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탄생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젊음의 탄생
이어령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 292쪽 / 11,300원
뜨고 날고 天外有天 Take off
- "뜨면 추락한다, 날아라!"
대학에 합격한 순간 여러분도 떴습니다. 오랜 입시 공부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 있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뜬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 억누르던 중력에서 풀려나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 그래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대학에 붙자마자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이 "떴다 떴다"의 함성이었지요. 하지만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다릅니다. 공기든 물 위든 '뜨는 것'의 힘은 밖에서부터 옵니다. 구름이나 풍선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기 위에 떠다니다가 사라지고, 물에 뜬 거품과 부평초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다가 꺼져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나는 것'은 자신의 힘과 그 의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향해 돛을 올리고 날개를 폅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폭풍이 불어도 태양을 향해 꼿꼿이 날아오르고, 잉어의 강한 지느러미는 거센 물살과 폭포수를 거슬러 용문(龍門)에 오릅니다. 죽은 고기만이 물 위에 떠서 아래로 떠내려갑니다. 여러분은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의 새로운 기류 위에 뜬 대학생들입니다. 이제 자유롭게 자신의 힘으로 날아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나는 것은 바람 탓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부모 탓, 사회 탓, 정치 탓, 아무리 탓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은 초·중·고 환경처럼 타율과 의존이 아니라 모든 제도와 운영이 자율을 토대로 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은 이제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 안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젊음의 유영(遊泳)과 비상(飛翔)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자성어에 '천외유천(天外有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차원을 한 단계 올려 "높이 높이" 날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닥쳐올 새 시대의 하늘은 수학 문제로 치면 고차방정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풀어야할 인간의 삶과 문명 문제는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는 5차방정식과 비슷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1차방정식이 수렵 채집 시대, 2차방정식이 농업 목축 시대, 3차방정식이 산업 시대, 4차방정식이 오늘의 정보 시대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다음 문명은 바로 5차방정식과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머리띠 동여매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던 저차원 방정식의 문제 풀이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학의 힘은 거리의 시위 공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넓은 바다, 창조적 상상력의 높은 하늘에서 옵니다. 젊은이와 대학의 토대는 파멸의 센서 노릇을 하는 보네갓드의 '카나리아 이론'에서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이나 3T(Talent, Technology, Tolerance)로 무장한 리처드 플로리다의 '창조 이론'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내 젊음을 업그레이드할 때 생기는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입니다. 게의 집게발처럼 생긴 세 개의 팩맨(pac-man)을 보고 있으면 그 사이로 하얀 삼각형이 떠오를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윤곽선이 보이고, 같은 종이의 흰 바탕색인데도 가상공간의 삼각형은 한층 더 희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 그림이지요. 그 가상의 삼각형은 여러분이 지금부터 높이 날아야 할 공간, 창조적 상상력과 그 지성의 영역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대학 캠퍼스도 벽돌로 된 강의실과 나무를 심은 교정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팩맨의 유도인자처럼 젊음을 에워싼 가상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곳은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뜨고 날고 춤출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인큐베이터입니다. 대학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집게발 같은 팩맨의 모양만 볼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분명 그 사이에 떠오르는 삼각형의 공백을 볼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지요. 꿈, 상상력, 창조 공간, 미래의 판타지 무엇이라 부르든 이 떠오르는 가상공간에서는 학과 간의 구분도 없고 인문학이니 사회과학이니 자연과학이나 하는 구별도 없습니다. 학과 사이의 높은 문지방도, 두터웠던 문과와 이과의 벽도, 높은 가상공간의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개방되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가야 할 '대학 2.0 시대'의 기반이요, 높이 날아올라야 할 창조적 상상력의 하늘인 것입니다. 이처럼 높이 날기 위해서는 지식과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목숨을 건 모험과 열정 말입니다. 이번만은 추락하지 말고 높이 높이 날아야 합니다. 우리 젊음을 위한 추임새의 노래가 팩맨의 입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묻고 느끼고 疑問驚歎 Interrobang
-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게 된 대조법이지만 옛날 대학생들을 괴롭힌 것은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의 인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었지요. 햄릿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유명한 대사가 의미하듯이 매사를 회의하는 물음표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미쳐서 살고 깨어나서 죽었다"는 돈키호테는 환상을 좇는 꿈속의 기사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느낌표형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누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감정은 이성을 눈멀게 하고 이성은 감정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감정과 이성을 상호 대립하는 것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 인지과학에서는 그것들을 서로 기능을 보완하고 도와주는 상보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물음표는 느낌표가 있기 때문에, 느낌표에는 항상 물음표가 동행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의 대학생들이 그렇지요.
