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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오빠 부자 동생

로버트 기요사키, 에미 기요사키 지음 | 명진출판
부자 오빠 부자 동생

로버트 기요사키, 에미 기요사키 지음

명진출판 / 2009년 10월 / 272쪽 / 13,800원



Part 1 '부자 오빠'의 길 찾기



'무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 / '선'과 '악'의 재발견 /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1962년 여름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그때 쏘아올린 원자폭탄이 하와이 제도 남쪽에 있는 작은 산호섬 크리스마스 아일랜드 앞에 떨어졌다. 바로 우리 옆 동네였다. 그때 우리 가족(부모님, 나, 에미, 남동생 존, 막내 여동생 베스)은 막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창 텔레비전 시청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이후 몇 시간 동안 온 세상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그 장면을 나는 부엌 창문 앞에 서서 생생히 목격한 것이다. 실로 엄청난 장면이었다.

우리 집안에는 사무라이 전통이 흐르고 있었는데, 핵실험의 현장을 목격한 후 내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기'와 '전쟁'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 이후 내내 '사무라이'나 '무사'에 대한 동경과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동경심이 나를 자연스럽게 사관학교로 이끌어, 1965년 킹스 포인트에 들어 갔으며, 1년 뒤 베트남 깜란만으로 학습 항해를 나가게 되었다. 1969년 나는 킹스 포인트를 졸업하고 3등 항해사가 되어 스탠더드 오일에 취직해 유조선에 승선했다.

항해를 끝내고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거리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히피들로 넘쳐났는데, 그들은 목이 터져라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내게는 그런 모습이 결코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으며, 집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그날 이후 나는 울컥 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고, 스탠더드 오일 사의 유조선 탑승원 직을 포기하고 나라를 위한 복무에 자원했다. 나는 빨리 나를 전쟁터에 보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 사이 나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비행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1971년 나는 좀 더 난이도가 높은 무장헬리콥터 탑승훈련을 받기 위해 웨스트코스트의 캠프 펜들턴에 들어갔다. 1972년 드디어 내게 전쟁에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져 나는 베트남으로 갔고, 항공모함에 배치되어 무장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1973년 1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강한 사람'이 되고자 전쟁에 자원했던 내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베트남전이 중반 이후로 넘어갈 때쯤 비로소 나는 이 전쟁의 뒤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핵심은 '돈'이었다. 내 나라 미국은 민주주의와 평화, 자유를 지키려고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밤늦도록 바다 한복판의 항공모함 위에 앉아 홀로 생각을 거듭해나갔다. 그동안 군대에 가기를 싫어했던 미국 청년들에게 품고 있던 내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나는 미군을 싫어하던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적군을 이해해버렸으니, 내게 이 전쟁은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그날 밤 나는 항공모함 갑판 위에 앉아 나 홀로 이 전쟁을 끝내고 있었다. 나는 곧 해병대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쟁을 경험하며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인간의 의지'에 관해서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영혼에 깃든 강력한 힘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인데, 나는 죽을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동료 병사들을 통해 그 사실을 체험했다. 우연찮게도 나는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사고를 세 번이나 겪었다. 그런데 세 번 다 약간의 부상만 입었을 뿐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은 동료가 둘이나 된다. 왜 나는 세 번이나 살아남았고, 그들은 단 한 번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세 번의 사고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살려 놨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가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 안에 내재해 있던 '소명'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인생은 그 힘을 꺼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가다 / 최악의 상태에서 주어진 변화의 끈

