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신뢰
랠프 월도 에머슨 지음 | 이팝나무
자기신뢰
랠프 월도 에머슨 지음
이팝나무 / 2009년 10월 / 152쪽 / 10,000원
1장 당신 자신을 믿어라
얼마 전에 나는 저명한 화가가 쓴 몇 편의 시를 읽었다. 인습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시였다. 주체가 무엇이든, 그런 시는 인간의 영혼에 반드시 어떤 가르침을 준다. 시를 읽을 때 마음에 스며드는 감정은 그 시에 담긴 어떤 사상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기 마음속에서 진실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이라고 믿는 것, 그것이 천재天才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확신을 소리 내어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면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마음속 목소리를 듣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모세, 플라톤, 밀턴에 대해서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그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하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시인이나 현자賢者가 보여주는 천상의 광휘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가로질러 번뜩이는 빛줄기를 찾아내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기 생각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밀쳐버리고 만다. 우리는 흔히 천재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내던진 생각을 만나게 된다. 한때 우리가 품었던 그 생각들이 이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위엄을 띠고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 이것이다. 모두들 반대편에 서서 떠들고 있을 때야말로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자기 자신의 느낌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일 어떤 사람이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 우리가 늘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그럴싸하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들어야 하는 부끄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질투란 무지無知이고 모방은 자살이라는 것, 좋든 나쁘든 자기 몫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확신이다. 드넓은 우주가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애써 일구지 않는다면 내 몸을 살찌울 옥수수 한 톨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이다. 우리에게 깃들어 있는 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나 자신밖에 모르고, 그것도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어떤 얼굴, 어떤 성격, 어떤 사실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는 반면, 또 다른 얼굴이나 성격이나 사실에서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새로운 어떤 것이 기억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한 줄기 빛이 비칠 때 우리의 눈길은 그쪽으로 쏠려 특정한 그 빛줄기의 존재를 입증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하며, 하늘로부터 받은 신성한 관념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가 그런 관념을 조화롭고 선한 것으로 여기고 신뢰했더라면,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온전하게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비겁한 자를 통해 자신의 과업이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은 온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최선을 다할 때 활기를 얻고 즐거워진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해산이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재능이 그를 버리고, 뮤즈도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창조도, 희망도 사라진다.
누구든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사회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 불멸의 승리를 얻으려는 사람은 선善이라는 명목에 가로막히지 않고, 그것이 진정한 선인지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결국에 자기 자신의 정신적 고결함보다 신성한 것은 없다. 먼
저 자신의 무죄를 선언하고 자기 자신을 감옥에서 해방시켜라. 그러면 세계는 자연히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 세간의 존경을 받던 어느 조언자에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낡아빠진 교리로 나를 성가시게 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온 명령을 전적으로 따른다면, 신성한 전통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자 그 친구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은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나는 악마의 명령을 따르며 살겠네."
나에게는 내 본성에서 나온 율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선과 악은 단순히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 악으로 혹은 악이 선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오직 하나 옳은 것은 내 본성을 따르는 것이고, 오직 하나 그른 것은 내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모두가 반대한다고 해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허울뿐이고 덧없는 것인 양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배지나 이름, 거대한 단체나 죽은 조직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 생각해보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점잖고 말 잘하는 사람 앞에 있으면 나는 필요 이상으로 영향을 받고 동요한다. 하지만 몸을 똑바로 세우고 씩씩하게 나아가 언제라도 무례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악의와 허영심이 박애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면 눈감아주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 바베이도스에서 온 새로운 소식을 전하러 내게 왔다고 하자. 노예제도 폐지라는 그런 박애적인 임무를 띤 사람이 사실은 험악한 고집쟁이라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가서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나무를 패고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세요. 선한 마음을 가지고 겸손해지세요. 그런 미덕을 가지세요. 멀리 있는 흑인들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온정으로 당신의 냉담하고 무자비한 야심을 치장하지 마세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집에서는 악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거칠고 무례한 짓이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가식적인 사랑보다 훌륭하다.
우리가 품은 선의에는 얼마간 모가 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의 가르침이 울고 흐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의 가르침에 대한 반작용으로 증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내 천성이 나를 부르면, 나는 부모도 아내도 형제도 멀리한다. 나는 문설주에 '기분 내키는 대로'라고 써놓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의 의미가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것보다 좀더 나은 것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설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내가 왜 함께 있을 사람을 찾는지, 혹은 왜 혼자 있고 싶어하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늘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상황을 가져다주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내게 하지 마시라. 어째서 내가 그들을 떠맡아야 하는가? 나는 당신들, 어리석은 박애주의자들에게 말한다. 내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 내가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돈은 단돈 1달러라도, 1다임이라도, 1센트라도 나는 아깝다.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친근감을 느껴 나 자신을 사고팔아도 좋을 만큼 가까운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나는 감옥에라도 갈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의 그 잡다하고 흔해빠진 자선사업, 바보들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요즘 많은 사람들이 후원하는 그런 헛된 목적을 위한 공회당 건물, 주정뱅이를 위한 후원금, 수많은 구호단체들에 대해서는 다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나도 때때로 설득에 넘어가 그런 곳에 돈을 기부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악한 돈이다. 앞으로는 용기를 내어 그런 요구를 거절하려고 생각한다.
