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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스타일로 승부하라

헬게 헤세 지음 | 북스코프
처칠 스타일로 승부하라

헬게 헤세 지음

북스코프 / 2009년 11월 / 232쪽 / 12,000원



자신을 믿고 인정하라


윈스턴 처칠은 그의 유명한 선조 존 처칠(말버러 공작 1세)이 18세기 초에 지은 블레넘 궁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셌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엔 즉각 반응하며 행동으로 보여주곤 했다. 처칠은 일곱 살 때 가족이 모두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애스콧의 세인트 조지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그저 규정에 따르기보다 자기 확신에 따라 행동하는 바람에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 심하게 앓고 있었다. 결국 그의 부모는 그를 그 학교에서 빼내 처음에는 브라이턴 스쿨로, 나중에는 해로 스쿨로 전학시켰다. 여기서도 그는 예전보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매질을 당했다. 하지만 그도 여전히 저항적인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불행한 학창시절은 처칠의 가슴에 깊이 남았고 이후의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시기에 끈기 있게 저항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경험했다. 급우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관례에 따라 신사로 성장한 반면, 처칠은 인습이나 남들의 기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자유사상가로 발전했다. 그 역시 자신이 속한 계층의 생활방식과 전통을 사랑했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예로 그는 크리켓과 축구 경기에 동참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친구가 거의 없었다.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 처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고자 했고 자신을 믿고 인정하고자 했기에, 훗날 성인이 되어서 남들의 단호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뜻을 관철해 나가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매질과 외톨이 생활, 나쁜 성적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처칠은 학창시절뿐 아니라 나중에도 언제나 주변부에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30년대에 히틀러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을 비난하는 바람에 자신의 당 내에서조차 고립되었고, 의회 내에서도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1930년대에 그를 향한 비판의 핵심은, 남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이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독립에 반대하거나 히틀러의 부상을 줄기차게 경고한 것이 그랬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즉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덕분에 남의 비판에 마음을 열 수 있었고, 변화의 기회와 가능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칠의 풍부한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실행력, 모든 것이 결국 다 잘되리라는 낙관적 믿음도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과 자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원하는 일을 선택하라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자신이 전쟁 지휘관의 소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훗날의 삶이 증명하듯, 그는 결코 군인으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위계질서와 훈련의 속박, 명확하게 구분된 업무의 질곡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군이 제공하는 모험과 전투의 세계는 낭만적인 기질의 젊은이에게는 딱 들어맞았다. 그는 이제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환경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열광이 필요했는데, 열광과 열정은 평생 그의 행동 속에 깊이 낙인찍힌 근본 무늬였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 속에서 흥미와 이성, 상상을 일깨우지 않는 일은 배우고 싶지도 않았고, 배울 수도 없었다." 처칠은 자신이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자로 태어났고 지도자의 소명을 타고 났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이 상관으로서 지시 내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명은 그의 재능과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대로 처칠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 또 재능이 없다고 여기는 일이나 과제에는 힘을 허비하지 않았다. 결국 처칠에게 소명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고 잘하는 것을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에 맞추어 줄곧 새롭게 조절해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이 목표에 더 빨리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 길에 따르는 일시적인 불리함은 처칠에게 결코 걸림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예정된 숙명이 있다는 감정은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대다수 출중한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말이다. 그들은 이 감정을 토대로 자신들의 성공에 적지 않게 기여하는 모종의 자기 동력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어디까지 자기 동기 부여 요소이고, 어디까지 맹목적 아집인지는 밖에서 봤을 때는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처칠 역시 그런 숙명에 대한 감정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처칠의 경우는 숙명과 소명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숙명은 운명적인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예를 들어 숙명은 '나는 장거리 육상선수가 될 운명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에, 여기서 말하는 소명은 그것과 다르다. 소명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는 것이고, 자신의 힘에다 약간의 행운을 더하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의식적이건 본능적이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선택하고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다. 물론 그들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오류를 깨닫는 순간 신속하게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성공한 많은 사람은 성공 비밀을 묻는 질문에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합니다." 그건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명확한 목표를 정하라