해병대 제대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와이키키 해변의 한 바에서 젊고 매력적인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퍼였고 과격한 히피족이었다. 나는 데이트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청했더니 그녀는 내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자신과 함께 어느 무료 강연회에 갈 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제니퍼를 따라간 곳은 EST(Erhard Seminar Training) 강연회였다. 곧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미모의 여성이 무대 위로 올라와 강연을 맡은 워너 어하드(Werner Erhard)를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는 몰랐지만, 당시 워너의 EST 강연회는 미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의 화려한 말솜씨는 청중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나만은 예외였다. 대체 뭘 배울 게 있다고 이렇게 많이들 모였을까 의아할 뿐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이때다 싶어 제니퍼에게 이제 그만 강연장을 나가 바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제니퍼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당신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라고요." "내가 왜?" "그동안 내가 당신을 왜 거절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너무 딱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여자들한테 늘 잘난 척하며 살고 있죠? 하지만 사실은 아주 못난 남자에요. 자신감은 바닥에다 언제나 거절당할까봐 전전긍긍하죠. 당신은 진짜 용감한 남자는 아니죠." "그래, 이제껏 찌질한 놈 만나느라 고생했어. 그만 갈게."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봐요. 로버트." 제니퍼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내 말 좀 들어봐요. 난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분명히 매력 있는 남자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제대로 관계 맺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늘 당신과 함께 온 거예요."

곧 제니퍼는 나를 끌고 접수대로 향했고, 결국 나는 35달러의 예치금을 내고 예비등록을 마쳤다. 그 다음 주부터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EST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변화는 2주 뒤에 찾아왔다. 훈련의 대부분은 '일치'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키는가'에 관해 얘기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자기 말에 책임지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찬사인지 깨달았다. 그후 나는 EST 프로그램의 열혈신도가 되어 2년을 더 참여했고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계발'을 향한 나의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한편 와이키키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호놀룰루의 제록스 사무실을 찾아갔다. 제록스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세일즈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제대를 한 다음 나는 '부자 아빠(로버트 기요사키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인물인데, 저자는 이 책에서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엄청난 부를 일군 친구의 아버지를 '부자 아빠'로 묘사했는데, 저자는 그를 통해 돈에 대한 철학과 태도, 사업과 투자의 원리 등을 배울 수 있었다.)'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일찍이 내게 기업가가 되라고 조언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의 하나로 세일즈를 배우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제록스에서 보낸 4년은 세일즈를 배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른바 '판매왕'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며, 그 결과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고, 그때부터 자기계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통해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전까지 나는 나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한 것은 출세가 아니라 소명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러 가지 공부를 하면서 우리 영혼이 평생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도 만나게 되었고, 재정과 관련해서 투자 강의와 사업기술 강의도 들었다. 나는 자기계발의 과정을 통해 신이 우리 모두에게 재능을 한 가지씩 골고루 부여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재능을 발견하고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즉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뒤 제록스에서 세일즈맨 생활을 정리한 후, 나는 경제 멘토인 '부자 아빠'의 조언을 받아들여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자 아빠'의 탄탄한 조언 덕분인지 나는 시작부터 승승장구해 백만장자급의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주변의 여러 미인들 중 한 여자를 골라 결혼했다. 그런데 1981년 나는 최악의 해를 맞이하게 된다. 사업이 망가지면서 파산을 하고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끝은 아니라는 생각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다시 일어설 방법이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1981년 '사업의 미래'라는 제목의 강좌를 듣게 되었다. 세미나 일정은 일주일간이었고 특별초청연사로 R. 벅민스터 풀러 박사가 참가했다. 끔찍할 만큼 지루한 행사였고 그만 가버릴까 하는 마음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그러나 인내한 덕분에 마지막 날 일생일대의 변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메시지는 '말'이었다. 말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것이 기본주제였다. 또 그는 우리 모두 각자 지상에서 해야 할 일, 품어야 할 목적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각자 신에게서 받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재능을 개발하고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내 머리는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짜르르했다.

내가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기계발을 꾸준히 해온 힘이었다. 만약 그러한 정신의 훈련이 없었다면, 나는 그때 노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다시 100만 달러를 벌어 완전한 재기를 이루기까지 나는 두 번 더 사업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내게 성공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온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몇 번 넘어졌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섰으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느냐이다.

