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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

김혜경 지음 | 글담출판사
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

김혜경 지음

글담출판사 / 2009년 6월 / 287쪽 / 12,800원



크리에이터는 크리에이티브하게 살지 않는다 1

폴의 골목에서 광고 크리에이터 김혜경이 살아가는 이야기



유행을 좇지 않을 용기




그곳은 다다미 4장 반 크기의 조그만 찻집이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광고 JR동해의 '교토로 가자' 캠페인 중 한 편의 카피다. 주옥같은 많은 시리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굳이 꼽으라면 이 세 줄. 단 세 줄의 문장에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다니 이 정도면 광고가 아니라 예술이다.

예전에 세계 1위의 광고대행사 덴쯔에서 한 달 동안 연수했을 때 이십 년 동안 이 캠페인의 카피를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오타 메구미(太田惠美) 씨. 소박한 니트 스웨터와 긴 치마, 짧은 생머리,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이를 알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쉰이 넘도록 여전히 카피라이터로 조용조용 일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뭔가 유행을 찾아 따라다니며 좌우충돌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인생에 있어서 넓이와 깊이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것. 어떤 것을 추구할 것인가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지만 진짜가 되려면 조금 더 깊이의 편에 서는 게 좋다.

싸움판에서 진짜 고수들은 현란한 동작을 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방의 급소를 찌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오타 메구미 씨는 고수 중의 고수다. 오타 메구미 씨의 또 다른 카피를 보면 어떻게 늘그막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요즘 유행이 아닌 것 같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哲學의 길.



잠시 꺼두어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 없어요

광고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 능한 사람이 잘한다. 어디 광고만 그런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만든 걸작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면 목사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작문을 연습시키는 장면이 있다. 반으로 줄여라, 반으로 줄여라를 거듭하다 급기야는 두어 줄 정도로 줄여진 작문을 "흠, 좋아. 그럼 휴지통에 버려"라고 한다. 열심히 썼던 작문을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휴지통에 던져 버리곤 신나서 강으로 달려가던 어린 아들의 뒷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글도 그림도 더 나아가 인생도 똑같다. 꾸미고, 덧칠할수록 추해진다. "임팩트를 높여 주시오" 이렇게 요구하는 광고주들의 본심은 '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거든'일 경우가 많다. 임팩트를 높이는 가장 고급스런 방법은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순함을 무기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면 금상첨화다. SK텔레콤의 광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캠페인은 "당신의 대표작이 뭡니까?"라는 질문에 별 주저 없이 내놓는 광고 중 하나다.

단순화, 역발상, 상대방의 허를 찌르기 등 고수의 기법을 이용해 일대 혼전을 거듭하고 있던 이동통신 시장을 단숨에 평정해버린 광고였다. 사실 그건 내 숙제가 아니었다. SK텔레콤은 우리 팀이 아닌 옆 팀의 광고주. 열 번이 넘도록 시안을 퇴짜 맞자,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고 그 불똥이 나한테로 튄 거다. 어쨌든 나는 제3자 입장이고 내 광고주가 잘릴 일도 없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꺼두어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 없어요'라는 엉뚱한 발상을 했다. 컴맹에, 기계치에, 완전 아날로그인 내가 디지털 기술의 총아인 이동통신에 관한 걸 알 리 만무하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011, 018, 019, 017들이 서로 자기네 휴대폰이 잘 터진다고 싸우는 꼴이 너무 싫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당시만 해도 매너모드도 없었고, 발신자표시 기능도 없던 초창기 시절, 여기저기서 울려 대는 휴대폰 소리는 공해였다. 그래서 잠시 꺼놓을 수 있는 여유 좀 부리고 살면 어디가 덧나냐, 뭐 그런 식의 안을 만들었다. 사실 광고주가 그런 느긋한 안을 살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주 높은 분 중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지 그 안으로 선정, 덜컥 빛을 보게 된 거다.

