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관심
하우석 지음 | 다산북스
1장 위기의 줄타기테레사 수녀와의 만남"안녕하세요, 슬이 아빱니다." "어머, 슬이 아버님께서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이곳 사랑 유치원 원장 테레사 수녀입니다." "아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진작 한번쯤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원장수녀가 선우를 붙잡았다. "슬이 아버님, 괜찮으시면 잠깐 말씀을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원장수녀의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선우는 평소보다 늦게 출발한데다, 유치원까지 들르느라 이미 많이 늦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회사가 합병되면서 미국 본사는 한국 지사에 새 사장을 선임하였다. 한바탕 칼바람이 몰아칠 거라고 이미 모두들 짐작하고 있었고, 그 첫 신호탄이 바로 오늘 쏘아 올려졌다. "소식 들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선우는 무겁게 말을 건네는 김 부사장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힘없이 대답했다. "이선우 팀장, 자네 나와 몇 년 동안 일했지?" "10년입니다." 선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주목받지 못하는 소규모 광고회사에서부터 시작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광고회사로 만들기까지, 그리고 국내 최대의 광고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지금의 기업합병에 이르기까지, 선우는 김 부사장의 손발이 되어왔다.
"그래, 10년이지, 나는 지난 10년 동안 이 팀장을 보아오면서 자네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어. 자네는 늘 신속했고 깔끔했지, 열정을 낭비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이 팀장만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이 말이야. 최근의 저조한 성과만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닐세, 하지만 나는 자네를 믿네. 그 동안 함께 해온 정도 있고…. 알렉스 사장도 그 간 이 팀장의 경력을 보고 오케이 한 상태야. 조만간 자네를 다시 부를 걸세." 김 부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우의 일그러진 얼굴은 다시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팀장님,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무실에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팀원들은 선우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김인환 대리가 선우를 다그쳤다. "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희와 함께 정리해고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겠죠?" 머뭇거리던 선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과 함께 책임을 통감하지 못해 미안하네. 나는 다른 팀으로 엮이게 될 것 같네." 그러자 김인환 대리가 선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팀장님이 살아 계시면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어떻게 팀이 해체되고 팀원들이 정리해고 되는데 팀장님만 무사할 수 있습니까? 선원들이 다 죽었는데 선장만 살아남는 배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팀장님께서 우리 팀을 살리셔야 합니다. 팀장님 혼자 살아남겠다는 생각은 아니시죠?" 오영창 대리까지 김 대리의 말을 거들고 나왔다. "팀장님!" 잠시 침묵하고 있는 선우를 향해 팀원들은 한목소리로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이정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도 그러셨잖아요. 우리는 한 배를 탄 운명이라고, 내가 선장이 되어 인도할 테니 여러분은 폭풍우가 몰아쳐도 한 마음으로 뭉쳐서 나를 믿고 함께 해 달라고. 그 말씀은 그럼 거짓이었나요?" 순간 선우의 가슴에 알 수 없는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다. 선우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강산의 반란"당신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그런데 여보, 강산이가 학원을 모두 그만두겠다고 해서 걱정이네요."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글쎄, 제 딴에는 다른 길을 찾겠다는데…. 설득할 만큼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요. 나도 이제 지쳤어요." 지쳤다는 말에 강산이는 둘째치고 아내에게 먼저 화가 났다. "뭐라고? 당신이 집에서 뭐 하는 게 있다고 지쳐, 지치길! 애 하나 제대로 단속 못해? 강산이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야. 그럼 집에서 알아서 챙겨줘야 할 것 아냐?" "내가 하는 일이 없다고요? 그만 둡시다." 아내는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선우와 다투길 포기하고 서운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주방 쪽으로 갔다. 아내의 수척한 뒷모습을 보니 선우도 금세 후회가 되었다.
