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아나운서 윤영미의 열정
윤영미 지음 | 경향미디어
열정
윤영미 지음
경향미디어 / 2009년 5월 / 268쪽 / 12,000원
PART 01 좌충우돌, 윤영미 만들기 프로젝트
꿈은 이루어진다창덕여고에 진학해서 나는 방송반 활동에 온통 열정을 쏟아 부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방송'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방송축제를 위해 MBC, TBC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겁도 없이 연예인들에게 녹음기를 들이댄 적도 있었고 근처의 남자고등학교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예쁜 엽서를 모아 그 당시 유행하던 '예쁜 엽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청량리 지하철 역장님을 찾아가 지하철 안내 방송을 하겠다고 떼를 쓴 적도 있었다. 그때 역장님 말씀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지하철 내에서 여자가 방송하면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니, 대신 청량리역 구내방송을 하라는 것이었다. 화가 났지만 나로서는 참고 넘어갈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인천행 열차가 도착할 예정이오니, 승객들은 뒤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한 달을 꼬박 구내방송을 시작했다. 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역내 방송을 한 1호 여성이 바로 나였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꿈을 자랑하라 : 나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모두 이룰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행운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행운보다는 어릴 적부터 수천 수백 번 주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두고 봐요. 나는 꼭 아나운서가 될 테니까!" 내가 아나운서가 된 것은 결국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무수히 내뱉었던 말을 책임져야 했기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쓰고, 말하고, 외쳐라! 우주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좌충우돌 새내기 아나운서!마침내 어릴 적부터 꿈에서도 그리던 아나운서로 첫 출근을 한 날, 나는 춘천 MBC 방송국 로비에 들어서며 속으로 외쳤다. 내가 '10살 때부터 꿈꾸던 아나운서가 아닌가? 반드시 최고의 아나운서가 될 거야, 윤영미 파이팅!'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웬걸. 자신감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실수를 할 때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는 것은 기본이었다. 개중에서 제일 끔찍했던 기합은 바로 말끔한 정장 차림의 동기 셋과 회의실에서 나란히 선 채 팔 들고 있기였다! 아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나운서들이 이렇게 손들고 벌서기 한다는 거 사람들은 알기나 알까?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방송국은 황당 에피소드의 천국일 수밖에 없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술에 취해 방송 사고를 낸 적도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배가 밥이나 먹자며 방송국 밖으로 잡아끄는 게 아닌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는데, 밥을 먹으면서 딱 한잔만 하라는 강권에 마지못해 들이킨 막걸리가 화근이었다. 헐레벌떡 시간에 맞춰 방송국으로 돌아오기는 했는데 낮술 한 잔에 취기가 올라 그만 혀가 굳고 말았다. 시보를 알리는데, 어찌나 혀가 배배 꼬이던지. 아나운서 생활은 겉보기만 그럴듯할 뿐, 하루하루 실수의 연속이면서 업무도 완전 막노동 저리 가라였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아나운서라는 일이 내가 평생을 꿈꾸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남들이 보기에 멋지고, 선망하는 직업이라 아나운서를 선택했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만큼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여자라는 약점에 무릎 꿇지 말라무려 24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다.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끼는 이런저런 소문에 휘둘린 적도 숱하다. 아나운서 초창기 시절,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아는 남자와 만나 커피를 마신 다음날 출근했더니 "윤영미가 누구랑 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적도 있었다. 한번은 직장 동료 선후배들과 회식을 하고 뒤풀이로 가라오케에서 음주가무를 즐긴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이 기회에 맘껏 풀라며 멍석까지 깔아준 판에서 뒷줄에 앉아 얌전빼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에, 하다못해 남자 직원에게 노는 것도 지기 싫어 내가 좌중을 주도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다음날, "역시 윤영미 씨야. 놀 때도 화끈하고, 일할 때도 화끈하잖아!"라고 가라오케에서 비위를 맞추던 남자 직원들이 저희들끼리 "윤영미, 학창 시절에 꽤나 놀아 본 것 같아"라며 수군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치사한 인간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든지!' '그래, 맘껏 떠들어라. 나는 내 스타일대로 살련다. 어제 내가 신나게 놀았으면 됐지, 뭐. 너희들 재밌게 해주려고 논 것 아니었거든!' 나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이런 성적인 모멸감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리에서까지 여성의 권익을 위하여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굳이 꺼내고 싶지 않다. 내가 터득한, 터득이라고 말을 붙이기도 어렵지만, 24년 나만의 직장 생활 노하우란 별것 아니다. 그냥 나는 남의 말에 신경을 꺼버린다. 남의 말은 사흘을 못 간다는 격언처럼 남의 말에 귀를 열었다가는 나만 손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비단결 같은 성격에 주름이 가서, 스트레스로 내 보송보송한 얼굴에 기미가 끼면 결국 내가 지는 거야'하고 나 자신을 다잡는다. 어떻게 보면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얘기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PART 02 유일무이, 나만의 브랜드 차별화 전략
