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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산다는 것

김영익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프롤로그 - 프로란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



한 손님이 의사의 처방전도 없이 약을 사러 왔다. 쿠에(약사)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어찌나 손님이 고집을 부리는지, 쿠에는 속임수로 아주 약효가 뛰어난 약이라고 설명하면서 설탕 덩어리 를 손님에게 주었다. 며칠 후 그 손님은 쿠에를 찾아와서, 쿠에가 처방해준 약 덕분에 완전히 나았 다면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해댔다. 이 환자는 약사와 약에 대한 믿음과 함께 틀림없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자기 확신'으로 인해 완치되었던 것이다. 이에 쿠에는 '말 한마디로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면, 말은 사람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로 부터 몇 년 뒤 아주 간단한 공식 하나를 개발해냈는데, 그것은 설탕 덩어리 대신 간단한 단어들로 만들어진 공식 -날마다 모든 면에서 나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쿠에의 공식'이다.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진다는 것은, 49퍼센트로 일해서 0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51퍼센트로 일해서 100이라는 성숙을 가꿔 가는 삶인데,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점은 바로 이 1퍼센트에 있다. 즉 49로 일하는 것과 51로 일하는 그 작은 차이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1퍼센트는 영리함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 즉 한 분야에서 프로란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이면서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제1장 가난한 시골 소년, 거인을 꿈꾸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의 하루

나는 철저한 아침형 인간이다.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일어나자마자 막 도착한 두 개의 조간신문을 읽고 간단하게 맨손 체조를 한다. 아침 식사는 거르지 않는데, 꼬박꼬박 챙겨먹는 아침 식사는 지금껏 내 건강을 지켜준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5시 30분이 되면 집을 나서, 아침 6시 회사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세계 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관련 내용을 펀드매니저들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것이다.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각종 데이터를 직접 컴퓨터에 입력하는데, 왜냐하면 데이터를 다뤄야만 최근의 경제 및 증권 시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시부터 30분 동안은 모닝미팅을 갖는데, 전날의 기업 탐방 결과를 분석하고, 관련 자료를 영업 담당자들에게 제공하며, 영업 담당자들과 그 날의 시황과 투자 종목을 토론한다. 회의가 끝난 후 1시간 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세계의 정치 및 경제 변화를 파악한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 사이에는 주로 설명회나 강의를 다니는 일과가 많다. 주로 금융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기관(은행, 보험회사, 투자신탁회사 등)의 펀드매니저가 그 대상이다. 각 언론사 증권담당 기자를 대상으로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기도 하고, 연수원에서 영업점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일도 있다. 상품개발회의가 있을 때는 새로 선보일 펀드 상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도 참석한다. 각종 기관에서 강의가 끝나는 시간은 때로 밤 10시를 훌쩍 넘기기도 하지만, 강의가 없는 저녁에는 보통 8시 전후에 귀가하여, 30분 정도 학교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를 한 후 10시 무렵에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친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령'의 베스트 애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 하나, 매일 변하지 않는 꾸준한 노력뿐이다. 노력한 자만이 이 분야에서 '말년 운'이 좋다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리이며, 증권 세계를 넘어서서 내 인생을 아우르는 인생철학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수업료 낼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 갔던 전라도 깡촌의 초라한 나무꾼 소년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곧이 듣지 않으려 한다.



검정고시,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이력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우리 집은 마을에서 꽤 부유하게 살았다. 마을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늘 책을 펴놓고 글을 읽으셨고, 집에는 넓은 마당과 높은 토방이 있었다. 집안 살림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였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두 동생들을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물려받은 땅을 다 팔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빚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결국 나는 중학생이 되지 못하고 어린 나무꾼이 되었다. 그러던 1973년 어느 날, 2년 선배인 양만 형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 교회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가르쳐주는데 거기서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 왔고, 나는 거기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교회는 '산남교회'라는 곳이었는데, 칠판도 책상도 변변히 갖춰지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중학교 문턱에 이르는 첫 발자국을 떼게 해준 학문의 전당이자, 내 인생의 가능성을 제시해준 첫 무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생 처음 중학교 교복을 입을 수 있게 된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비록 정식 중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당시 나는 중학교 공부를 하는 어엿한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나는 중학교 졸업이라는 자격, 고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을 따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입자격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75년 8월 광주에서 검정고시에 합격해 정식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얻었다. 한참 지난 일이지만 내가 대신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소라고 자부하는 곳에서 나를 데려가려 했는데, 나의 이력서에는 중·고등학교 학력 난이 '검정고시'로 채워져 있었고, 이를 본 1차 면접 담당자가, 검정고시는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니 최고경영자 면담 때는 이력서에서 검정고시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연구소에 가는 것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왜냐하면 내 이력서에 찍힌 '검정고시'라는 네 글자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이력이기 때문이었다.