물음표와 느낌표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매직카드가 바로 물음느낌표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영어로는 Interrobang이라 하고 중국어로는 '의문경탄호'라고 일컫는 기호입니다. 컴퓨터의 유니코드에서는 U+203에 배치되어 있는 글자로 당당한 문자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한 마크라고 할 수 있지요. 곡선과 직선이 어울리고 얼음 속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처럼 이성과 감정이 오버랩 되어 있는 이 글자의 모양은 햄릿과 돈키호테를 한데 합쳐놓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음느낌표가 앞으로의 젊음을 탄생시키는 매직카드가 되는 이유는 좌우 어느 한쪽 뇌만으로는 통합적인 미래의 나 그리고 문명을 창조할 힘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궁상맞게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어 봤자 자기 배꼽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며 물음표 인간을 비웃는 젊은이들. 마찬가지로 핫(hot)이란 말보다는 쿨(cool)이란 말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느낌표의 "아이 스크림!(I scream)"은 금시 녹아 없어진다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오로지 두 타입의 젊은이들을 함께 포용할 수 있는 것은 물음느낌표, 인테러뱅밖에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끈한 것, 불타는 것에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진짜 용기와 열정은 회의하면서도 불확실한 회색 지대로 뛰어 드는 '최초의 펭귄'이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최초의 펭귄(First Penguin)'이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펭귄들은 뒤뚱뒤뚱 떼를 지어 우르르 바다로 모여들지만 정작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일제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머뭇거립니다. 왜냐하면 바다 속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잇감도 있지만 동시에 위험한 물개나 바다표범 같은 천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머뭇거리고 있는 펭귄의 무리 가운데 그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맨 먼저 뛰어드는 용감한 펭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펭귄들도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듭니다. Just do it! 불확실하지만 일단 무언가 저지르는 것. 끝없이 회의하다가도 순간적인 직관이나 느낌으로 판단하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의문과 감동이 한 몸이 된 '물음느낌표'의 상징적 부호의 의미입니다. 노인은 의구심이 많아 머뭇거리고 아이들은 철이 없어 덤빕니다. 진정한 젊은이는 의심하고 행동하는 최초의 펭귄인 거지요. 젊은이란 한 마리가 멋도 모르고 뛰면 덮어놓고 따라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스프링복이 아닙니다. 젊음은 목숨을 걸고 남보다 앞서 불확실한 모험의 바다로 뛰어드는 최초의 펭귄인 것입니다. 물음느낌표를 가슴에 단 펭귄 같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문화와 사회가 바뀌고 새 역사들이 쓰였습니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불확실한 바다로 용감히 뛰어드세요.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나나>에서 <도도> 兩端不落 Win-Win
- "굿바이! 유통기한이 지난 흑백의 이분법은 가라. 하이! 그레이 존의 보물섬 지도"
이번 매직카드는 비트겐슈타인의 애매도형인 '오리-토끼(duck-rabbit)'입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무엇을 그린 그림이냐고 물으면 <오리>라고도 하고 <토끼>라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는 오리 그림인지, 왼쪽 방향을 보고 있는 토끼 그림인지,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그 그림의 선 모양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인지하고 그 형상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존재합니다. 관찰자가 부여하는 <관점의 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그림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태까지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리-토끼의 매직카드를 보면서 비로소 그게 아니라는 것, 그림보다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능동적인 역할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자르는 칼자루가 내 눈 속에 마음속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여러분은 이 매직카드를 통해서 인간은 동전을 넣어야 움직이는 자동판매기처럼 outside-in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바깥에서 자극이 없어도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inside-out의 존재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위 그림을 오리-토끼로 동시에 인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오리로 보일 때에는 토끼 모습이 사라지고 토끼로 보일 때에는 오리가 지워집니다. 언제나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요. 이처럼 관점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자유이면서도 때로는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됩니다. 