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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의 브랜드를 가져라

김준기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너만의 브랜드를 가져라

김창남 편저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 2008년 11월 / 288쪽 / 12,000원



도보여행가 김남희 - 다 가질 순 없다 간절한 걸 남겨라


제가 여행을 떠난 이유는, 우선 여행할 때가 가장 기쁘고, 행복했고,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제가 참 예뻤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굉장히 답답했어요. 왜 우리 사회에는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는 걸까? 남들이 하는 거라고 해서 그게 나한테도 맞는 걸까? 뭔가 다른 길은 없을까? 그리고 과연 내가 다른 길을 꿈꾼다고 해도 그 길을 찾아가서 그걸 나의 것으로 만들 능력이 나한테 있을지 의심스러웠죠. 뭐 하나 잘난 부분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난, 이 길은 아닌 것 같고 다른 길로 가고 싶은데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많이 두려웠죠. 저는 결혼도 했었지만 남의 옷을 계속 빌려 입는 것 같았고, 왠지 다른 삶이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했죠. 그러고 나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겠으니까 일단 바깥세상으로 나가보자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다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죠. 그래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나서 1년 중 8, 9개월은 바깥에서 여행을 하고 서너 달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시작한 지 올해로 6년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여행이 남긴 게 뭐냐고 물으면 저는 3가지를 얘기해요. 첫째는 나 자신에 대한 긍정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이 뭘 준비해야 되냐고 물으면 전 언제나 이렇게 말해요. 배낭 속에 넣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건 열린 마음, 비교하지 않는 마음이라고요.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아왔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면서 최고의 것을 찾아내려는 사고로 가득 차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한국에서 살 때는 욕심도 참 많았는데 밖에서는 제가 가진 그 얼마 안 되는 것까지 나눌 줄도 알게 되더라고요. 즉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는 거죠.

둘째는 타인에 대한 긍정입니다. 저는 항상 중심이 저에게 있었어요. 나는 뭘 원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까 저를 긍정하면서 타인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가게 됐어요. 전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거리의 청소부에서부터 웨이트리스, 심지어는 실업수당을 받아서 여행을 나오는 사람들. 삶은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도 되겠구나. 내 삶의 방식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거구나. 저 사람은 대학도 안 나왔고, 직업도 특별한 게 없어서 나 같으면 이미 기가 죽어서 살 충분한 조건인데 너무나 당당하고, 여유 있고, 남들한테 베풀 줄 아는 구나…. 그런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계속 저를 반성하고 타인을 긍정하는 거죠.

그리고 셋째로는 현재를 긍정하는 법을 배웠어요. 여행을 통해서 제가 배운 게 뭐냐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지 않는 삶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면 그 안에서 미래는 자연스럽게 준비되는 거라고 저는 믿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안락한 노후와 안전한 미래를 너무 경제중심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전 돈이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면 그 목표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다고 봐요. 돈은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돈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예요. 앞으로 많은 돈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도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요. 이 적은 돈을 가지고 얼마나 더 충실하고 행복하게 쓰면서 삶을 다른 방식으로 꾸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거죠. 그렇게 살려면 저는 옆에 누가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어떤 사람과 어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는 너무나 중요해요. 예를 들어 적은 돈으로 힘을 모아 마을을 꾸려서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한 한글학교와 미술교실을 열자, 이런 식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굉장히 힘이 나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현재를 잡아라. 오늘을 살아라'는 뜻인데 이 말을 제 삶의 슬로건으로 삼아 지금 제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미래는 자연스럽게 준비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Q. 20대 때 하는 여행과 50대 때 하는 여행에 차이가 있을까요.

