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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도전 1 : 세상을 뒤바꾼 여성들 이야기

이병철 지음 | 휴먼비전
참 아름다운 도전 1 : 세상을 뒤바꾼 여성들 이야기

이병철 지음

휴먼비전 / 2008년 7월 / 342쪽 / 12,000원

우리시대의 완벽주의 기록자_ 마거릿 버크화이트(1906~1971 / 사진기자 · 포토 에세이 개척자)




버크화이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녀는 일할 때 사진 말고는 어떤 것도 안중에 없는 '미친 여자' 같았다. 버크화이트의 작품은 대부분 스케일이 크고 각도가 대담하다. 따라서 사진을 찍는 장소는 거의가 여성이 접근하지 못할 위험한 곳이었다. 그 첫무대는 클리블랜드 제철소였다. 제철소에서는 이 아가씨에게 기꺼이 출입을 허가해 '버크화이트 신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버크화이트는 여성 최초로 미군의 공식사진사가 되었다. 그녀는 해군 수송선이 어뢰를 맞고 침몰했을 때에도 그 큰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51년에는 1만 3천m 상공에서 공군의 작전을 취재함으로써 당시 가장 빠른 비행기인 B47 전폭기를 타 본 유일한 여성이 되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여자로서 도저히 눈뜨고 보기 어려운 피사체도 그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치스의 부켄발트 수용소에서 찍은 발가벗긴 시체더미는 인류에게 가스실의 참혹함을 처음 보여준 사진이었다. 1946년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충돌한 캘커타에 들어가 시체 7천여 구가 나뒹구는 거리를 취재했다. 「캘커타의 독수리들」은 거리에 널린 시체와 그것을 쪼아먹고 배가 불러 날지 못하는 독수리 떼를 찍은 사진이다. "나는 눈뜨고 못 볼 참상을 보면 너무 괴로워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찍는 일이 내 임무라고 생각하고 현장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발견'하고 '기록'하고 '폭로'하는 것. 이 작업이야말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유일한 동기다."



20세기 보도 사진의 메카가 된 『라이프』의 창간호 표지는 버크화이트가 찍은 포트펙 댐이 장식했다. 버크화이트는 댐 근처 마을의 분위기도 취재했는데, 이 사진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서부」라는 9쪽짜리 커버스토리로 쓰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서부」는 사진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 등장한 포토 에세이였다. 그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서부」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뒤 어스킨 콜드웰을 만나면서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주제에 눈을 뜬 버크화이트는 1936년 콜드웰과 남부 8개 주 소작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면서 '헐벗음과 굶주림'의 실상을 확실히 깨달았다. 두 사람은 이때 취재한 것을 엮어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를 1937년에 출판했다. 남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르포르타주 사진집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버크화이트 제3의 탄생을 선언한 책이다.



1942년 콜드웰과 이혼한 버크화이트는 유럽 전선에 종군했다. 전쟁이 끝나자 버크화이트의 관심은 인도로 향했다. 취재는 간디로부터 시작했다. 간디를 찍기 위해 그녀는 물레 잣는 법을 배웠다. "물레 잣는 사람을 찍고 싶으면 그가 왜 물레를 잣는지 생각해 보라. 이해한다는 것은 찍는 일만큼 중요하다." 간디를 찍은 사진 가운데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물레와 간디」는, 서재에서 물레를 잣다 말고 잠깐 신문을 보는 무심한 모습을 극적으로 포착했다. 1952년 한국전쟁에 종군한 버크화이트는 1952년 말 서둘러 귀국했다.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휴식을 권했다. "그것은 내 신념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싸움 도중에 무기를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병마는 버크화이트로 하여금 끝내 무기를 내려놓게 하였다. 그녀는 18년이나 싸웠지만 병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1969년 현역(『라이프』 부사장)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손가락을 가지고 타자기를 치면서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1971년 8월 27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버크화이트는 1951년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한 시대를 후세에 전한 위대한 증언자였다.

환경운동의 시조_ 레이철 카슨(1907~1964 / 미국 / 해양생물학자·작가)



화학 물질 제조업자들은, 언론을 통해, 『침묵하는 봄』을 쓴 여자가 감상적이고 몽상적이며, 살충제가 농업과 경제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감상적이고 몽상적이며' '어리석고 신경질적'이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끝내 미국을 움직이고 세계를 바꾸었다. 역사는, 『침묵하는 봄』이 출간된 그 날을 현대 환경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정적 전기는 책이 출간된 지 여섯 달 만에 50만 부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1963년 봄에 찾아왔다.

