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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행복하세요?

알렉스 로비라 셀마 지음 | 21세기북스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의 함정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만나 "잘 지내?" 하고 물으면, "글쎄"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또, "그저 끌려 다니며 살아." 무슨 수레라도 끄는 건지, 자신을 마치 마소와 동격으로 놓고 있기도 하다. 더러는 "알잖아."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 다 열심히 살고 있잖아." 아니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어." "그럭저럭 흘러가."와 같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늘 이런 식의 대답이 나온다. 물론 누군가 나한테 안부를 물었을 때 나 역시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른다. 행복해야 할 삶을 끌려 다니며, 싸움하듯,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응, 잘 지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대방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명쾌하게 "그럼! 정말 잘 지내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한 상황이다. 결국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출근하기 위해 매일 아침 마지못해 일어나고, 직장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어내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짓눌린 채 하루 하루를 꾸려나가는 삶, 나의 능력보다 낮은 급여 때문에 심히 마음 아파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코가 꿰어 일만 해대는 기계라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걸까? 아니다. 대부분의 직장인, 현대인은 공감할 것이다. 우리의 불행과 관련 있는 말,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이 있는 그 말은 바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딱 세 단어로 이루어진 말이다. 언뜻 들어서는 별로 나쁜 말도 아니고, 또 그다지 거슬리는 말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다. 하긴 나도 별 생각 없이 듣고 흘려왔다. 하지만 그 말에 숨겨진 뜻을 곰곰 생각해보면 섬뜩해진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는 말에는 '인간답게 인생을 살아가기를 포기했다'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 말 그대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한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인다. 당연하다는 듯, 삶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죽지 않으려고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산다면 동물과 다를 게 뭔가?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먹고 사는 존재로 태어난다. 따라서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한 인생을 영위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한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은 먹고 사는 일에 일평생을 다 바치는 사람이다.' 우리도 최소한 멍청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않겠는가?





인생은 단순하다



고독, 사회적 스트레스, 고뇌. 이런 단어는 언제부턴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사회적 스트레스로 우울해하고 고독해하고 고뇌를 느낀다는 것이다. 즉, 발전이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이다. 난 왜 그동안 이런 모순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을까? 이 모순을 납득할 수 있도록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발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내 삶의 목표가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고, 또 모든 사람이 우울하게 지내는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것도 아닌 이상, 내가, 아니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인생 자체를 너무 복잡하게 꼬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삶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본질적으로 산다는 행위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먹고 사는데' 우선순위를 둔다면 삶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할 것이다. 일과 관련된 경험을 되돌아보면 극심한 경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직장이건 학교건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이라도 걸 정도의 노력을 쏟고는 결과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억울해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래, 난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이런 결과가 됐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내가 일을 즐겁게 했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안소니 데 메이요는 "살다보면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그 일을 웃어넘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겠다.



꿈은 둘수록 멀어진다



하루 일과가 한없이 늘어지거나 너무 벅차다 보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 때 '누군가'가 고객일 경우도 있다. 고객들과의 만남이라고 해서 사업상의 이야기만 나누지는 않는다. 때로는 고객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간혹 나도 사소하지만 답답했던 속을 털어놓기도 하니까. 어느 정도 친근감을 느끼고 상대를 알게 된 후에는 상당히 사적인 개인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은연중에 공범심리가 발동해 서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속 깊은 말을 나누기도 한다. 이렇게 속을 내보일 정도가 되면 사람들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 적나라한 모습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모습이고, 가장 진실된 감정이며, 평소의 형식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서로를 아주 가깝게 느끼도록 해주기도 한다.



난 오늘도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노력하고 헌신한다. 가족과의 즐거운 일상을 포기하고, 여가 시간을 포기하며, 자신의 건강과 감정을 돌볼 여유도 포기한다. 매월 말일에 은행으로 입금되는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가 되면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안정된 직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동안 점차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일조차 망각하는 것 같다. 어쩌면 생활비가 나오는 그런 직장, 남들의 존경을 받고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런 직위가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절실하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을 억눌러버리거나 저만치로 밀어 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특히 "내가 가진 재능과 축적한 경험을 어떻게 하면 나의 열정과 결합시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원치도 않는 일을 하면서 얻어낸 '안전'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나의 자질과 열정이 만났을 때 완성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럴 때라야 비로소 '직업'이라는 단어도 가치를 지니게 되고 창조적 역량도 발휘될 수 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억만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사람은 결코 '더 나은 미래'를 이유로 진정한 열망과 재능을 억누르고 감춘 채 돈부터 벌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뉴욕에 갔을 때 우연히 어느 건물 벽에 '생각은 낙하산과 같은 것이어서, 펼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라는 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 이제 내 생각을 활짝 펼쳐볼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활기찬 삶, 내가 진정 행복해짐으로써 타인까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타고난 자질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보아야겠다.