쏠린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향과 배재 그래서 우리의 현실은 다의적인 것인데도 늘 삶의 반쪽밖에는 볼 수 없게 합니다. 원래는 오리도 되고 토끼도 되는 양의성을 지닌 것인데도,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에 좌우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 차이에서 의미와 여러 가지 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시스템이라는 것이 구축되고 그 시스템 속에 굳어버린 사물이나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선지피가 흐르는 현실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오리냐 토끼냐의 양자택일의 강박관념이 젊은이들을 가위눌리게 합니다. 열린 들판의 복판에서 살기를 원하는 젊음이 흑백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서 경직되는 것입니다. 예스면 예스, 노면 노의 일도양단으로 처리되는 정황 속에서는 어떤 단서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색분자로, 논리적 배중율로, 혹은 박쥐가 아니면 우유부단한 존재로 배척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처럼 다의적이고 애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고교 교실과 다른 대학 강의실이 무질서해 보이고 늘 회색빛이고 안개이고 입구와 출구가 여러 개 나 있는 미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무 방향으로나 갈 수 있는 열린 벌판, 개방되어 있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그라미가 아니면 가위표를 치는 외통수의 시험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해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냐'를 '나'로 바꿔주면 됩니다. 그러면 선택의 차이는 없어지고 대립은 해소되어 '이것이나 저것이나'가 됩니다. 중국 사람들이 생활 철학의 하나로 꼽는 '차부도(差不等)'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나나'는 '도도'로 진화합니다. 수동적인 데서 능동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도시생활에서 패배한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 "모두 다 때려치우고 시골이나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할 때의 그 '~나 ~나'입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패기 있는 젊음과 희망을 지닌 젊은이들은 '나나'가 아니라 '~도 ~도'라고 말합니다.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 도시'도' 농촌'도' 모두 자기 생활공간 안에 포함시킵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either-or에서 both-and로 가는 것이고, 한자의 사자성어로 말하면 이자택일에서 양자병합의 세계로 가는 것이 '나나'에서 '도도'로 가는 삶이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Win-win'의 상생원리입니다.
여름날 아버지는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모기 들어온다고 창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괴로운 오리-토끼지요.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어느 한편을 들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유리한 어느 한쪽에 서려고 한다면 오랫동안 우리가 상처입은 그 줄서기의 비극을 재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골육상쟁(骨肉相爭)하던 그 천 년의 비극 말입니다.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젊음으로 태어난 여러분의 힘이요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줄을 서지 않습니다. 오리냐 토끼냐의 선택에서는 줄을 서야 하지만 창조하는 젊음은 줄을 만듭니다. 망창을 만들어 다는 것이지요.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는 막아주는 이 방충망을 창조하는 것. 그것만이 '나나'를 '도도'로 바꿔주는 희열의 역사를 눈앞에 펼쳐줄 것입니다.
섞고 버무리고 圓融會通 Mash up
- "섞어라, 버무려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두개의 아치형 대문처럼 보이는 것은 영어의 M자를 딴 것이고, 탑처럼 위로 솟은 화살표는 위로 올라가는(up)의 표시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매시 업(mash up)'이라는 음악 양식을 나타내는 로고입니다. 'mash'는 섞다/결합하다의 뜻으로,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음원을 합성해 새로운 곡을 만드는 음악제작 기법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The white album)>의 곡에 랩 가수인 제이 지의 <블랙 앨범(The black album)>의 랩 일부를 붙여서 새로운 곡을 만든 미국의 음악프로듀서이자 가수인 데인저 마우스가 그 원조라고 합니다. 이름도 <그레이 앨범(The gray album)>이라 붙인 것을 보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 했는지 분명해집니다. 백인이 부른 '화이트' 곡에 흑인이 부른 '블랙'의 가사를 혼합해서 '그레이'의 잡곡(雜曲)을 낳은 것. 그런 시도야말로 매시 업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양식의 음악이 힙합계를 덮치면서 젊은 층에 파고들기 시작한 것을 보아도 분명 매시 업은 21세기 융합문화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음악만이 아닙니다. 비디오 아트, IT의 웹 서비스,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 거의 다가 융합기술 제품이 아닌 게 없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을 결합하여 지금까지 누구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효능과 가치를 창출하는 기법, 그리고 그 정신이 M자 위의 화살표처럼 오늘의 젊음을 업그레이드하는 비밀 병기, 즉 매시 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