사실 역발상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잘 시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는 법. 리스크가 큰 만큼 성공했을 때는 얻는 것도 많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광고장이는 죽어서 광고 한 편을 남긴다, 라고 한다면 나도 할 일은 한 셈인가.

80대 시엄마와 40대 며느리가 같이 늙어 간다는 것

•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잠깐 낮잠이 들었나 했는데 밖이 깜깜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평소 때 같으면 귀가 어두운 어머니가 틀어 놓으신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가 쩌렁쩌렁할 텐데 집 안이 조용하고 싸늘했다. '어디 가신 거지?' 슬며시 걱정이 돼서 형님네로, 친구 분네로 전화를 해보니 안 오셨단다. 갑자가 가슴이 덜컹했다. 동네라도 찾아봐야겠다 싶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찬 시멘트 계단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아니, 어머니 왜 여기 계세요?" "응, 너희들 깰 까봐 초인종을 누를 수가 있어야지. 어이구 다리야, 뼈마디가 쑤신다." 세상에! 아들, 며느리가 초인종 소리에 낮잠에서 깰까봐 2시간이 넘게 계단에 앉아 계셨다니. "어머니, 이게 말이 돼요. 이웃 사람들이 알면 뭐라겠어요. 어머니 이러시는 거 하나도 안 고마워요." 속이 상해서 그냥 퍼부었다.

• "어미야, 여기 있던 물냉면 못 봤냐?" "네,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렸는데요." "아니, 먹고 싶어도 혹시 승윤이가 찾을까 봐 일부러 아끼고 안 먹었는데…." "상한 거 먹고 배탈 나면 병원비가 더 들어요." "늙은이가 있는 대로 홀랑 먹어 치우면 되냐. 나는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으니 버리지 마라." 이틀이 멀다하고 어머니와 이런 실랑이를 한다. 먹다 남은 반찬, 유통기한이 지난 어묵, 즉석 우동 같은 것들은 치워도 냉장고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고부간의 분쟁거리를 만든다.

이렇게 두 여자가 티격태격, 툭탁툭탁 한 지가 십칠 년이다. 친정엄마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시어머니와 살았다. 사실 두 여자가 툭탁거리는 이유의 8할은 '여자'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온 여자, 아니 여편네란 존재는 먹다 남긴 찬밥 같은 것이다.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귀찮고. 하지만 어머니의 이런 희생 때문에 난 이십오 년 동안 온전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일생은 내게 빚으로 남았다. 절대 갚을 수 없는.

아이든 어른이든 진심은 통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들 녀석이 면도기를 찾는다. 그리고 슬그머니 방문을 잠근다. 모든 대화는 "예", "아니오", "괜찮아요." 이 세 마디로 응축한다. 어이쿠, 하는 심정이 된다. 꽉 막힌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남편과 나를 '꼰대' 취급한다. 사춘기의 막바지에 들어선 녀석과 친한 척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렵다. 이럴 땐 채찍보다 당근이다. 녀석의 정보 채집을 위해 싸이월드를 급습했다. 오홋, 녀석의 별명은 권상우, 매일 밤 운동이랍시고 풋샵을 하더니 권상우의 '왕' 자 복근을 만들려고 그랬나 보다. 싸이월드엔 펑크록 뮤지션들의 음악과 정보들이 잔뜩. 녀석이 아무리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엄마의 손바닥 안이다.