아플 시간조차 없는 현대인



바로 몇 시간 전에 사무실 복도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아니 스쳐지나갔다고 해야 맞겠다. 반가운 마음에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청했는데 시간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하자며 급히 사라졌다.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바쁜 삶, 이것이 행복일까? 여유를 못 내는 것을 행복이라 여겨야 할까? 아님 불행일까? 나는 여전히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종종 나는 오늘날 경쟁력을 갖추려면 유능해지기보단 "다급하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어원적으로 볼 때 '다급하게 굴다'와 '득달하다'가 같은 뜻이기도 하고, 또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너무 득달같이 달려가고 너무 뼈 빠지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그러고 살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로 믿고 나도 그렇게 득달같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감미로운 책 속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지혜로운 노교수 모리 슈워츠는 그가 아끼는 오랜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문제는, 모두가 서두르는 바람에 생기는 거야.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끝없이 그 의미를 찾아 질주하는 것이지. 다음에는 어떤 차를 살까, 어떤 집으로 옮길까, 어떤 직장을 가져볼까를 생각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것들도 다 공허하다는 걸 깨닫고는 또 다시 달려가는 거야." 누군가 모리 슈워츠 교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들어댈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 더 명료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압박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혹 나 스스로가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상식을 망각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타인과의 대화를 단절시켜버린 결과 이런 압박감이 생겨난 건 아닐까?



압박감, 그리고 그 사촌쯤 되는 우울증, 이 둘은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칼 구스타브 융은 사는 것답게 살지 않는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는 질병이라고 했다. 그는 "때로 우리는 샘솟는 욕구가 빚어낸 빈 공간을 채우느라 정신 없이 바쁘게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정수, 우리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그저 우리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조바심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조바심을 떨쳐버려야 내 삶을 더 사랑하게 되겠지.





마음의 소리를 닫아버린 우리



나 역시 '먹고 살기 바쁘다'는 덫에 걸려 지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봐야겠다.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을 간과하게 되는 법이다. 이참에 나도 잠시 내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내 안의 '침묵'이다. 언젠가 오랜 친구 하나가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구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그 의미가 피부에 와 닿는 문구였다. 바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은 곧 엄청난 소음이다"라는 말이었다.



온갖 아우성 너머로 가느다란 속삭임이 들려온다. 내면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언젠가 주인이 자신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설 자리를 마련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그 속삭임, 내 내면의 속삭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목소리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를 깨닫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보면서 말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게 된다. '재인식'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평생토록 역동적으로 달리기만 하면 어느덧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낯설게 느껴질 정도가 돼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흔히들 더 이상의 다른 대안이 없을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막다른 골목까지 가서 육체마저 병들고, 눈물 흘리고, 울부짖을 때가 되어서야 말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더 늦기 전에 지금 당장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안의 존재를 직시하고자 한다.



이제 나는 흘낏 보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내 내면의 목격자가 된 듯 나 자신을 관조할 생각이다. 그리고 조그만 수첩과 소형 녹음기도 하나 가지고 다녀야겠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가령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되는 모든 바람과 환상, 생각들을 기록하고 녹음할 것이다.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생 여정을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온통 나를 비롯해 열의에 찬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시간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자세일 것이다. 마이크 P. 니콜스는 '내가 남들과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는지, 혹은 단절되어 있는지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준은 바로 누군가 내 말을 경청해주고 있는 가이다.'라고 말했다.





상상 x 바람 = 현실



본부장님이 오늘 회의 시작 전에 돌발 선언을 했다. "나 오늘부터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알고 협조 바랍니다. 주변의 도움이 있어야 성공한다고들 하니." 회의 마치고 본부장님이 없는 자리에서 놀란 심경을 한마디씩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한다. 굳이 나이가 들지 않았어도 변화 자체는 두렵다. 원래 있던 것, 하던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겠지. 살아가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경우는 많다. 하지만 스스로 변화를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변화를 실천하는 것은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그런데 변화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금연을 결심하는 것부터 정말 일하기 싫은 직장에서 사표를 던져버리는 일까지 변화를 실천한다는 것이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무의식은 사람 내면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생각과 충동과 두려움의 무더기이다. 사람의 내면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부분이다. 사람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 마련한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따르니까. 무의식의 가장 핵심적인 특질은 일단 명령이 주어졌다하면 망설이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행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작용이 단순하기 그지없다. 마치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순전히 기계적으로 작동하니까. 이처럼 무의식은 불굴의 힘, 끊임없는 작동,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는 지속적인 움직임이다. 그 성격만으로도 의식보다 능력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진정으로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나의 무의식부터 점검하고 새롭게 프로그래밍할 필요가 있다. 나의 바람을 실현시키는 데 장애가 되고 있는 모든 요건들을 중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요건을 점검하다 보면, 변화를 위한 유익한 도구인 상상력이 등장하게 된다.



만일 내가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서로 결합시킬 수만 있다면,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무의식이 뒤에서 의식을 지원해줄 테니까. 우선 나는 무의식과 소통하여 의식을 활성화시키고 그 속에서 발생되는 의미들을 재정립시키는 과정을 추진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재정립에는 지속적인 불굴의 의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여건들이 충분할 만큼 심층까지 내려가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여건들을 대체하기까지 무의식은 숱한 반복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 <메트릭스>에서처럼 알약을 삼키고 또 다른 현실로 갈 필요는 없다. 다만 시간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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