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다이어 지음 | 21세기북스
들어가며 -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하여이 책의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내렸거나 아직 내리지 않은 선택의 관점에서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라. 그러면 자신의 현재 모습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당하게 자기 어깨 위에 올려놓게 된다. 적당한 양의 동기 부여와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주제는 현재의 순간들을 통제하는 일이다. 이는 행복을 만들어내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내가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한 순간뿐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경험을 방해하는 '눈가리개'를 없애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고 선택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1장 내 인생은 내가 지휘한다죽음은 끝도 없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주제이다. 그리고 삶은 제대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짧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라.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이렇듯 모른 척해도 되는 걸까?"
"그토록 끌어안고 놓고 싶지 않을 만큼 물질이 소중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필시 다음 몇 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열심히 살자. 나는 나다. 인생을 즐기자. 사랑하자.
'내 의지대로 살면서 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도 괜찮을까?'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앞에 두고 고민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라.
"대체 언제까지 죽어 있을 작정인가?"
이렇듯 죽음을 넘나드는 통찰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너무도 짧은 것이 분명한데 적어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컨대 나의 삶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
감정은 단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서가 아니다. 감정은 선택 의지가 들어가 있는 반응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으면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택하지 않게 된다. 일단 감정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똑똑함'의 길로 성큼 들어서는 셈이다. 그 길에는 신경질이라는 우회로가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 길이 생소할지도 모른다. 주어진 감정을 삶의 조건이 아닌 선택으로 여긴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핵심이다. 요컨대 우리는 주위의 상황이나 사람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주위의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이다. 거침없고 다부진 사람이 되려면 그 생각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일단 생각을 통제할 수 있으면 새로운 감정이 생겨날 것이며 거침없는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아무리 증상이 경미한 무기력이라 해도 그 무기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현재'와 밀착해 현재의 순간들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효율적인 생활의 핵심이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순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미래는 다가오면 맞아야 할 또 다른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우리는 끝도 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도록 강요당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현재의 즐거움뿐 아니라 영원히 행복을 피해다니는 태도다. 실행에 옮겨라!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길러라. 인생의 순간순간을 붙잡아서 음미하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 자신을 망치는 방식으로 현재의 순간들을 모두 잡아먹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영영 놓치고 만다.
제2장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우리는 모두 사회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 병은 주사 한 방 정도로는 도저히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시 '열등의식'이라는 전염병이다. 그 병에 대해 지금껏 알려진 유일한 치료 방법은 '자기사랑'이라는 약을 대량 복용하는 것뿐이다. 사회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 현재 순간들의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나 스스로를 소중하지 않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내가 가치가 없는데 어떻게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는가? 그런 내 사랑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면 내 사랑도 별 볼 일 없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일,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모든 일은 사랑을 듬뿍 받는 자아와 함께 출발한다.
자기사랑이란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만이 없다는 뜻이다. 알차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불평하는 법이 없다. 비위가 거칠다고, 하늘이 찌푸렸다고, 얼음이 너무 차갑다고 쓸데없이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평하지 않는 것이며, 행복하다는 것은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들을 놓고 한탄하지 않는 것이다. 불평은 자기 신뢰가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탐탁찮은 구석들에 대해 말하다 보면 그 불만은 계속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게 고작일 뿐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하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인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은 시간 낭비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묵묵히 자신을 칭찬해준다든가 다른 사람이 알차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등 자기사랑을 연습하는 편이 훨씬 보람된 일이다.
자기사랑 훈련은 먼저 마음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을 얕잡아보는 식으로 행동하려 할 때 그것을 즉시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때 자신을 돌이켜보면 자신의 행동 배후에 있는 사고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점검할 수 있다. 방법은 입 밖으로 소리내어 자신의 말을 고치는 것이다. "내가 방금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운 때문이 아니었어. 이번엔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라는 식으로. 이것은 자기사랑으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이다. 자신을 비하하는 그 순간을 인식하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면서 내딛는 첫걸음이다. 예전에는 습관적으로 자기 비하를 했더라도 지금은 변하고 싶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며 이제 실천에 옮기겠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결코 배신당할 염려 없는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생기 넘치는 행동을 할 일만 남았다.
제3장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일은 필요조건이 아닌 그저 희망사항이 되어야 한다. 박수갈채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치켜 세워주면 기분이 좋고 그런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인정을 받는 것 그 자체가 불건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인정을 '원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정말로 인정을 받게 되면 더없이 기쁘다. 그러나 인정을 반드시 '필요로' 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면서 무너져 내린다. 그때가 바로 자기 파괴적인 힘이 끼어 드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인정을 구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될 경우 자신의 상당 부분을 '외부인'에게 내맡기는 꼴이 된다. 인정을 필수조건으로 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그런 오류지대는 말끔히 제거해야 한다. 그런 잘못된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은 심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치달은 경우로, 나에게 전혀 득 될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행동의 바탕에는 이런 가정이 깔려 있다.
"자신을 믿지 말라. 먼저 다른 사람에게 확인하라."