1894년 12월 처칠이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군인으로서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처칠은 무슨 목표가 있었을까? 군인으로 출세하는 것은 아니었다. 목표는 정치였다. 군대에서 경력을 쌓는 것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고, 아울러 세상을 두루 경험하고 이런저런 모험적인 사건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1895년 2월부터 올더숏의 제4 경기병 연대 소위로 임관한 처칠은 당시 겨울철에 통상적으로 받는 두 달 반의 휴가를 특별한 것을 체험할 기회로 삼았다. 이 기간 다른 기병 장교들은 대개 폴로 경기를 하거나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처칠은 전쟁터를 찾았고, 쿠바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당시 에스파냐의 식민지이던 쿠바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반군과 에스파냐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칠은 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

우선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에스파냐 주재 영국 대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곧이어 많은 추천서가 힘을 발휘하여 종군기자로 쿠바 전쟁에 참가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한 일간지에서 전쟁에 관한 기사를 송고해 달라는 청탁까지 받아두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종군기자로서 전선에 나갔고, 드넓은 세상과 그렇게 열망하던 모험을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다. 또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넘김으로써 여행 경비뿐 아니라, 평소 사치스러운 생활에 드는 경비까지 충당할 돈을 벌었다. 집필 활동은 그의 문체를 날카롭게 단련했고, 고향에서 그를 일약 유명 인사가 되게 하였으며, 지적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처칠에게는 행위의 모든 요소가 상호 촉진하고 보완해야 했으며, 자신의 흥미에도 맞아야 했다. 만일 자신의 여러 목표에 모순이 있으면 그는 즉시 조화를 찾으려 했고, 장애가 있으면 다른 욕구나 목표를 위해서라도 극복하고자 애썼다. 이후 청년 처칠은 영국 제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전투와 전쟁만 골라서 찾아다녔다. 이른바 젊음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적 목표 의식은 교양과 지식을 계속 넓혀 나가고 저술가로서 경력을 쌓는 일에 우선적으로 향했다. 처칠은 자신의 이런 모험욕을 충족하기 위해 반복해서 휴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참모장교나 종군기자로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시샘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왜 하필 처칠만 예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 젊은이는 전선의 지휘관들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보고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지휘와 전략을 비판하고, 어떻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외부에 좋지 않은 이야기나 발설하는 그 통신원을 점점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새로운 전쟁터로 계속 나갈 수 있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집요함이 필요했다. 처칠은 전쟁터 파견이 처음 거부되었을 때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맞서 싸웠다. 심지어 어머니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어머니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1897년 처칠은 말라칸드 야전군과 함께 두 번째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접경지대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에 종군기자로서 참가했던 것이다. 처칠은 곧 자신의 기사를 실어줄 신문사를 수소문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다음엔 부대 상관들에게 갖은 약속들을 쏟아내며 휴가를 청원했고, 결국 뜻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는 신문 기사만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둔지에 돌아와서는 매일 점심시간에 참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같은 해 『말라칸드 야전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출간 즉시 크게 성공했다. 단순히 책만 많이 나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처칠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층의 이목을 끈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가령 왕세자 웨일스 공작은 처칠의 작품에 감격해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문학지들은 처칠의 사고 과정과 문체를 칭찬했다. 이 성공으로 처칠은 다음 단계로 과감하게 밀고 나갈 용기를 얻었다.

그 뒤 처칠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쟁에 참가하고 폴로 우승컵을 거머쥐고 나면 미련 없이 군대를 떠나 런던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페샤와르 전선에 배치되려고 노력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곳의 물리적 대결은 점차 협상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영국군이 곧 수단으로 출정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국의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원정대가 수단의 수도 하르툼으로 진격해서 이슬람의 메시아를 자처하는 알 마흐다의 추종자 무리를 쫓아낼 예정이었는데, 처칠은 기필코 이 행렬에 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칠의 참전을 결정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키치너 장군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에 처칠이 전쟁터로 나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또 일각에서는 책의 출간 같은 과외활동으로 돈까지 상당히 번 처칠에게 번번이 특혜를 줄 이유가 있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처칠은 이런 목소리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태도나 목표를 바꾸지는 않았다. 즉 처칠은 외부의 비판을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로 받아들이면서 지치지 않고 계속 목표를 밀고 나갔다. 몇 차례의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 처칠은 제21 창기병 부대에 배치되어 1898년 수단으로 출정했다. 그전에 자신의 기사를 실어줄 일간지를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사 송고에 따르는 보수도 쏠쏠했다. 그리고 처칠은 마침내 1898년 9월 2일 옴두르만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 전투는 역사상 마지막 기병 전투 중의 하나였다. 그 뒤 영국으로 돌아온 처칠은 불도저 같은 목표 지향성으로 다음 단계의 인생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현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했을 때 군에서 계속 소위로 근무하는 것보다 자유 저술가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기회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처칠은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몇몇 신문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은 뒤 수단 원정을 다룰 다음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처칠은 이후의 생애 동안 언제나 뚜렷한 목표 지향성을 유지했다.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면 즉시 다음 과제를 찾았고,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자 애썼다.