모델에이전시 사장에게 졸라 예매 첫날 2시간 만에 매진되었던 조승우의 뮤지컬 <헤드윅> 티켓 두 장을 어렵게 구했다. 가끔 '썩소'나 씨익 짓고 좀처럼 감정 표현을 안 하던 녀석이 화들짝 반색한다. 미리 인터넷 검색으로 예약한 대학로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폼 나게 저녁을 먹고 학전소극장으로 갔다. "엄마, 내 옆자리에 강혜정이야. 얼굴이 손바닥만 하네." "근데, 엄마. 희한하다. 관객들이 전부 여자들이야." "우와 조승우, 진짜 록커 같다!" 좀처럼 입을 떼지 않던 녀석이 수다스러워졌다. 그렇게, 열일곱 살의 소년과 마흔다섯 살의 여인의 마음이 통했다. 머리 한복판이 뜨뜻해지는 감동을 간직한 채, 길거리 노점에서 초콜릿 시럽 와플을 사먹은 후, 공연장에서 구입한 <헤드윅>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캄캄한 밤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김치만두 12개를 쪄서 간장에 찍어 먹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아들이 과묵해지는 건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는 건 또 다른 자기와 치열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 그런데 사실 이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녀석은 말 안 듣는 애인처럼 수시로 나를 안달복달하게 하지만 그래도 헤어질 걱정이 없는 좋은 애인이다.

함께 나이 드는 즐거움, 폴의 골목

• 시누이들과 함께 땅을 사고 함께 집을 짓는다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모자란 인간도 있다. 시댁 식구와 함께 모여 산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물론 앞에선 "와, 대단하다"라고 말하지만 '어이구, 저런 철딱서니를 봤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쯧쯧…'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친언니들도 아닌 시누이들과, 더구나 집 세 채가 나란히 연결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앞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 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님들도 마찬가지다.

양평에 먼저 땅을 산 건 막내 형님네였다. 벌써 오 년 전이다. 온 나라가 부동산 투기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막내 형님네는 거꾸로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팔아 300평 정도의 땅을 사서 주말마다 텃밭을 가꾸고 집 지을 궁리를 하셨다. 나와 남편은 호시탐탐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었지만 회사를 접을 수도 없고, 그저 빨리 늙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형님으로부터 양평은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웬일, 얼씨구나 하고 곧바로 동참했고, 둘째 시누이네는 얼떨결에 "나도요!"를 외쳤다. 그렇게 의견 일치를 보는 데에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 집을 짓는 데는 꼬박 삼 년이 걸렸다. 집을 지어 가는 과정은 우리가 늙어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 데에 익숙해지고, 부당한 일들을 참아내게 되며, 욕심을 줄이는 방법을 알게 된다. 집을 지으면서 우리 가족들은 덧셈과 뺄셈에 익숙해졌고, 조금씩 약아지면서 현실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에도 "세상에 본성이 나쁜 사람은 없다"라고 서로를 다독였다. 집은 될 듯, 안 될 듯 조금씩 늑장을 부리며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 이름은 첫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다. 세 가족이 모여 살면서도 전원생활의 외로움을 걱정한 우리들은 2층에 방 하나씩을 만들어 펜션을 하기로 했다. 이름을 뭐로 할까, 명색이 카피라이터인 내가 책임져야지. 으쌰! 블루베리사운드, 브라더 앤 시스터즈, 게스트하우스 경(境) 등 수십 개의 시안을 놓고 며칠을 끙끙대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건 '폴의 골목'이다. 사실 폴은 우리 집 개 이름이다. 심성이 착해 맹인견으로 유명한 골든 리트리버인데 겉으론 순한 듯 보여도 녀석은 엄청 엉큼하고 짖궂다. 생각이 많은 개라서 그렇다고 가족들은 우기지만 아무래도 녀석은 생각 따윈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그저 이 골목, 저 골목 신나게 뛰어다니는 팔자 좋은 녀석이다.