2장 만물의 중심이 되어라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이 분출하는 모든 의지는 자신의 존재 법칙 안에 국한된다. 안데스와 히말라야의 높이 차이가 지구상의 곡선에서 보면 사소한 것과 마찬가지다. 당신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시험하든, 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격이란 아크로스틱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시구와 비슷하다.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혹은 가로질러 읽으나 똑같은 철자가 된다.
지금 나는 신이 내게 허락한 숲속의 집에서 쾌적하게 지내며 참회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미래를 예상하지도,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날그날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게 그대로 기록하면 어떻게 될까? 의도하거나 확인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균형 잡힌 것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내 책에서는 소나무 향기가 풍기고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내 창틀 위에 사는 제비는 부리에 물고 온 실이나 지푸라기로 집을 지으면서 그것을 나의 문장 속에도 섞어 넣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성격이 의지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덕이나 악행이 공공연한 행동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순간 그것이 숨을 내쉬며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정직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면 갖가지 다양한 행위에도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동일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기에 겉으로 아무리 달라 보여도 그런 행위들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조금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다양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의 경향이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아무리 훌륭한 배라도 항해 도중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운항하게 된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가 지나간 물길을 바라보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직선 형태를 나타낼 것이다. 성실하게 행동하면 그 행위는 스스로 해명될 것이고, 당신이 행한 다른 모든 성실한 행동들도 자연히 설명된다. 하지만 순응하는 행위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라. 당신이 예전에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당신을 정당화해줄 것이다.
위대한 행위는 미래에 호소한다. 오늘 내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단호하게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예전에도 그렇게 올바른 행동을 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과거의 올바른 행위는 지금의 나를 정당화해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결국엔 항상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의 힘은 차곡차곡 쌓인다. 지난날에 행한 미덕의 힘이 오늘에 미친다. 정치가와 전쟁터의 영웅들이 갖춘 위엄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무엇이 인간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과거의 위대한 날들과 승리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그런 기억들이 한줄기 빛이 되어 지금 무대로 걸어 나오는 배우를 비춘다. 눈에 보이는 천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지켜주는 셈이다.
명예는 먼 옛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덕이다. 오늘날 우리가 명예를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예를 사랑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사랑과 경의를 붙잡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그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이에게 명예가 발현되었다 하더라도, 그 명예는 유서 깊고 순수한 혈통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알고, 모든 것을 발아래 두어야 한다. 세계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고아나 사생아 혹은 도둑놈처럼 이곳저곳을 엿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살금살금 숨어 다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은, 탑을 세우고 대리석에 신상을 조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에 상응하는 가치 있는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지 못하는 탓에 탑과 신상을 보면서 비참한 기분을 느낀다. 그에게는 궁전과 조각상, 값비싼 책이 자신과는 인연이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 화려한 마차 행렬처럼 느껴진다. 마차에 탄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며 "대체 누구신지"라고 묻는 것처럼 움츠러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그의 것이다. 그의 주목을 끌기 위해 청원하고 있으며, 그가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들을 소유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의 눈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은 그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이 그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을 바라며 호소하는 그림을 놓고 어떻게 할지 그가 결정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술주정뱅이에 대한 우화가 있다. 술에 취해 거리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주정뱅이를 사람들이 공작의 저택으로 옮겨서, 깨끗하게 씻기고 멋진 새 옷을 입혀 공작의 침대에 눕혔다. 그가 깨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며 그를 공작처럼 받들어 모셨다. 그러자 술주정뱅이는 자신이 진짜 공작이며, 그동안 정신이 살짝 나갔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우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일종의 술주정뱅이 상태에 있다. 하지만 깨어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자신이 진정한 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아무리 초월적인 지성의 소유자라도 다윗이나 예레미야, 바울의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감히 신의 음성을 들을 용기가 없다. 기껏해야 몇 권의 경전, 몇 사람의 인물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나 교사가 한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 어린아이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연히 만난 재능 있는 사람이나 인격자의 말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한다. 그들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그런 말을 한 사람들과 같은 견문과 학식을 지니는 경지에 이르면, 그제야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 말들을 기꺼이 놓아버린다. 이제 자신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산다면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다. 강자가 강해지는 것은 약자가 약해지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우리가 새로운 지각을 갖게 되면, 기억 속에 보물로 소중하게 쌓아두었던 것들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기쁘게 내던질 것이다. 우리가 신과 더불어 산다면, 신의 음성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나 곡식의 이삭을 살랑살랑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릴 것이다.
3장 혼자서 가라
가치 있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 아니다. 힘은 활동을 멈추고 휴식하는 순간에 소멸한다. 힘은 과거에서부터 새로운 상태로 옮겨가는 순간, 심연을 뛰어넘는 순간,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속에 존재한다. 영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 사실을 온 세상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과거의 가치를 영원히 떨어뜨리고, 모든 부를 가난으로 바꿔놓고, 모든 명성을 수치로 뒤바꾸고, 성인과 악한을 혼동시키고, 예수와 유다를 같은 쪽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기신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영혼이 존재하는 한 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언가에 의지하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하는 힘이다. 신뢰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피상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차라리 신뢰하는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자. 주체는 활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물의 원리에 나보다 더 순종하는 사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나를 지배한다. 영혼의 인력에 의해 나는 그의 주위를 빙빙 돌 수밖에 없다.
뛰어난 덕이 지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유연한 태도로 원리를 받아들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렇지 못한 도시와 국가, 왕, 부자, 시인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제압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대중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품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집에 머물면서 내면의 큰 바다와 교류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남의 항아리에서 물 한 잔을 구걸한다. 우리는 혼자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