우리의 문화는 남의 눈치를 살피는 행동을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강화하고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 사고는 우리 사회의 보루를 이루고 있는 사회제도의 눈엣가시인 셈이다. 이 사회에서 자란 이상 누구나 그런 속성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인정을 해주는 것은 매우 교묘한 조종 수단이다. 자신의 가치가 타인에게 내맡겨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동조해주지 않으면 허깨비나 다름없으며, 이는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어도 의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런 바람직한 행동에는 '이기적이다', '무심하다', '제멋대로다' 등의 꼬리표가 붙는다. 우리를 종속적으로 매어두기 위해서다.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보라. 요컨대 우리는 결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 사실 50% 정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도 꽤나 성공한 것이다. 세상에는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타인의 말의 절반 정도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실은 대통령 선거만 봐도 알 수 있다. 압승을 거둔 선거라 해도 반대 유권자의 비율이 44%에 이른다. 이 비율이 정확하다면 의견을 개진할 때마다 반대에 부딪힐 확률은 50 대 50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반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처받거나 동조를 얻기 위해 즉각 의견을 바꾸기보다는, 그저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50%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겠거니 생각하면 된다. 나의 느낌, 생각, 말, 행동 하나하나에 늘 어느 정도의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두면 실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제4장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뗀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가? 이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분명 과거에 매어 있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어떤 말을 써서 표현하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자. 남들의 시시껄렁한 평판들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가 그대로 표현하지는 않는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용어들이 해로운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다. 꼬리표를 붙이는 그 행위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나의 성장을 방해한다. 현상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꼬리표라면 그것으로 됐다. 그러나 자신이 붙인 이런저런 꼬리표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바로 변화를 가져볼 때다.
어떤 종류의 활동을 피하고 싶거나 성격상의 결함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면 으레 꼬리표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분명 자신을 변화시키기보다 꼬리표를 붙이는 편이 훨씬 손쉬운 일이다. 어쩌면 부모나 선생님, 이웃, 조부모 등 어렸을 적 자기에게 영향력 있었던 어른들 때문에 그런 꼬리표를 붙이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꼬리표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게 되면 자신의 현재 생활에 대한 통제권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 넘겨주게 된다. 그들을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은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위한 알리바이를 교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별것도 아닌 시시껄렁한 보상이다.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게 해주는 보증서를 제공받는 정도라고나 할까. 만일 꼬리표를 사용하는 것이 '문화'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손쓸 도리가 없을 테니까.
우리의 꼬리표들은 모두 후천적으로 몸에 밴 회피 방식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타고난 본성' 같은 것은 없다. 그 말 자체는 사람들을 멋대로 분류하고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내 선택의 총화이며 내가 간직한 꼬리표들은 모두 '지금까지는 그랬지'라는 새 꼬리표로 바꿀 수 있다. 이 장 첫머리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떤 말로 표현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 붙인 꼬리표나 내가 스스로 붙이고 다닌 꼬리표와 전혀 관련 없는 참신하고 멋스러운 꼬리표를 생각해 보라. 하도 써서 닳고닳은 넌더리나는 꼬리표들 때문에 인생을 알차게 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꼬리표들은 몰아내야 할 악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도 그런 꼬리표를 달아야겠거든 이런 꼬리표는 어떤가.
"나는 꼬리표를 떼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꼬리표 아닌가.
제5장 자책도 걱정도 없다일생을 통해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감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섣부른 걱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걱정과 자책감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이 두 오류지대를 살피다 보면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자책감과 걱정은 한 오류지대의 양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책감은 '과거'에 행한 어떤 행위의 결과 옴짝달싹 못한 채 현재의 순간들을 잡아먹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걱정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일 때문에 현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 일은 자신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자책감을 느낄 수도 없을 터이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걱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걱정은 미래, 자책감은 과거에 대한 반응이지만, 둘 다 현재의 자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꼼짝 못하게 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한다.
자책감은 자신을 망치는 모든 오류지대 행동 가운데 가장 쓸모 없는 것이다. 자책감은 단연코 가장 많은 감정 에너지를 소모한다. 왜일까? 자책감이란 문자 그대로 '이미'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현재 옴짝달싹 못하는 감정이며, 아무리 자책해봤자 과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단순한 뉘우침은 자책감이 아니다. 자책감은 과거의 일 때문에 현재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기력의 정도는 다소 안절부절못하는 것에서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과거에서 배움을 얻고 어떤 특정 행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면 그것은 자책감이 아니다.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행동한 결과 현재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만을 말한다. 실수에서 배우는 것은 건전한 일이며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자책감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상처받고 안절부절못하고 우울해하면서 현재의 에너지를 무익하게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걱정을 해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걱정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또는 미래에 일어날 일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옭아매는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걱정을 미래를 위한 계획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경우라면, 혹은 더 알찬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그것은 걱정이 아니다. 걱정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 때문에 지금 어떤 식으로든 활력이 무디어지고 매사에 의욕을 잃은 상태만을 말한다. 현재가 바로 자책감이나 걱정에 사로잡힌 행위를 이해하는 열쇠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과거나 미래에 매몰되어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