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환상을 입혀라
니나 안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세상에 환상을 입혀라
니나 안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09년 9월 / 334쪽 / 12,000원
내 인생의 테마, 롯데월드 이야기
내 꿈을 담은 혜성특급혜성특급은 롯데월드에서 수행했던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또한 가장 많은 시간과 열정을 들인 작품이었다. 우주를 주제로 만든 실내 Coaster Ride '혜성특급'의 콘셉트를 프레젠테이션하자 롯데월드의 사장과 임원들은 매우 환영했다. 혜성특급의 총 공사비는 약 1,700만 달러였다. 대기업인 롯데 입장에서는 아무런 보증이나 담보도 없이 작은 개인회사에 1,700만 달러에 이르는 새 프로젝트의 디자인과 설계를 맡긴다는 일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롯데월드 사장과 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젊은 여자 하나를 믿고 그런 큰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내세우며 롯데 측에 간곡히 얘기했다. "앞서 엑스포 쇼에서 도망간 미국회사 사장을 대신해 전체 프로젝트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완성한 실적이 있다. 또 비록 작은 회사지만 미국에서 좋은 신용을 갖고 있으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100만 달러의 전문가보험과 은행 신용보증서를 제출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나는 우리의 정직한 열정과 건강이 곧 담보이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진심으로 얘기했다. 사장은 한참 고민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그런 열정과 성실함을 믿어볼게요.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상의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봅시다." 오로지 일에 빠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약 2년 후 '혜성특급'이 오픈했다. 그 후 2000년까지 나는 롯데월드의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과 미국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내 회사는 월트 디즈니 이매지니어링 출신인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인 디자이너 열다섯 명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의 회사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화적 관념적 차이로 인한 갈등과 비용을 줄이고 한국 실정과 요구에 맞는 디자인으로 롯데월드와 함께 동반 발전을 했다는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어색한 한국인롯데월드는 현재까지 18년에 걸친 인연으로 이어졌다. 사실 처음 롯데월드에 왔을 때 20여 년 만에 보는 한국의 모습들은 내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롯데월드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단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외양마저 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 모습에 당황했다. 실제 돈의 단위나 사회적인 분위기, 현재의 물정이 실감 나지 않았다. 또한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의 직장 분위기가 낯설었다. 언어 자체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 모든 낯설음은 한국을 자주 오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로 이어졌다. 한국이면서도 막상 한국인의 습관이나 문화, 대화법과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이상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식 예의 기준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많이 달라 혼동했다. 또한 모든 일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데 비해 나는 매사는 언제나 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빠른 직선로가 있음에도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게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나의 솔직한 표현과 커다란 웃음, 속마음이 드러나는 표정, 감정에 진실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유분방한 개성은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한국의 문화 속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언가 늘 존재했고, 최선을 다해도 결점이 되어 내게 되돌아왔다.
미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자 나는 어쩜 진정한 한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외롭고 당황했다. 한국인임에 분명하지만 미국식 생각과 업무습관에 더 익숙한 내게 사실 롯데월드와의 업무 기간은 문화 차이로 인한 많은 갈등과 함께 개인적인 처신에 있어서도 실수의 연발이었다. 문화적인 갈등은 인간적인 결점으로 취급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반감을 갖는 직원도 늘어났다. 인간적인 실수가 많았지만 자부할 만한 사실은 나와 우리 회사의 미국인 직원들이 수행한 롯데월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단지 콘셉트 디자인에 그쳤던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 현실화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전체 매출이 늘고 인기와 질적 향상에 기여한 점도 있다는 것이 나를 위로했다.
신데렐라의 매직 캐슬과 어드벤처내게 있어 롯데월드를 단순한 일터나 프로젝트, 또는 최고의 테마파크로 한정 짓는 건 뭔가 부족하다. 내 인생의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을 차지하고 있는 긴 '삶의 과정'이었다. 그 기간은 미숙했던 비즈니스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크고 작은 업무적 실수를 저질렀던 시간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에 있어 잘못된 판단과 언행 실수가 이어졌던 시간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일뿐 아니라 때로 나 자신마저도 내 삶에 일어나는 많은 것을 불신하고 갈등하면서 '그렇기에 산다는 일은 어려움 투성이'라는 사실을 배워갔다. 지나간 일은 늘 부끄럽지만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에게 떳떳한 것이야말로 자신과 남에 대한 최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어쨌든 롯데월드는 나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고, 함께 많은 꿈을 나누었으며, 인생의 가치관을 새로 배우게 해준 소중한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돼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롯데월드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미국을 포함한 세계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게 롯데월드는 한국 최고의 테마파크라는 의미를 넘어 내 인생의 새로운 세계, 미래의 시간으로 들어서게 해준 하나의 어드벤처였고, 신비한 신데렐라의 매직 캐슬이었다.