강산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왔다. 좋게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며 화를 눌러 삭이고 있던 선우는 막상 늦게 귀가하는 아들을 보자 참았던 화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야, 이강산! 너는 아빠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강산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지만 주먹은 불끈 쥐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더더욱 선우의 화를 돋우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연기를 배우겠다고? 이 녀석, 너 제정신이야? 밤낮 없이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깟 광대짓 하겠다고 돈까지 들여가며 학원을 다녀? 아빠가 전에도 말했지, 네 나이 때는 영화배우가 부럽고 연예인이 부러운 게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 세계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멋진 것만은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더 굴욕적이고 비참할 수 있다고!"
선우가 계속 다그치자 강산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대들었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연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아빠의 시선으로 모든 걸 재단하려고 하지 마세요. 저도 생각이 있다고요!" 강산의 눈빛은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글거리고 있었다. 선우는 그 눈빛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강산의 뺨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강산이 옆으로 밀려났다. 원망의 눈초리도 잠시, 제 아빠를 노려보던 강산은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강산아, 강산아!" 강산을 뒤따라가던 아내가 현관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모든 광경을 거실 구석에서 지켜보던 산하와 슬이가 쓰러진 엄마에게 달려갔다.
"제까짓 게 가긴 어딜 가? 당신도 저 놈 집에 들이지마!" 선우는 그때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아내가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빠,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빨리 와보세요!" 다급하게 부르는 산하의 목소리가 그제서야 들렸다. "여보, 정신 차려! 당신까지 왜 이러는 거야?" 아내가 깨어나자 아이들은 제 엄마를 부르며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은 제 엄마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아빠라고 여기는지 원망의 눈초리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선우는 그 눈길을 애써 외면한 채 방을 나왔다. "쓰러지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라고." 선우는 무너지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거실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과 다를 게 없는 거실이지만 마치 폭풍이 지나간 폐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선우는 폐허와 같은 집을 견디기가 힘들어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알렉스 사장과의 면담출근을 하니 알렉스 사장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이 선우 팀장, 김 부사장에게 얘기는 들었지요?" "네, 팀을 해체해야 한다고…." "노우, 노우! 팀 해체가 아닙니다. 팀은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단지 팀원들이 해고되는 겁니다." "그게 그 얘기 아닙니까?" "이선우 팀장은 그대로 팀장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팀원을 충원할 예정입니다." 알렉스 사장의 말투에 선우에 대한 신뢰감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었다면 선우도 그냥 이쯤에서 수그러들었을지도 모른다. 빈말이라도 그동안 2팀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을까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 이건 정말 토사구팽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억울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게 사실이었다.
선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물러나봐야 끌려 다니기는 매한가지였다. "저, 사장님, 저도 사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2팀의 해체는 팀장으로서 제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팀원들이 정리해고 되는 마당에 저 혼자 회사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팀원을 꾸려도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열의를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평가받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나 2팀의 팀원들 모두 스스로 사표를 들고 오겠습니다."
알렉스는 거침없이 말하는 선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눈빛이 또렷해졌다. "좋습니다. 기회란 좋은 거지요. 잘되면 회사 입장에서도 좋고, 잘 안되더라도 무리해서 정리해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 나쁠 것은 없겠군요. 한 달 후 제가 만족할만한 답을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선우는 팀원들을 불러모아 사장과의 면담내용을 말해주고 나서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 달의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만 우선 오늘은 팀 분위기 쇄신 방안에 대해 토론을 하기로 하죠. 우리 팀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허심탄회하게 여러분의 의견을 내놓기 바랍니다."
한 달의 시간을 벌었다는 선우의 말에 모두 안도의 숨을 쉬긴 했지만 또 다른 고민에 빠져들었다. 주어진 한 달의 시간을 두고 어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오 대리가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팀 해체 건으로 팀장님을 다시 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전에는 팀장님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왜죠?" "팀장님도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팀장님은 저희를 실적 위주로만 평가하시더군요. 물론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조직의 생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유대도 필요치 않겠습니까?"