경제학의 세계에 매혹당하다

나는 검정고시 합격증을 들고, 이듬해 광주상고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서는 상고를 나와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상고 진학의 꿈에 들떠 열심히 들판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함평농고 교사인 작은아버지가 내 앞을 가로막고, "광주상고에 가려면 학비뿐만 아니라 자취할 집 얻을 돈도 필요할 텐데, 지금 우리 집이 그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차라리 가까운 함평농고에 들어가 장학생으로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줄이는 게 어떻겠느냐"며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셨다. 결국 다음해 나는 함평농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내 꿈은 농고에 그칠 수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과정이 대학진학에는 다소 부족했기에 혼자 공부하기로 했다. 다시금 검정고시를 통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고교생활은 1년 반으로 끝났다. 2학년 여름방학 때 대입자격 검정고시에 거뜬히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 직후인 9월, 누나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 해 전기였던 고려대학교와 후기였던 성균관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2년 동안의 독학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만을 절감했다. 다음해 다시 서울대 입학의 꿈을 품고 당시 입시 명문 학원이던 대성학원에 들어갔지만, 예비고사 성적이 서울대 상위 학과에 들어갈 만큼 되지 못했다. 아울러 금전적인 문제도 여의치 못해, 나는 학비가 싼 국립대학인 전남대학교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런 현실과 꿈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괴리와 반복된 좌절을 통해 나는 점차 현실과 경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는 학과를 결정하는데도 자연스레 반영되었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국문학이나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직장에 취직해 어머니의 생활고를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에, 문학 공부의 소망을 접고, 상대적으로 일자리 잡기가 유리하다는 상과대학에 주저 없이 원서를 넣었고, 1학년이 끝날 무렵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2학년 때 처음 들은 경제원론이라는 과목은 첫 수업부터 '바로 이거다!'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매력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대학에서의 경제 공부를 통해 나는 경제의 기본 원리뿐만 아니라 사고의 다양성을 배울 수 있었다. 참고로 교재 중 하나인 사무엘슨 교수의 『경제학』서문에는 왼쪽에서 보면 산양의 머리, 오른쪽에서 보면 새의 머리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같은 경제 현상이라도 다른 이론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세월이 흘러 경제 분석가가 된 나는 매일 수많은 경제지표를 분석하고 전망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다양한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맨 처음 경제학 입문서에서 공부했던 사무엘슨의 그림을 다시 떠올리면서, 나와는 다른 시각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가난 이상의 무엇, 거인을 꿈꾸다

돌이켜 보면 내 어린 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나보다 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던 것 같다. 막연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바람 이상의 무엇, 아마 내 속에는 이미 거인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뒤에도, 나는 더 큰 세계를 바라보았다. 경제학과를 졸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나아가 경제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된 것이다. 꿈이 생기자 전공 공부에 더욱 몰두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말 그대로 무미건조했다. 도서관과 과외가 대학생활의 대부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80년 7월 30일에 '학교교육의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이라는 충격적 조치가 발표되면서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다. 그런데 과외 금치 조치가 발표된 다음날, 한 학생의 부모가 나를 불러, 자기 집에 들어와 하숙생으로 살면서 학생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소위 '입주 과외'라는 불법행위였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학생 부모의 간절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생활비가 문제였다. 결국 나는 그 집에서 살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학비와 용돈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 그 집의 문을 들어서고 나갈 때마다, 나는 대문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어쨌든 도서관에 다니고 저녁에는 과외를 하며 남보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나는 조기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진로를 정했다.