여기는 SBS 개국 첫 방송입니다춘천 방송국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한 지 5년이 흐른 어느 날부터였다. 하루하루 아나운서 생활을 즐겁게 보내던 지난 5년이라는 시간이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듯 무기력해졌다. 왜 이러지?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곰곰이 나 자신을 들여다본 끝에 나는 알았다. 그것은 새로운 열망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지?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 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음속에서 열망의 목소리가 용솟음쳤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최초로 민영방송이 탄생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SBS라는 방송국에서 대규모 인력채용을 계획하고 있다지 않은가! '이거야. 내가 도전할 대상이 바로 이거야!'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력 아나운서 지원 공고'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하루하루 맘을 졸이며 기다렸다. 이제까지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을 찾던 나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저희 SBS 방송 경력사원에 특채되셨습니다." 내 행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잘나가던 서울 MBC, KBS 출신의 아나운서들이 우르르 입사한 SBS 아나운서실의 영광스런 첫 임무, 바로 첫 개국을 알리는 방송에 내가 선택된 것이었다. "여기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SBS 방송국입니다…." 평사원 개국요원으로 입사한 나는 그렇게 손석기 아나운서와 함께 개국 첫 방송이라는 역사적인 문을 열었다.
여자 나이 서른둘의 결심첫 개국방송을 맡는 영광에 나는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나는 내가 신데렐라가 된 줄 알았다. 나는 첫 방송 뒤 곧바로 엄청난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 기대가 깨진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말 그대로 시골 출신 어중간한 나이의 아나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방송국에 스카우트된 직원들은 차츰차츰 출신 학교끼리, 전에 다니던 직장끼리 자연스럽게 패를 지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외톨이였다.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나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힘든 현장 생방송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개국 방송을 한 뒤 2년을 텔레비전에 얼굴 한 번 비추지 못하고 라디오 방송으로만 떠돌았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만을 하려고 새 직장을 잡은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하루하루 내가 앉아 있는 자리조차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다고 한없이 움츠리기보다 깨지더라도 반항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생각했다. 지금 이 힘든 시기가, 내 인생이 이전보다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변화의 시기'라고 주문을 외었다. 나는 포기의 순간, 극복을 택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계획을 짜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야구 캐스터 / 넘어지고 무르팍이 깨져도 뛰어라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송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 아나운서가 한 번도 도전한 적 없는 스포츠 중계에 내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내가 결정한 것은 바로 야구였다. 결심을 굳힌 나는 1년 동안 프로야구 리포터로 자원해 관중 인터뷰, 선수 인터뷰를 하며 경기장을 드나들었다. 생판 모르던 '야구'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이었다. 기본부터 익혀나가며 나는 하나의 원칙을 정했다. 1년 동안 신문은 야구 면만, 책도 야구 관련 책만, 비디오도 야구 중계 테이프만 보고, 차에서도 야구 중계 테이프만 듣겠다는 원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벽 5시에 출근해 6시 라디오 뉴스를 하고, 내가 맡은 방송 녹화를 끝내고는 곧장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다.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녹초가 됐지만, 자기 전에 또 야구 중계 테이프를 2시간쯤 보고 잤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야구의 '야'자도 모르던 내 눈에 선수들이 공을 왜 치고 어디로 뛰어가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구단 관계자, 감독, 선수들과도 점차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그 과정에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참 많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포터를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최동원 투수를 몰라봐 그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왕창 뭉갠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때 머리 싸매고 야구 공부를 하던 나에게 동료 아나운서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던 여자 야구 캐스터 지망생! 그 무모한 도전을 많은 동료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며 가당치 않게 여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열심히 한번 해봐요." 딱 한명, 지금은 프리랜서로서 방송을 하고 있는 최선규 아나운서만이 나를 격려해주었다.