제가 지금 서른아홉이 됐는데 여행을 하면 20대 때에 비해 체력이 현저히 떨어졌어요. 또 20대 때보다 감성의 더듬이가 무뎌졌어요. 그때만큼 많이 울지 않고, 그때만큼 많이 웃지 않아요.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 더 넓어지고 따뜻해졌어요. 다시 말하면 20대 때는 20대 나름대로의 힘이 있어서, 굶고, 못 자고, 고생해도 그걸 다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열정과 호기심이 있는데 반해, 나이가 들면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오고, 몸도 게을러지죠. 그게 단점이지만 반면에 20대에 놓쳤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공연기획자 송승환 - 내가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

저는 아역배우로 처음 연기생활을 시작해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만족해하면서 생활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20대가 되었을 때 배우라는 직업에 조금 회의가 왔어요. 왜냐하면, 연출자나 제작자가 판을 벌여 놓고 거기에 캐스팅이 돼야만 제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불만스럽더라고요. 제가 좀 능동적으로 판을 벌이고 싶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 가장 큰 용기를 낸 것이 바로 대학을 그만 두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있기보다는 제가 극장에서 연극을 만들고 작업을 하는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배우도 하면서 제작을 시작했죠. 제작이라는 게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고, 작품을 만드는 성취감도 있고, 굉장히 즐거웠어요.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나면 빚을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 사업으로 큰 수익을 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었죠.



그러다가 대학을 그만둔 것만큼 큰 결심을 한 것이 모든 걸 떨쳐버리고 1985년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20대일 때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고, 또 문화적인 갈증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거든요. 스타 소리를 들을 때 모든 걸 버리고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 제 인생에 있어 두 번째로 용기를 내었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경험하고 느꼈던 많은 것들이 지금 제가 작업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뒤 1989년 한국에서 다시 연기 활동을 재개했고 동시에 공연제작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뮤지컬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저도 뮤지컬이란 장르를 굉장히 좋아해서 뮤지컬 제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을 제작하는 것보다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순이익을 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공연을 가지고 해외시장을 개척해서 시장을 넓히면 좀더 많은 수익을 볼 수 있겠다, 그러다 보면 또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공연을 가지고 해외 진출을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연극이라는 게 언어를 통해서 감동과 재미, 느낌 등을 주는 건데, 과연 한국어로 하는 공연을 가지고 해외 어디에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문제는 자본이었습니다. 제가 '고래사냥'이라는 뮤지컬을 만들 당시 신문 기사에는 '국내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다뤘습니다. 그 당시 7억이면 국내 공연 사상 최대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고 있는 '캣츠'나 '팬텀 오브 오페라'는 평균 사전 제작비만 천만 달러에서 천오백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억에서 150억. 과연 내가 7억을 들여서 만들 뮤지컬이 해외시장에 가서 200억을 들인 뮤지컬과 경쟁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제 자본의 장벽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제 나름대로 찾은 방법은 브로드웨이에서 아무리 돈 많은 제작사라도 만들 수 없는 작품이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사물놀이였습니다. 그래서 두드리는 것이 많은 공간을 생각해 낸 것이 부엌이었고, 요리사들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사물놀이 리듬으로 주방에 있는 도구들을 사용하면 즐거운 공연이 되지 않을까, 이것이 난타를 만든 기본 콘셉트였습니다. 긴 연습의 과정을 거치고 호암아트홀에서 막을 올렸는데, 전원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로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외공연을 앞두고 나니 막막했습니다. 저는 난타 하이라이트를 찍은 비디오를 들고 도쿄, LA, 뉴욕, 런던, 파리 등지의 공연을 사고파는 해외프로모터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은 한국도 잘 모르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절벽에 마주 선 기분이었죠.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했고, 그래서 문화상품을 사고파는 경험이 많고 정보가 있는 복덕방, 에이전트를 찾기로 했는데, 당시 제가 두들긴 회사는 미국의 '브로드웨이 아시아'라는 회사입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브로드웨이 아시아는 사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아시아에 팔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몇 번이고 두드린 끝에 마침내 98년 5월, 브로드웨이 아시아가 난타를 전 세계에 배급하겠다는 가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정식 계약이 되기 전에 두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첫 번째 조건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보든 똑같은 장면에서 박수가 나오고, 똑같은 장면에서 웃음이 나올 수 있는 보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브로드웨이 연출자를 불러와서 작품을 수정했습니다. 좀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두 번째 옵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페스티벌에 작품을 내놓고 평가를 받아서 좋은 평가가 나오면, 자기들이 세계시장에 배급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저희한테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나가보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99년 에딘버러 축제에서 외국인들을 앞에 놓고 난타의 첫 해외공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해 에딘버러 1260개 작품 중에서 난타가 가장 먼저 30회 전 공연 매진이 되고 극장 측 요구로 예정에 없던 4회 추가 공연을 할 정도로 난타는 성공적인 해외시장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프로모터들이 극장에 와서 저를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한 난타 공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난타가 공연된 해외 국가 수는 25개국, 도시 수로는 약 210개 도시입니다.