내 인생의 스토리, 뻔한 여자의 Fun한 이야기
어학, 내 미래를 이끌다중학교 2,3학년을 거치면서 영어 교과서를 전부 외우던 나는 어느덧 더욱 영어에 자신이 붙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영어 잘하는 아이로 통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집 근처에는 외국 신부들이 생활하는 메리놀 성당과 집이 있었다. 가끔 그 집 앞에서 외국인 신부를 만나기도 했는데, 마주칠 때마다 나는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 집 현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낯선 외국인이 문을 열고 내게 물었다. "May I help you?" 나는 다행히도 이 말을 알아들었고 더욱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이웃에 사는 중학생인데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문을 열어준 외국인은 웃음 띤 얼굴로 들어오라며 나를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자 한 미국인 신부가 들어왔다. 신부는 자신을 파더 아이크만이라고 소개한 후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때로 읽어보라며 단편소설 한두 권씩 책을 주셨다. 아이크만 신부님은 내가 대학 입학 후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가까운 친구로 머물렀고,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영어에 대한 흥미가 계속 이어져 영문과 진학을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 배우기 시작한 불어는 영어보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열아홉 살, 하늘을 날다1970년대 초반 대학 1학년이던 열아홉 살에 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랑스로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막 대학을 입학한 상태였지만, 학교보다는 유학을 위해 조금의 돈이라도 벌려고 백방으로 헤매고 있던 참이었다. 쟁쟁한 대학을 졸업한 한국의 모든 미인들이 모여 있다는 당시 승무원 모집광고에는 외모와 학력, 나이 등 여러 가지 자격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조건에 해당하는 사항이 한 가지도 없었지만 나는 무조건 응시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40명 모집에 무려 1,600명이 응모를 했다는 입사시험은, 무려 5차례에 걸쳐 매번 반씩 추려내는 길고 긴 과정이었다. 그 해말 최종면접을 끝으로 승무원에 최종 선발되었다. 어느 자격조건에도 맞지 않았던 나를 항공사에서는 오로지 불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뽑았던 것 같다. 나는 입사 동기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열아홉 살이었다. 승무원 생활을 계속하면서 파리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동남아 각국과 일본 등을 비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더 많은 나라들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실리콘 밸리에서 당시 벤처 사업을 하던 젊은 재미 교포 애인을 만나면서 파리와 만난 감격을 금세 잊고 결국 미국으로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블루 하와이〉라는 영화처럼 환상으로 다가온 내 애인은 나를 미국의 여러 곳으로 안내했다. 갓 스물의 나이에 경험하는 경이로운 세상을 마치 비디오를 찍듯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저장했다. 결국 나는 파리의 제3대학 대신 결국 미국을 선택했다.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냈다.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각국 비자를 반납하고 미국 유학 비자를 신청하자 미국 대사관의 영사가 물었다. "이미 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굳이 유학 비자를 신청한 것은 반드시 유학이 목적이겠죠? 하지만 미국에 간 후 혹시 결혼을 하는 건 아니겠죠? 저와의 비자 약속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유학은 당신과의 약속이기보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미국 영사는 웃으며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부디 당신과의 약속, 인생의 약속을 꼭 이루길 바랍니다." 1970년대 중반 스물한 살 때의 일이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 하와이 부둣가 술집의 눈물내가 입학한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톨릭 사립대학이었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한국의 고3처럼 공부를 해야만 했다. 적당히 공부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가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를 실감하는 순간부터 학교생활은 점점 힘들어져 갔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와 언어장벽은 점점 더 두꺼운 벽으로 느껴졌다. 또한 낯설고 어려운 미국생활에 적응해가는 긴장감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믿고 의지했던 내 애인은 유학생활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주고 떠났다. 내게 거짓으로 일관하다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린 그의 위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헤어짐보다 더욱 어려웠던 일은 '그를 믿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치욕'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졸업까지 5년간 나는 사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를 암울하고도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실연의 상처와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도 찾아왔다. 당장 다음 학기 등록을 하지 않으면 이민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이 내려질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내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인 아주머니 한 분이 하와이에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하니 하와이로 오면 방학 동안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아주머니는 자신이 운영하는 부둣가 술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항구에 닿는 일본인 뱃사람들을 위해 하루 저녁 단 두 시간만 그저 앉아있어 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아주머니는 나를 설득했다. 밤이 되자 일본인 선원들이 찾아왔다. 아줌마는 나를 4명의 선원들 사이에 앉게 했다. 나는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화할 의사도 없었다. 그저 미국까지 유학을 와서 졸지에 술집 아가씨로 변해버린 참담한 내 처지가 한심할 뿐이었다.
