유 있는 마음가짐, 이것이 곧 웰빙의 기초가 아니겠는지요. 그러므로 무리하지 않으면 즐거움은 절로 오게 됩니다.
제2장 虛心(허심) :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송영자와 열어구라는 도사가 있었습니다. 장주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송영자라는 도사가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이 욕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내적인 마음가짐과 외적인 물질세계를 구별할 줄 알았고, 명예와 굴욕의 경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송영자는 세속의 폄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집착하지 않는 경지였다. 한편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다녔는데 무척 경쾌했다. 한번 나가면 보름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열어구도 행복 따위를 애써 추구하지는 않았다.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유람하기는 했으나, 그저 걸음을 면했을 뿐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소요유」)
우리 범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송영자나 열어구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남이 조금만 칭찬해도 좋아 죽고, 남이 조금만 비난해도 길길이 날뛰는 이 속세에서 송영자 같은 사람은 대단한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다닌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장주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머리와 마음에는 집착하고 싶지 않은 명예나 행복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열어구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는 했으나, 실은 바람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바람이라는 외부 조건이 없어지면 그간 날아만 다니던 열어구는 아마도 다리 근육이 풀려 기어다니기나 할는지요. 그렇다면 장주가 추구했던 자유는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자연의 변화에 따르며 무궁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외부의 조건이나 지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절대적인 자유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소요유」)
비단 장주뿐 아니라 옛 중국의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현대에도 자연재해에 대해 속수무책인 인류가 수천 년 전에는 얼마나 무력했겠습니까? 그저 순응하고 따르는 것만이 최선이었습니다. 이런 자연의 힘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한 사람들이 도가 사상가이며, 장주는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고 자연의 변화에 역행하는 일은 좋을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설령 문명사회에 살더라도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을 최대한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주는 무기, 무공, 무명을 요구했습니다.
'무기(無己)'란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 위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저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공(無功)'이란 업적이나 성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명(無名)'이란 인기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공과 무명도 어렵지만 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무기만 제대로 이룬다면 아마도 무공이나 무명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가지 없음을 성취한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문명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온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신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므로, 결국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셈입니다. 그러므로 장주가 생각했던 진정한 자유란 육신의 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명이 빚어낸 아집과 업적, 명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누리게 되는 정신적인 자유입니다.
우리도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달릴 때마다 그런 자유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진 자일수록 자유인이 되기는 힘들 듯합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 아집 때문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는 업적이나 성과나 명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유인이 되기 힘들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자는 비록 기독교나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불현듯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5장 3절)
여기서 '가난하다' 함은 재물이 부족한 빈곤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힌 지식이나 업적 그리고 성과나 명예 등등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하는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중국어로 된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허심(虛心)'으로 번역했더군요. '마음을 비운 자는 복이 있나니…….' 어떻습니까? 더욱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집, 지식, 업적, 성과, 명예 등등 세속적인 가치를 마음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십중팔구 빈곤하게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복이 있는 사람이지요. 이것은 마치 장주가 「대종사」편에서 '지상의 소인은 하늘의 군자'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마음이 가난한 자'란 장주가 말했던 그 자유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유인은 당연히 복이 있지요. 고민거리가 없는 이 속세가 그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요.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하면 그 빈자리에 평화와 행복이 깃든다는 뜻이겠지요. 현실의 구속을 떨치고자 멀리 여행을 떠나도 결국 당신은 현재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느니 마음을 가난하게 하면 몸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곧 유유자적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범인인가 봅니다. 자유인이 되기가 왜 이리 힘든지요.