그리고 2000년 7월, 서울에 난타전용극장을 오픈했습니다. 제가 난타전용극장을 만들어 1년 365일 난타를 해도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관광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난타전용극장을 만들면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작품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물론이고, 두 번째로 여행사들을 찾아다니면서 난타를 소개하고, 큰 도시의 여행사들을 다 호텔로 불러서 난타 프레젠테이션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장을 오픈하고 채 2년이 안 돼서 2002년 말에 저희 전용극장의 외국인 점유율은 80%를 넘어섰습니다. 2010년이면 난타전용극장을 만든 지 10년이 되는데, 그동안 전용관을 통해서 벌어들인 총 매출액은 약 천억 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1억을 들여서 천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문화가 산업화됐을 때의 고부가가치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전공을 하시든 이제는 문화와 연관지어서 장래를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어떨까요.



Q. 요즘 언론에서도 '청년 문화가 없다', '청년들이 죽었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청년들이 우리만의 문화를 왜 가지지 못하는지 궁금하고, 그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저희 때는 대학에서 서클 활동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저는 외대 아랍어과였지만 친구들이 저를 외대 연극과 학생이라고 불렀어요. 요즘 제가 대학교수가 돼서 다시 캠퍼스를 드나들면서 보니까 그런 서클 활동이 저희 때만큼 활발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것이 아마 입시를 치른 뒤 또 4년 후에는 취업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제 생각에는 학교 성적이 좋으면 평범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서클 활동을 정말 미친 듯이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미친다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감하게 대학을 그만두고 내가 하는 일에 미쳐서, 성공이나 실패했다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만족한 삶을 산다는 것에 늘 만족스럽습니다. 여러분도 대학 생활 중 학업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미치는 시간도 가진다면 대학 문화도 살아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국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 앵커 안착히 - 스스로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을 사랑하라

저는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외국에서 살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건설업에 종사하셨는데 제가 5살 때 말레이시아로 갔다가 방글라데시에서 2년 살고, 다시 말레이시아에 와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죠. 그런데 사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영어랑 무관한 삶을 살았어요. 화교들이 운영하는 교회 유치원을 다니고, 화교학교를 다녔으니까요. 그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영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보면 저는 계속 한 우물을 판 인생이라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때부터 영어를 시작해서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영문학을 전공했거든요. 대학원 코스워크까지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는데 〈YTN〉이라는 곳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영어뉴스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에도 영어뉴스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저는 '이 일에 도전해보자!' 한 게 오늘까지 오게 된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이 젊음과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당히 궁금해요.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왔는데요, 그 두 달이 제 인생이 있어서는 엄청난 전환점이었어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갖게 되는 경험들을 어떤 식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입니다. 예로 엄청난 경험을 하고도 정리를 안 한다든가, 그냥 기억 속에 남겨놓고 지나간다면 인생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정리하고, 소화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어떤 식으로 반영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그 단계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아이젠하워 펠로우십(미국 아이젠하워재단에서 주관하는 국제 교류 방문 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에 선발돼서 지난 3, 4, 5월에 걸쳐서 8주 동안 미국을 다녀왔어요. 이게 뭐냐 하면, 매년 전 세계 24개국 또는 25개국에서 한 명씩 뽑아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미국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전문분야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보고, 토론도 하고 컨퍼런스도 가고, 미국에 갔으니까 물론 관광도 하고, 쇼핑도 하고 등등 여러 가지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영어의 필요성'이에요. 여러분도 앞으로 그런 기회가 충분히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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