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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지음 | 흐름출판
함께 해서 가능하다

성공의 맛

1965년 여름이었다. 그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일곱 살의 나는 장차 의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일하던 동네 철물점에서는 최저임금,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주었다. 그런 나에게 대학 진학은 인간의 달 착륙만큼이나 멀고 험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코네티컷 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유난히 무덥고 습기 찬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 가운데 한 분인 피터 버크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사 일을 때려치우고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서 불과 40마일 떨어진 뉴욕 주 아몬크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버크 박사와 그의 가족을 근 1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우리의 재회는 이내 이루어졌다. 1967년 7월의 어느 일요일, 그 날은 나에게 말 그대로 운명적인 하루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그의 집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버크 박사와 나는 동업관계를 맺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패스트푸드 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무렵 나는 대학 진학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해야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더욱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버크 박사의 집으로 들어서면서 그에게 조언을 한번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대학에 보내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하면 버크 박사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잠수함 샌드위치 가게를 차려야겠군." 뭐라고? 고작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나더러 샌드위치 가게를 차리라고? 하지만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묻고 있었다. 그러자 버크 박사는 잠수함 샌드위치 사업을 설명해 주었고, 나에게 해볼 생각이 있으면 기꺼이 동업자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 가족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자, 버크 박사는 나에게 1천 달러짜리 수표를 한 장 써주었다. 우리의 사업에 대한 투자인 셈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만약 잠수함 샌드위치 가게가 성공을 거두면 그것은 단순히 대학 등록금을 버는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성공이란 쉼 없는 모험과 흥분의 롤러코스터를 의미한다. 나에게 그것은 〈서브웨이(SUBWAY)〉라는 이름의 음식점이었다. 성공이란 또한 최선의 노력과 인내를 의미하며, 나는 그것을 통해 경제적 독립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음식점 체인 〈서브웨이〉는 그동안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만 놓고 보면 〈맥도날드〉보다 더 많은 매장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프레드 드루카와 〈서브웨이〉 본사 및 가맹점들은 수많은 상과 찬사를 받고 있다. 지방이 많은 기존의 패스트푸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상호와 제품이 수많은 언론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고맙습니다, 웨인 씨

우리 아버지는 늘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자신의 고향인 중국을 떠났다. 홍콩과 일본을 여행하던 시절에는 틈만 나면 친구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미국으로 이민하는 아시아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것이 아버지에게 커다란 기회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의 발보아 섬에 있는 음식점을 9만 달러에 사들인 직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윽고 1972년,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특별한 사건이 우리 집 문을 노크했다.



영화배우 존 웨인의 아내의 홍보를 전담하던 글로리아 지그너라는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자기 남편의 생일 파티를 우리 음식점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존 웨인이 이 파티에 참석해 줄 수 있겠냐고 그의 아내에게 부탁했다. 존 웨인이 우리 음식점에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언론에서는 전혀 엉뚱한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아버지의 사업이 큰 덕을 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존 웨인이 우리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라는 소문은 이내 그가 자신의 생일 파티를 우리 음식점에서 연다는 쪽으로 부풀려졌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우리 음식점을 존 웨인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졸지에 우리 음식점은 유명한 사교장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자 우리의 삶도 자리를 잡았다. 우리 형제들은 캘리포니아 남부의 바다를, 바닷가에서의 생활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파도타기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파도타기를 즐기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리가 점점 나이를 먹자,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힘든 음식점 일은 이제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나는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에 들어가 공학을 공부했다. 얼마 후 나는 전공을 재무 쪽으로 바꾸었고, 우리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군데 대기업을 옮겨 다니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 부모님이 누리던 자유와 유연한 삶의 방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조직에 얽매여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생활 전체가 수많은 규정과 제한에 묶여 있는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비스마르크와 에드, 밍고 등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음식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한가롭고 느긋하지만 아주 젊고 세련된 분위기와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새로운 패스트푸드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생선구이 타코가 기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 특유의 브라질 및 아시아의 맛을 가미할 생각이었다. 개업 1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드디어 메뉴를 확정했다. 〈와후 생선 타코〉가 탄생한 것이다. 1988년에 처음 매장을 연 이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형제 중 한 명이 일한 적이 있는 〈뉴포트 서프 앤 스포츠〉의 마이크라는 사람이 업계 관계자들을 초대한 행사장에 음식을 납품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 회사 주차장에서 생선 타코를 만들어 제공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우리 타코의 기막힌 맛에 반해버렸다. 우리가 출장 서비스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와후 생선 타코〉는 단번에 우리 가게의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그 이후 〈와후 생선 타코〉는 '〈빌라봉〉 지정 공식 음식점'이 되었다. 그 직후 〈퀵실버〉와 〈오닐〉을 비롯한 몇몇 업체들이 뒤를 이었다. 가게 문을 연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7개 파도타기 업체의 공식 음식점이 된 것이다. 이제는 존 웨인도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와후 생선 타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1백 개가 넘는 파도타기 업체들이 우리를 공식 음식점으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도 신화는 계속 되고 있다. 〈와후 생선 타코〉 매장이 40개가 넘게 생길 만큼 크게 번창하는 것을 지켜보며 에드와 밍고, 그리고 나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와 우리에게 근면의 정신을 심어준 부모님, 아낌없이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해 준 파도타기 업계 관계자들, 그리고 <상하이 파인 가든>에서 아주 특별한 생일 파티가 벌어졌던 1972년의 그날 저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웨인 씨. 당신 덕분에 비롯된 신화는 지금도 활화산처럼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답니다.