제3장 餘裕(여유) :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우리를 숨 가쁘게 만드는 이 경쟁이라는 괴물은 당초 누가 만든 것일까요? 과학기술과 경제가 만든 것입니다. 과학기술이나 경제의 운영 핵심은 속도와 가격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빨리 처리하는 사람을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능력을 일컬어 '효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율을 둘러싼 경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효율을 다투는 세상에서는 시간이 가속됩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더욱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렇게 바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주는 기계식 두레박을 거부한 노인장의 우화를 이야기하며,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남쪽 초나라에 놀러갔다가 진나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음이란 곳을 지나가는 데 마침 노인장 한 분이 밭을 일구고 있었다. 노인장은 우물을 파고 들어가 물을 길어 다시 올라와 밭에 뿌려주고 있었다. 졸졸졸 물을 뿌리는데 힘은 들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자공이 말했다.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마지기에 물을 댈 수 있습죠. 힘은 별로 안 들고 효과가 크답니다. 어르신도 하실 마음 없으신지요?" 노인장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자공이 대답했다. "나무를 깎아 기계를 만드는데, 뒤쪽은 무겁게 앞쪽은 가볍게 해주면 물을 긷는 것이 마치 물을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끓어 흘러넘치듯 빠르게 들어올립니다. 흔히 두레박이라고 부르지요."
노인장은 화를 누르고 웃으며 대꾸했다. "내 스승께 들었다네. 기계를 만드는 사람은 편한 것만 찾는 마음이 있고, 편한 것만 찾는 마음에는 반드시 간사한 생각이 깃든다네. 간사하면 순수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면 정서가 불안해지지.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 도통할 수 있겠는가? 내가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수치스러워 안 하는 것이라네."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지」)
자공은 분명히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성이 좋은 과학기술을 이용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장은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효율을 추구하면 간사한 마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두레박을 이용하면 밭에 물을 주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그 절약한 시간으로 더 많은 밭을 경작하면 수확량이 늘어나서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끝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문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효율적으로 경작하는 노인장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농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도 따라서 두레박을 이용할 것이고, 심지어 더욱 개량된 두레박을 고안해낼 것이고, 같은 시간에 더욱 많은 농작물을 생산해낼 것입니다. 결국 순박한 농부들도 서로가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경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며, 그 결과 극소수만이 승자가 되고 절대 다수는 패배자가 됩니다. 사회적 자원은 승자들이 독식하므로 빈부 격차는 필연적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는 당연히 살아가기 힘들며, 부자라 해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빈부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상호간의 대립, 질투, 멸시, 증오 등의 악감정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 모두는 불만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삶이 아닙니다. 효율만을 따지며 경쟁하는 우리는 사실상 서로의 시간을 빼앗아가며, 영문도 모른 채 바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아봐야 결국 남는 것은 초조, 불안, 불만으로 피폐해진 심신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연의 속도, 즉 우리 본연의 속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제4장 自足(자족) : 자존심 높이 세우니 행복한가요?
재물이란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합니다장주는 난세에 태어나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장주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발적 가난'을 택했습니다. 장주가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사할 때 물건이 많으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특히 귀한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태백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했는데, 우리 모두는 지구에 잠시 들렀다가 떠나는 과객일 따름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무릇 과객이란 간편하게 다녀야 편하듯 우리의 삶도 덜 가질수록 자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는 삶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것은 장주만 설파한 것이 아닙니다. 송나라 때 곽상(郭象)이란 분이 지은 『규거지( 車志)』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유 씨가 있었는데 조그마한 절간에 얹혀살았다. 빈털터리였으므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절간을 청소하고 불상을 닦으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부자가 유 씨를 기특히 여겨 비싼 두루마기 한 벌을 선물했다. 그런데 두루마기가 생긴 다음부터 유 씨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유 씨는 외출을 해도 방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는데, 귀한 두루마기가 생기자 자물쇠가 필요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채웠지만 그래도 누가 자물쇠를 부수고 훔쳐갈까 걱정되어 종일 초조했다. 불안하게 며칠을 보낸 유 씨는 자신이 그리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가 단지 두루마기 한 벌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 씨는 미련 없이 두루마기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 두루마기가 없어지자 유 씨는 비로소 평온하고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