하지만 혹자들이 처칠의 약점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강한 목표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리까지 계획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칠의 입에서 단정적으로 이런 말이 나온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너무 멀리까지 내다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이 순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이라는 긴 사슬 속의 한 마디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칠은 하나의 목표에서 다음 목표로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호했고, 그 과정을 즐겼다.

주저 말고 실행하라

1899년 초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군대를 떠났을 때 처칠은 전적으로 저술가로서 얻는 수입에만 의존했다. 더구나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손을 빌리지 않기로 작심했기에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왕성한 실행력이었다. 처칠에게 실행력은 출세와 관련해서 단순히 계획만 세우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저술가로서 부지런히 신문에 기사를 싣고 수단 원정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는 동안에도 처칠은 최소한 그만큼 정성껏 정치적 경력을 쌓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올덤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시대 분위기는 오랫동안 정권을 잡은 보수당에 등을 돌리면서 서서히 자유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열정적으로 유세를 다녔다. 그러나 결국 고배를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패배한 자신과 곧 화해했다.

그해 가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는 한 신문사의 종군기자 신분으로 높은 보수를 받고 희망봉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종군기자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전쟁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장갑열차를 타고 가다가 보어인들의 매복에 걸렸다. 열차는 이미 파괴된 선로를 탈선하면서 집중포화를 받았다. 이 혼란 와중에 처칠은 즉각 지휘권을 잡아 장병들에게 열차를 수리하도록 독려했고, 복구된 열차를 이용해서 부상병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런데 남은 병사들을 구하려고 도보로 기습 장소로 되돌아가다가 적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4주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울타리 한 곳에서 감시병들이 한눈을 파는 틈을 이용해서 도주를 감행했고, 석탄 광산의 감독관이던 한 영국인 남자가 며칠 동안 처칠을 갱도에 숨겨주었다가 오늘날의 모잠비크에 해당하는 포르투갈 통치령으로 화물열차에 태워 보냈던 것이다. 그 사이 장갑열차가 습격을 받았을 때 처칠이 보여준 용감한 행동은 영국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대담한 수용소 탈출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영국 사회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포르투갈령에 안착한 처칠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지 않고 또다시 영국군에 합류했는데, 이번에는 남아프리카의 영국군 최고 사령관인 레드버스 불러 장군의 배려로 야전 지휘관과 종군기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처칠은 스피온 콥 전투를 위시해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보어인들의 저항이 서서히 무뎌지는 조짐이 보이자 최선봉에 서서 레이디스미스와 프리토리아로 진군했다. 그 뒤 처칠은 모험 욕구를 채운 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길로 눈을 돌렸는데, 이때 시대적 총애와 유명세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보수당 정부는 처칠에게 좀 더 안전한 승리가 보장된 사우스포트 선거구를 제안했으나, 처칠은 한 번 패배한 적이 있는 노동자 위주의 선거구 올덤을 선택했다. 행운의 별이 자신과 함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무난히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선거가 승리로 끝나자 처칠은 다음 목표, 즉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더구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가 절정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 12월 처칠은 미국을 돌며 수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고, 이듬해 1월에는 다시 영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2월 중순 마침내 강연 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그사이 적지 않은 돈이 모였다. 생계 문제를 해결하자 처칠은 이제 마음 놓고 정치 무대에 뛰어들 수 있었다. 1901년 2월 중순이었다. 그는 마치 예전부터 그 자리의 주인인 것처럼 당당하게 자기 의석에 앉았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자신의 첫 연설을 계획했고, 연설을 성공리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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