우리는 녹슨 삶을 두려워한다.

엄마, 이것 봐요, 손이 없어요!

"아무도 당신의 신발 끈을 대신 매주지 않아. 이제 당신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1993년, 그러니까 내 손에 장애가 생긴 지 2년이 지났을 무렵에 내 남편 론이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 충격적인 한 마디가 '손과의 전쟁'을 치르던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전환점이 되었다는 얘기이지 정작 그런 충고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서른여섯 살 때부터 드 퀘르벵이라는 병에 시달렸다. 이것은 손의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통증이 뒤따르는 질병이다. 내가 이 병에 걸린 것은 어느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회계부장으로 일하던 1991년의 일이다. 그 무렵만 해도 드 퀘르벵이란 병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고, 법적인 보호 조치도 마련되지 못했다. 하다 못해 단순한 건초염 증상으로 더 이상 타이핑을 할 수 없는 직원에 대한 보호 조치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같은 부서 직원들에게 타이핑 작업을 부탁했는데, 그 때문에 팀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자리를 잃은 것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었다.



남편 론에게서 충격적인 충고를 들었던 1993년, 나에게 이웃 사람이 어느 행사장에서 컴퓨터 음성 인식 장치를 보았다는 말을 했다. '드래곤딕테이트'라는 소프트웨어였다. 그 이웃은 내가 신기술을 사용하면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고맙게도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이용해 '말'을 '글'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아주 복잡하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기술이며, 처음에는 제대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만 해도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는 DOS상태에서만 작동했고, 무려 5천 달러짜리 컴퓨터가 필요했다. 게다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일일이 떼서 발음해야 제대로 인식되는 시스템이었다. 그토록 결함투성이인 기술을 목격한 순간, 나 같은 사람들이 이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음성 인식 기술을 가르쳐주는 회사를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런 회사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래곤' 소프트웨어를 돌리기에 충분한 메모리를 가진 컴퓨터를 특별 주문했고, 우선 나 자신부터 그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과 사용 설명서까지 만들어 놓고 1993년 10월에 드디어 내 회사를 차렸다. 우선 캘리포니아 산 마테오에 보증금이 없는 사무실을 임대했다. 이렇게 해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음성으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미국 최초의 회사가 탄생했다. 출발이 워낙 미미했던 탓에 1994년에야 처음으로 두 명의 직원을 채용했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상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절이었고, 1990년대 말부터 손목굴 증후군이 전염병처럼 유행했을 때 나는 이미 음성 인식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1993년부터 이 분야의 기술과 우리 회사, 그리고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 회사는 그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컴퓨터 관련 업무로 복귀시켰으며, '손과의 전쟁'을 치르는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 자신도 계속해서 음성 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기술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니 슬기로운 충고 한마디로 내 삶을 바꾸어 놓은 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론, 당신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못했을 거야!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제퍼-텍〉은 미국에서 제일 큰 컴퓨터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 트레이닝 회사이다. 음성 인식은 이제 장애인뿐만 아니라 타이핑보다는 음성으로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최고 경영자이자 설립자인 레니 그리피스가 헌신적으로 남을 돕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회사에 취업한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살아가라,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처럼

지켜야 할 약속

지금까지 걸어온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여러 갈림길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쪽보다는 미지의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이끌어갈 방향을 선택해 왔다. 그 덕분에 무수한 장애물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감사와 축복 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선택한 길이 내 인생을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왔는지를 생생하고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은 온통 가족들과 어울린 것들뿐이다. 부모님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애를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해서 뉴저지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 안정이 될 만하면 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어머니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다른 미술적 재능을 타고난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점점 외로움과 우울함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부모님은 우리 가족에게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은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야말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갈구하는 것은 안정과 인정 그리고 사랑이었다.



내 인생의 등대였던 외할머니는 동시에 나침반이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집을 떠났다. "설령 네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진다 해도 거기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해라."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새겼다. 어디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슬픈 기억으로 얼룩진 내 인생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스물여섯의 나이에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다. 아니,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내 아기를 갖는 축복까지 받았다. 아기가 뱃속에서 점점 자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인생의 가장 짜릿한 환희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나는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완벽한 삶을 누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어야 했다. 갓 태어난 아들에게는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붙였고, 비록 잠시나마 '삶이란 이토록 황홀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데이비드가 태어난 순간에 내가 느낀 기쁨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본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보다 나 자신이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데이비드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리고 온 뒤, 아기의 울음소리는 이내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조그만 뾰루지 같은 것이 데이비드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데이비드를 지켜보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몇 달 동안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와 각종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희망을 걸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있다는 믿음과 이제부터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이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고통으로 뒤바뀌어버렸다. 데이비드를 간호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결혼 생활도 파탄을 맞고 말았다. 너무나도 절망적인 또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외할머니의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령 네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진다 해도 거기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해라.'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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