오 대리가 물꼬를 트자 여기저기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맞습니다. 팀장님은 저희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인사기록부에 나와 있는 내용 빼고 말입니다." 선우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고, 멍석을 깔아주니까 자기들끼리 노는 것만 같았다. 선우는 분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고야 말았다. "내가 왜 굳이 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한 달을 벌어왔는데? 그런데도 나만 문제가 있다는 거야? 이거 너무들 하는 거 아냐?" 몇몇 팀원들의 눈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망의 빛이 떠오르는 걸 선우도 보았다. 그러나 한 번 터진 화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이게 바로 우리 팀의 문제 아냐? 팀원들이 팀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고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일이 잘 되겠어?" 선우는 이렇게 말하고 팀원들을 노려보았다. 선우는 자신의 기분을 털끝만치도 생각지 않는 팀원들과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좋아, 오늘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고. 내부적인 문제는 차차 풀어나가기로 하고 내일까지 프로젝트 기획안 준비해서 전체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지. 김 대리하고 오 대리 중심으로 역할분담을 짜보도록 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선우는 서둘러 회의실 문을 큰 소리가 나도록 닫고 나와 버렸다.
때늦은 후회강산을 걱정하는 아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어 보였다. 집나간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병색이 짙은 아내가 더 걱정스러웠다. "엄마, 혹시 형 연기학원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은데…." 산하는 아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엄마에게만 그렇게 말했다. "맞아, 왜 그걸 생각 못했지? 연기학원이 어디더라?" 학원은 강산이 다니는 학교 근처 상가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물어보니 아마도 실습실에 있을 거라고 했다. 선우는 강의실을 지나 곧장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몇 사람이 무대 위에서 분장을 한 채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듬성듬성 앉아 있는 아직 앳돼 보이는 학생들 틈으로 강산의 얼굴이 선우부부의 시야에 들어왔다.
강산은 멀쩡했다. 그러자 선우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몸도 성치 않은 아내가 하루 종일 아들 걱정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건강까지 나빠졌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야! 이강산! 너 이리 나오지 못해!" 갑자기 터진 불청객의 고함소리에 실습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 선우부부를 바라보았다. 선우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너, 집을 나갔으면 빨리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학교는 왜 안 간 거야? 그래, 다 좋다. 하지만 네 엄마한테는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 지금 네 엄마 얼굴이 안 보여?" 선우는 막무가내로 강산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당신, 제발 이러지 말아요. 좋게 달래서 데려가도 되잖아요." 아내는 강산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고, 강산도 두 발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학원 시끄럽게 하고 싶어? 다시는 못 다니게 해줄까? 빨리 따라오지 못해!" "당신, 제발…." 선우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강산의 팔을 휘어잡고 나가려고 했다. 순간 아내가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 강산이 선우에게 확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너무 갑작스런 반동에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가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여보!" 실습실과 사무실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서 복도로 몰려 나왔다. 선우는 어제 정도의 실신이겠지 하고 얼굴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내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누군가 급히 119로 전화를 했고, 잠시 후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조은희 씨 보호자 되십니까?" 담당의사가 선우 앞으로 다가왔다. "네, 제 아내입니다. 그런데 무슨 병이라도 생긴 겁니까?" 의사는 이렇게 되도록 왜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느냐는 듯 힐난하는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저 실례지만 잠깐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선우는 맥이 탁 풀렸다. 자리를 옮기자는 건 강산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건 곧 아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궁경부암이라…, 초기일까 말기일까. 설마 말기는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흔들리면 안 돼지. 나까지 그러면 아내는 견디지 못할 거야.' 입원수속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병실로 온 선우는 강산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내의 병은 지난 며칠 동안 선우에게 닥친 일들 중 가장 타격이 큰 것이었다. 위기와 시련이 이렇게 한꺼번에 닥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정말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 건가….' 회사문제로 고민할 때도 선우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기가 살아남은 것은 남들 놀 때도 피나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며, 정리해고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팀원들과 함께 하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할 수도 있었다.
강산이가 연기를 배우겠다고 할 때는 행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로 알아들었고, 산하가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할 때도 아직 철이 없어 그런 거라고 외면했다. 슬이와의 문제는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원장수녀가 과민한 것일 뿐이라고 여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하니 뭔가에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선우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얼굴은 수척해지고 쇄골은 살점도 없이 유난히 도드라져 기력도 없고 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