기회는 잡는 자의 몫이다

금전적인 어려움은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속되었다. 형이 입학금과 하숙비를 지원해주었지만, 형의 사업이 점점 어려워지자 더 이상 형에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생에게는 장학금이 거의 없었고, 학비를 면제받는 유일한 방법은 조교가 되는 것이었는데, 조교는 대부분 서강대학교 학부 출신이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광두 교수의 조교가 될 수 있었다. 대학원 1학기 때 김 교수가 주최하는 경제학회가 있었는데, 이 학회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내게 주어졌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보충 설명하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서당을 열고 훈장을 할 때, 나는 옆에서 붓글씨 쓰는 법을 배웠는데, 그때 닦아놓은 실력으로 경제학회 회의 식순을 붓으로 썼고, 학회에 참석하는 교수들의 가슴에 달 명패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김 교수의 눈에 들었고, 김 교수는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서강대 학부 출신이 아닌 나를 조교로 임명해주었다. 늘 그렇듯 기회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고, 삶의 기회란 잡는 자의 몫이다. 어느 경험 하나라도 헛된 것이 없음을 나는 그때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을 한 학기 빨리 졸업했기 때문에, 대학원도 여름학기에 들어가, 대학원 졸업 역시 8월에 해야 했다. 한편 당시에는 석사장교 시험이 매년 3월에 한 번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험을 치기 위해 졸업을 한 학기 미루었는데, 뜻밖의 벽 -다음해 2월 원서를 접수하러 갔을 때 자격이 안 된다며 거절을 당함- 에 부딪혔다. 이 시험은 우수한 학생에게 자격을 주는 제도인데, 나는 대학원을 5학기 동안 다녔으니 공부를 잘한 학생이 아닌 것이고, 그래서 응시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스물 아홉 살이 되던 해, 늦은 나이로 논산 훈련소에 사병으로 입소했다.



늦은 나이의 군 입대는 내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석사장교 응시자격을 얻었더라면, 나는 경제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착오로 인해 그 길은 멀어졌고, 그것을 계기로 교수가 아닌 증권분석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늘 예상치 못한 복병들이 뒤통수를 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복병들의 공격조차 또 다른 기회로 변신시킬 수 있다.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세우고 있으면, 길은 늘 새로 열리고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제2장 내 인생 최고의 재테크, 한결같은 노력과 정성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 시작

대신증권에 입사할 무렵, 나는 취직과 관련해서 악조건만 두루 갖추고 있었다. 늦게 군대를 제대해 나이도 많았고, 나이 제한 때문에 입사원서도 못 낼 판국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신증권에 몸담게 되었고, 본사 영업부로 발령받았다. 가자마자 선배들에게 약간의 교육만을 받고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신입사원 주제에 선배들이 알려준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주가 전망을 해줘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주가가 상승하는 시기였다. 그러자 제일 먼저 가까운 친척들이 내게 주식을 사달라며 돈은 맡겼는데, 회사 선배들은 당시 5만 원이었던 증권회사의 주가가 10만 원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친척들의 돈으로 증권주를 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마자 많이 올랐다. 첫 실전 경험인 셈이었다.



그러나 축제는 참담하게 끝났다. 1989년 4월 중순부터 주가가 크게 하락하기 시작했고, 친척들이 맡긴 주식투자도 줄줄이 손해 -손실의 일부는 내 돈으로 보충을 해주어야 할 정도- 를 봤다. 나는 그제야 공부도 하지 않고 주식을 사고판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주식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주식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영업점에서 3개월 동안 근무한 뒤 나는 대신경제연구소로 발령받았다. 경제와 증권 시장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가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개인의 자기계발이 회사를 키운다

대신경제연구소 내에는 거시경제를 연구하는 경제조사실, 증권 시장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증권분석실, 그리고 기업을 연구하는 기업분석실로 나눠져 있는데, 회사에서는 내 전공을 고려하여 나를 경제조사실에 배치해주었다. 경제조사실에서 일을 배운 지 한 달이 지나자, 담당 실장이 나에게 1개월 이내에 통화수요함수를 측정하고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 것을 지시했고, 실장이 요구한 날보다는 보름 정도 늦었지만, '우리나라 통화수요함수의 추정'이라는 첫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계량분석에 대해서는 적어도 대신경제연구소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회사 내에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혼자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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