4월 3일,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과 아메리칸 시아나미드 사의 로버트 화이트스티븐스 박사가 CBS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마주 앉았다. 화이트스티븐스는, 암과 투병하느라 지쳐 있는 자그마한 여자를 '확실히 뭉개 버려' 그들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날을 세우면서 포문을 열었다. "지구상의 어떤 동식물도 인간의 생존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과학이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일 뿐이지요." 이 말에 반론을 펴는 카슨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지구 표면이 독성 물질로 뒤덮여 있는 것을 알고도 그 위에 누울 사람이 있을까요?" CBS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살충제를 통제하라는 여론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입에서 '환경'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카슨의 말이 인용되자, 마침내 DDT를 비롯한 살충제들은 미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57년은 카슨의 생애에서 제일 굵은 획을 그은 해였다. 1957년 여름 매사추세츠 주 정부가 모기를 박멸한답시고 늪지에 DDT를 살포하자, 모기는 근절되기는커녕 전보다 악착스러워졌다. 더 나쁜 일은 그 지역에 살던 전혀 해롭지 않은 조류와 곤충이 모조리 죽었다는 사실이다. 매사추세츠의 DDT 프로젝트나 그와 비슷한 일을 조사하면서 카슨은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고 알아차렸다. "살충제 문제를 파들어 가면 갈수록 끔찍했다. 그 실상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1958년 카슨은 『침묵하는 봄』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쓰는 동안 관절염과 위궤양이 그녀를 괴롭혔고, 1960년에는 유방암으로 몇 년 더 살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침묵하는 봄』에서 가장 논쟁이 심했던 부분은 살충제가 인간의 유전 체계와 건강에 위해하다고 한 대목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냄으로써 카슨이 그 방면에서 첫 이정표를 세웠음을 증명했다.



카슨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거동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화학회사들은 그녀를 동정하면서도 내심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카슨은 자신의 상황을 놓고 농담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녀가 1963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 '이제는 코만 훌쩍거려도 뉴스가 될 정도로 내가 유명해졌어. 아침신문을 보니까 『침묵하는 봄』 작가가 감기로 침묵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던데, 내가 대기오염협의회 일을 해내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 같아. 화학 회사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초가을에 접어들자 카슨은 휠체어에 앉아 캘리포니아의 미국삼나무 숲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겨울을 넘긴 뒤 1964년 4월 14일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겨우 56세. 카슨이 경고한 대로 미국 땅 여기저기서 봄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2000년 말 아프리카 국가들은 살충제의 대부분을 사용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카슨이 『침묵하는 봄』을 쓰기 이전에는 몇몇 사람만이 인식했던 환경 문제가 이제는 현대인의 '상식'이 되어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카슨이 지구를 구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여성 정치세력화의 기수_ 에바 페론(1919~1952 / 아르헨티나 / 페론 대통령 부인)



1957년 5월 17일, 한 여인이 밀라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주검이 밀라노에서 14년을 안식한 뒤 조국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때는 1974년 11월. 그러고도 교회와 대통령 관저에서 25개월을 더 머무르다가 비로소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에 안식처를 구했다. 죽은 지 22년 만의 일이었다. 관(棺)이 망명 중이던 1973년 10월, 에스파냐로 쫓겨갔다가 돌아온 독재자 후안 페론이 관 속에 든 여인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에 출마하여 아르헨티나 선거 사상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죽어 20년이 지나서도 이승의 정치판을 좌우한 저승의 망령. 이 괴담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때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빈민들로부터 '성(聖) 에비타'로 추앙된 에바 페론이었다.



에바의 노력으로 참정권을 얻게 된 여성들. 노동자들은 에바가 살아 있을 때를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고의 노동자 천국이었다고 즐겨 회상한다. 에바는 노동자의 월급을 배나 올려주었고, 군인은 3년 사이에 세 배나 인상해 주었다. 노동자들은 소수 부르주아의 멸시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를 맛보았다. 페론 부부는 바로 이들의 맹목에 가까운 충성에 정치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바를 악녀라 일컫는 사람들의 견해는 다르다. 1990년에는 형편없는 채무국으로 전락하여 '라틴 아메리카 몰락의 상징'이 되었고, 숱한 쿠데타와 내전, 불법 고문과 처형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역사를 갖게 된 것, 그들은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에바가 군림하던 7년 동안에 뿌려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아비 없이 태어나 열네 살 때부터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며 사회에 복수하려고 칼날을 벼려 온 한 여자의 한 서린 집념과 한낱 인기 전술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고.



1946년 이후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개혁의 상징이자 페론 부부의 정치 생명을 유지시킨 이념이었다. 페론주의가 이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가장 큰 요인은, 노동자에게는 노동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여성에게는 정치적 평등을 누리게 함으로써 노동자와 여성 두 축을 정치적 발판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여성을 정치 세력화한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시도된 일이 없는 페론주의의 가장 큰 성과였다. 아르헨티나 여성이 누린 정치·경제·사회적 지위에서 최고의 상징은 에바 페론이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를 뛰어넘어 수천 년간 꿈에도 누리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지위와 권리를 주었다. 페론주의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여권운동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이 되었다. 이는 여성의 권리를 대중의 이익과 결합했으며, 나아가 여권운동과 노동운동을 결합해 국가 사회주의 쪽으로 이끌었다.