지압요법을 받으러 가면 지압사가 정렬에서 벗어난 등뼈를 점검해준다. 만약 등뼈가 어긋나 있으면 기가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가는 곤란에 처하게 되고, 만약 생명력이 막히면 몸은 자연스럽게 퇴화하기 시작한다. 삶의 순환 역시 인간의 척추와 상당히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막혀 있는데, 이 막힘 정도가 심각하면 개인의 영혼과 신 사이의 기의 소통이 줄어들고, 신과 개인의 영혼 사이의 길이 막히면 개인적인 힘 - 행하고 창조하는 능력 - 도 감소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코치를 두고 있다. 나도 삶의 각기 다른 분야마다 여러 명의 코치를 두고 있는데, 코치란 우리의 힘을 찾아주고 영혼을 강화시키는 과정에 도움을 주어 그 영혼이 인생의 오르막길뿐만 아니라 내리막길까지도 내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해준다.

Part 2 '부자 동생'의 길 찾기



동화를 던져버린 소녀 /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들 / 책임감과 자아의 균형


나는 핵무기 실험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힐로에서 자라면서 성장기 소녀들이 모르고 지나가도 좋을 엄청난 모순의 세계와 마주했다. 그 후 내 머릿속에는 핵무기의 파괴력과 인간이 인간을 보다 빠르게, 더 많이 죽이기 위해 쏟아 붓는 엄청난 연구에 대해,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큰 먹구름이 되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시절의 체험은 내게 '우리 생은 원래 매우 아름답고 예쁜 것'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동화적인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게 했고, 이 세계에 대한 본질을 찾아 헤매는 철학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1966년 나는 빅 아일랜드를 떠나 오하우 섬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심리학과를 선택했다.

나는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그 무렵 나는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밥 머피, 잘생긴 아일랜드계 이탈리아인이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얼마 후 그는 뉴욕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1학년 여름방학 내내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한편 나는 대학 안의 구조화된 강의실보다 학교 밖 친구들과 그들에 관한 일로 마음이 쏠렸고, 점점 수업에 소홀해졌다. 그러다 2학년을 마치고서는 학사경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우선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내 관심은 히피 문화로 집중되었고, 1968년 난생 처음 하와이를 벗어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는 히피 문화의 산실이었고, 나도 그 흐름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짐을 꾸렸다. 히피 문화에 대한 내 동경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자라면서 우리 기요사키 집안이 사무라이의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비폭력주의 소신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혈통이지만, 나는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사무라이들이 품고 있는 정신, 즉 부당함에 대항해 정당함을 옹호하려는 마음, 핍박받는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 고결하게 평화를 수호하려는 의지 등 오랜 세월 사무라이들이 지켜온 기본 정신이었다. 나는 전쟁을 이해하지도 용인하지도 않지만, 평화주의자들에게는 그만큼 막강한 평화수호의지와 그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나는 호놀룰루로 돌아와 다시 대학 친구들과 어울렸지만 복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뉴욕에서 돌아와 있던 밥 머피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우리의 관계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968년 12월 나는 내가 밥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부모님께 고백을 해야 했다. 부모님은 오직 한 가지 선택만을 원하셨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내가 부모님께 이 문제를 고백한 이유는 '밥과 결혼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니라 '싱글맘이 되겠으니 그런 나를 부모님이 좀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 부분에 대해선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다. 1969년 2월 나는 밥과 결혼했고, 몇 달 뒤 에리카가 태어났다. 나와 밥은 뜨거운 나이에 만나 서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눴을 뿐 원하는 삶이 너무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만 확인했다. 우리는 별거를 거쳐 이혼으로 서로의 관계를 정리했다. 나는 싱글맘으로서 내 딸을 책임져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책임감과 자아 사이의 균형이었다.

그 무렵 정치에 도전했다가 크게 실패한 후 패배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내게 에리카를 남긴 것 이외에는 허무하게 끝나버린 밥과의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어우러져 거대한 상실감을 이루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너무 싫었다.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싶었던 나는 그 도피처를 '자연'으로 정했다.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있는 국립화산공원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라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으리라 기대했다. 거처는 내 손으로 해결했다. R. 벅민스터 풀러 박사의 설계에 따라 투명 플라스틱 판으로 된 측지 돔(내부에 기둥을 받치지 않고 만든 공 모양의 건축물)을 만든 것이다. 어린 에리카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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