이렇게 학비를 벌어 공부해서 학교를 마치면 도대체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내 인생은 어떤 가치를 갖고, 누구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와 산다는 일이 구차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느껴졌다. 술자리에 앉은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곧장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깔린 부두를 미친 듯이 달렸다. 그날 밤 와이키키 바닷가를 밤새도록 걸으며 울며 밤을 지샜다. 나를 야단치던 아주머니는 다음날 혀를 차며 하와이에서 유명한 알라모아나 쇼핑센터에서 원피스 한 벌과 샌들 한 켤레를 사 주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좀 좋을까. 안 되는 게 팔자다. 그만 돌아가거라." 그날로 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다시 꿈을 키웠던 교포 신문사어느 날 서울에 있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빠 친구가 살고 있으니 연락해 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얼굴도 모르던 친구 오빠의 지인을 통해 나는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지국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신문사에서 현지 교포소식을 넣는 간지에 실을 기사 내용을 쓰거나 광고를 싣고 사진 작업, 편집 등을 담당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가운 회색 안개는 1년 내 으스스한 추위로 떨게 했다. 나는 늘 서늘한 추위에 떨며 내 속의 또 다른 나와 쓸쓸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도 결국 지나갔다. 시간이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한 챕터가 끝났지만, 새로운 챕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런 글귀를 노트에, 책갈피에, 방의 벽에 붙여 놓았다.
인문학 과목을 끝낸 후 나는 본격적으로 미술학교에서 미술 실기와 디자인을 공부했다. 매일 아침 커다란 이젤 보드와 종이, 미술 도구 박스를 들고 만원 버스를 탔다. 미술학교 수업은 누드화와 디자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그림과 디자인이란 결국 자신의 생각의 표현이었다. 마음에 담아둔 그리움이나 사랑, 상처와 아픔, 소망과 꿈을 표현하는 작업은 세상을 향해 내는 나의 작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비록 접어두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언제나 살아 꿈틀대는 의지, 나도 살아있다는 외침, 내가 지금 아프거나 슬프거나 기쁘다는 말보다 더 진한 표현, 그림 그리는 순간은 내게 있어 언제나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첫 취업의 꿈을 이루다198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LA로 이사를 왔다. 마침 LA 교육국이 운영하는 한인 타운의 한 학원에서 영어를 못하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여름학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방학 동안 임시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교사 일은 아파트 월세와 자동차 할부금을 내고 나면 먹고사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봉이었다. 전화번호부에 실린 A부터 Z까지의 모든 건축설계 및 인테리어 회사와 《LA 타임즈》 구인란에 실린 모든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한 곳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블록스라는 고급 백화점의 자체 설계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3개월 후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우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나는 디렉터인 짐 터커 씨에게 참담한 심정으로 당장 일을 해야만 하는 내 처지를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듣자 잠시 기다리라며 방을 나갔다. 한참 후 돌아온 그는 주소와 약도를 상세히 적은 종이쪽지를 건네주며 내일 당장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가 적어준 곳은 뜻밖에도 워커 그룹이라는 건축설계회사였다.
다음 날 워커 그룹으로 찾아가자 데니스라는 디렉터는 터커 씨로부터 나에 관해 이미 다 들었다면서 다음 주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새롭게 얻은 직장은 내 인생의 역사를 다시 쓸 전환점이 되었다. 가난과 절망으로부터 나를 구했으며, 전문직으로 평생 같이 할 커리어를 시작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알고 지내는 미국 주류사회의 많은 미국인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과 직장생활, 제도와 경제 등 미국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일을 통해 비로소 삶의 보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 가치와 의미를 다시 찾음으로서 새로운 비전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스스로를 신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내가 만일 그때, 그 어렵고 지쳤던 긴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한 꿈을 끝내 포기했더라면 내게 그런 기회가 왔을까? 과연 터커 씨는 내 상실한 빈 마음을 이해하고 나를 무작정 믿어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