에바의 정치적 감성은 하층 계급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유대감이었다. 그러면서도 빈민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열등감 때문에 언제나 불안전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페론부부는 대통령이 되자 곧 자기들을 우상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맨 먼저 에바의 과거를 많이 알거나, 예전에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거나, 그녀를 매춘부라고 손가락질했던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또한 에바는 보석 수집과 의상 쇼핑에 열을 올렸다. 에바가 보석과 의상에 집착한 까닭도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열등감 탓이다. 에바는 정치 야심을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추종자에게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고 냉혹했다. 그녀가 가장 즐겨 쓴 수법은 페론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 특권층의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존경과 찬양을 받았다.



에바는 정부조직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옛날 그녀의 아파트 문지기를 총노동연맹 회장에 앉히는가 하면, 노동장관에 노동자를,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친오빠를 앉혀 모든 사안을 대통령보다 먼저 처리하거나 간섭했다. 외무장관은 유엔에서 에바보다 유명했기 때문에 파면 당했고, 신임 장관은 취임 파티에서 그녀의 커피 심부름을 했다. 에바에 관한 기사나 사진을 적게 싣는 신문사는 무조건 폐간 당했고, 에바가 유럽에 나들이할 때는 수십만 군중이 마중 나가 꽃을 뿌리며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 「아르헨티나 여인」을 불렀다. 인류는 20세기에 여성 대통령과 여성 총리를 많이 배출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도 대통령 부인이었을 따름인 에바의 권력과 부를 능가한 사람이 없었다. 에바는 절대자였다. 1952년 7월 26일 에바는 서른세 살로 죽음을 맞았다. 아내가 죽자 무기력한 페론은 군부의 반발을 사 망명길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군부 지도자들이 페론주의를 말살하는 동안 에바의 시신은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노동자와 빈민은 '에바 시절'을 그리워했다.



피임시대를 연 선각자_ 마거릿 생어(1879~1966 / 미국 / 사회운동가 · '산아제한운동' 제창)



세계에서 처음으로 산아 제한 운동을 제창한 마거릿 생어는 미국 뉴욕 주 코닝에서 태어났다. 1902년 스물세 살이 된 마거릿은 건축 기사인 윌리엄 생어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 8년째에 접어든 무렵 주부 노릇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 생어는 간호사 일을 하면서 국제노동자연맹(IWW)에 들어가 북동부 지방에 방직 노조를 결성하는 일에 참여했다. 생어는 1912~1913년 국제노동자연맹이 주도한 펜실베이니아 주 파업을 성공함으로써 국제노동자연맹의 리더로부터 '흔해 빠진 급진주의자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남다른 능력과 신분보다 더 그녀를 돋보이게 한 것은, 여성이 출산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고 성병으로부터 신체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비로소 경제 정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이었다.



국제노동자연맹에서 여러 계층 여성과 상담하면서 생어는 다산과 성병이야말로 여성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다. 당시는 의료 수준이 낮아 산욕열로 죽는 산모가 무척 많았다. 생어는, 여성을 질병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섹스와 임신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신이 안 되는 방법이란 피임밖에 없었다. 남성은 안팎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는 데 비해 여성은 윤리와 임신이라는 굴레를 쓰고 '아이 낳는 기계' '살림만 하는 종신 노예'로 살아 왔다.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어떤 여자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생어의 사상은 어느덧 다산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성 해방 · 여성 해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아내이기만을 요구하는 남편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더 이상 복종하고 굴복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사회의 관습도 그녀를 구속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담배를 피운 첫 여성이 아니던가.



1914년 3월, 생어는 투쟁적인 페미니즘 잡지 『여성의 반란』을 창간했다. 이를 통해 피임 합법화라는 여성의 요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우편물 접수 거부였다. 우체국은 이 같은 부도덕한 책을 취급할 수 없다며, 한술 더 떠 그녀를 우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1914년 10월 생어는 구속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다. 미국을 떠난 뒤 그녀가 쓴 『가족 제한』은 손에서 손으로 널리 퍼졌다. 그것은 피임 기술을 세밀하게 해설한 책자였다. 월경을 일으키는 하제(:설사약)를 사용하면 안 되는 등 의학 전문가들이 책 내용을 문제삼자, 그녀는 피임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의학적 오류나 남성의 혐오에서 비롯된 주장을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대꾸했다.

생어가 유럽에 있는 사이 남편은 『가족 제한』을 출판한 죄목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1915년에는 여섯 살 난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 연속된 불행으로 생어에 대한 공감과 동정 여론이 높아지자, 경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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