• 건축가 승효상 씨는 집은 불편할수록 좋다고 한다. 문만 열면 한 번에 해결되는 아파트식 공간은 편리함을 주는 대신 '생각'을 없앤다. 나가서 대문을 열어 주고, 신발을 신고 뒤뜰로 나가 흙을 밟고, 수돗가에서 발을 씻고, 마당에서 불을 지피며, 빗자루로 쓸고 닦으면서 '생각'이란 걸 하면서 살 수 있는 집, 그런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폴의 골목은 좋은 집이다. 여기저기 '공간'들이 숨어 있어서 생각을 즐기기에 좋다. 햇살을 가두는 중정과 뒷산을 담는 후정, 세 가족을 이어주는 물길, 작고 큰 창들과 통로들이 가득하다. 우리 가족이 스페인 여행에서 보았던 세잔느의 아틀리에처럼 가꾸지 않은 잡목 사이로 햇빛이 가득하고, 좁은 골목들 사이로 낮은 벽돌이 서로 어깨를 기대는, '폴의 골목'은 그런 곳이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내일을 걱정하고 십 년 후를 걱정한다. 오늘이 없으면 내일도 없고 지금이 없으면 다음도 없다는 단순한 이치를 순간순간 잊어버린다. 폴의 골목 중정엔 '소원하는 검은 곰'이 있다. 마치 엎드려 무언가를 빌고 있는 듯한 동물의 형상을 한 커다란 검은 돌의 별명이다. 그 돌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면 무심한 듯 구름이 흘러간다. 그저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의 골목에서 딱 하루씩만 행복해하면서 늙어가고 싶다고. 어쩌면 그건 엄청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그 하루가 모여 평생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죽을 때까지 행복해하면서 살게 될 테니까.

너무 낯설지도 않고 너무 낯익지도 않아서 좋은 것들

• 퀼트 - 단순 노동은 몸에 이롭다. 바느질에 몰두하다 보면 정신의 공백 상태가 생긴다. 한 땀 한 땀 손이 가는 대로 생각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잡념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대학 1학년,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 나도 성남의 의류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던 적이 있다. '노동 계급 해방'이란 거대한 명목 아래 '의식 개조 활동'이란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웬걸, 새벽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오른팔 접고 왼팔 접고 아랫단 접어 올리고 깃 내리는 순서에 입각해 옷을 개키다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밥 먹고 일하고, 밥 먹고 일하고…. 겨울방학 두 달 동안 노동자들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개조되었고, 이념과 현실의 거리감에 대해 명백한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 경험은 나쁘지 않았다. 책상물림들의 우월감이 얼마나 치기 어린 것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얻은 깨달음이 단순 육체노동은 삶을 건강하게 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원리로 바느질은 괜한 정신노동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화이트컬러들에게 더 없이 좋은 취미생활이다.

비행공포증은 나의 오랜 지병이다. 고소공포증과 폐쇄공포증이 복합적으로 얽혀 남들이 좋아라 하는 해외 출장이 나에겐 치명적인 고통이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의자를 꼭 부여잡는 꼴이라니. 너무 바보스럽다는 걸 알지만 미세한 떨림에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수면제도, 보드카도, 우황청심환도,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다. 칸 국제광고제에 참석차 파리로 가던 날, 불안 초조로 거의 초죽음이 되었다가 '에라, 모르겠다'라고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찾아 낸 천 몇 조각과 스튜어디스 언니를 꾀어 얻어낸 바늘과 실로 얼기설기 바느질을 하다 보니 슬그머니 요동치던 심장이 잔잔해졌다.

도대체 비행공포증과 퀼트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 도리는 없다. 세상일이 꼭 앞뒤가 맞으라는 법은 없는 것처럼. 그러나 나의 심장은 잔잔해졌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 이후로 비행기는 나의 퀼트 서재다. 간이 테이블에 천 조각들을 잔뜩 늘어놓고 꿰메고 있으면 스튜어디스 언니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머, 너무 예쁘다." "솜씨가 너무 좋으세요." 남의 속도 모르고 칭찬을 한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얼굴이 창백한 걸 볼 수 있을 텐데. 어쨌든 비행공포증의 결과로 여행가방 3개, 인형 2개, 블랭킷 1개, 파우치 2개가 탄생했다.

• 클래식 기타 - 이병우의 기타 콘서트를 보러 간 날, 그가 한 손에 기타를 들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무대로 입장했다. 소아마비라는 정보를 들은 적이 없어서 내심 놀랐다. 멋쩍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의 첫마디가 이렇다. "저는 한 번도 남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없습니다." 객석에서 와아, 하고 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아픔을 저토록 시니컬하게 객관화시키기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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