1994년 4월, 프로야구 개막전부터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다음날 거의 모든 매체에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윤영미'에 대한 기사가 연일 올랐다. 당시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것이 앨범으로 3권이나 되니 얼마나 유명세를 탔는지 짐작할 만하다. 나는 꿈을 이뤘다. 물론 그 길은 예상처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여자 캐스터의 중계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수긍이 가는 비판도 있었고, 인신모독성의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비판을 감내하며 꿋꿋하게 2000년까지 6년 동안 라디오 중계를 했다. 고백컨대 나의 야구 중계 역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 개인의 역사로 볼 때, 야구 중계는 내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가슴 속 그득히 차오르는 충만한 성취감, 그리고 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가는 추진력이란 힘, 풀지 못할 과제는 없고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그 신념이 야구 중계가 나에게 준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PART 03 신기묘산, 24년 직장 생활 노하우
아나운서도 엄연한 직장인이랍니다물론 아나운서는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반 직장인과는 약간은 다르다. 하지만 일정한 생활 패턴이 있다는 점에서 직장인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여기에서 잠깐 근무 방식을 설명하자면 방송 시간에 따라 조근, 특조근(새벽 5시 뉴스 담당), 일근, 석근, 야근, 특야근(자정 뉴스 담당) 등으로 분류된다. 꼭두새벽에 출근한다는 것,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새벽 시간이라 목소리가 잠겨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시청자 게시판에 새벽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질책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아나운서는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명절에도 돌아가며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쩌면 일반 직장인보다 업무 강도가 더 높을 수도 있다. 물론 방송 준비를 위한 시간 외에, 아나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특조근이면 오후 2시에 퇴근이 가능하고, 특야근이면 저녁 5시쯤 출근을 하니 나머지는 자기계발을 하는 등 스스로 시간 관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우리말을 지키는 것 외에 시간 관리 또한 가장 철두철미한 이들이 바로 아나운서다. 시간이 무서우니 함부로 시간에 소홀할 수가 없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아니라, 몇분 몇 초의 자투리 시간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24년간 지각없는 억척 아나운서24년 동안 나는 출근 시간과의 싸움에서만큼은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 철두철미한, 나쁜 말로 조급하다 싶은 내 성격이 빛을 발한 게 방송국에 입사해서다. 조급한 성질이 오히려 방송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져, 1분 1초가 생명인 방송에 있어 단 한 번도 시간에 늦어 문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깐깐한 시간관념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급하고 빠른 성격 탓에 스스로 화를 내는 일도 많았고,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도 많았는데, 요즘은 내가 약속을 잘 지킨다고, 약속 잘 안 지키는 사람한테 화를 내진 않는다. 약속 어기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분한 감정을 키우다보니, 결국 괴로운 건 나였다. 늦는 사람은 늦게 사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으니 계속 늦는 것인데, 결국은 짜증내는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도 없지 않은가.
SBS 회장님께 먼저 말 걸다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먼저 말을 붙이는 자가 용기 있는 자이고, 대화를 주도하게 된다는 것. 특히 직장 상사나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라도 근엄함을 유지하려고 한다. 내가 높은 양반들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의 외로운 틈을 잠깐이나마 메우고, 작은 위로의 시간이 되어 드리고자 철없이 먼저 말을 건다. 한번은 엘리베이터에서 회장님을 만났는데, 마침 매년 회사에서 선물로 주는 쌀 한 가마니 얘기를 꺼냈다. "회장님이 주시는 쌀 덕분에 제가 이렇게 튼튼해요, 쌀이 아주 좋던데요?" 그날 간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팀장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회장님께서 직원들이 쌀 선물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며 무척 뿌듯해하시더라구. 그런데 누가 그런 얘기를 했지?"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듯 진심이 담긴 솔직한 한마디는 우리를 잠시나마 딱딱한 일상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부드럽게 분위기를 유도하는 윤활유 같은, 혹은 창가의 자그마한 화분 같은 것이 아닌지….
로비하지 않는 로비, 진심이 담긴 로비나는 결코 출세욕에 불타거나, 누구에게 잘 보여 이득을 취하려고 애쓴 적은 없다. 나는 이게 바로 내 20년 직장 생활의 노하우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엄연히 직장생활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또한 현실이다. 그럴 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로비를 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나쁜 의미에서의 뒷거래가 아닌, 바로 진심이 담긴 애교 있는 로비 말이다. 여자는 여자이기에 어쩔 수 없는 단점도 많지만, 비례해서 여자이기에 가지는 장점 역시 무궁무진하다. 남자라면 오히려 엄두도 못 낼 일을 나는 여자이기에 겁 없이 시도해볼 용기가 나기도 한다. 1996년 내 늦깎이 결혼식 때였다. 나는 과감하게 회장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제가 결혼하게 돼서 회장님께 청첩장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회장님께 직접이요?" 당황하던 비서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솔직히 무척 떨렸다. 그래도 나쁜 짓해서 불려온 것도 아니기에 나는 당당하게 회장실로 들어가 용무를 말씀드렸다. 회장님 역시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시더니, 이내 받아든 청첩장을 꼼꼼하게 확인하시고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꼭 행복한 가정 이루세요. 결혼했으니 방송 생활 더 열심히 하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회장님의 덕담에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회장실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