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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의 충동

정진홍 지음 | 21세기북스
시도하지 않는 것도 실패다



1마일은 약 1,609미터에 해당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1마일을 4분 안에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당시의 통념으론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려 고집하면 결국 인간의 폐와 심장이 파열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장벽이었다. 세계 최초로 이 '1마일은 4분 벽'을 깬 로저 배니스터는 영국의 아마추어 육상선수였다. 사실 그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육상 1,500미터의 유력한 우승후보였지만, 경기에서 기대에 못 미친 4등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그는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만회해야 했고,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1마일을 4분 안에 도는 것이었다.

마침내 1954년 5월 6일 로저 배니스터는 1마일 경주의 출발선에 서서 1/4 마일 트랙을 죽기를 각오하고 네 바퀴를 돌아 결승점에 들어온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잠시 동안 그의 눈에는 모든 사물들이 흑백으로 비추어졌고, 산소부족으로 온몸의 기관들이 작동을 멈추는 듯 했지만 그 순간 그는 스스로 어떤 장벽을 깼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1마일을 3분 59초 4로 주파한 것이다. 인간 능력으로는 도저히 주파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마의 벽을 드디어 돌파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로저 배니스터가 4분벽을 깨고 난 후 잇달아 다른 선수들도 차례차례 4분벽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2년 만에 그 숫자가 300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1954년부터 인간이 갑자기 빨라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다. 달리기 능력이 개선된 것이 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다던 마음의 장벽을 한 젊은이가 깼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한계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로저 배니스터가 돌파한 것은 4분이라는 시간의 벽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심리적 장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의 1마일 기록 자체를 애써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기억하는 것은 로저 배니스터라는 한 젊은이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도전했고 마침내 끝장을 보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리더는 항상 도전의 출발점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 리더의 운명이다.



1919년 뉴욕의 호텔왕 레이먼드 오티그는 뉴욕에서 파리까지 중간 기착 없이 단숨에 날아가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혹한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 논스톱 횡단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일부는 목숨까지 잃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도전에 나섰을 때 그의 비행기는 간신히 앉을 자리 외에는 온통 연료탱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계산상으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아주 빠듯한 양이었다. 만약 비행 항로가 조금이라도 비껴 가면 바다 한복판에서 연료 부족으로 엔진이 작동을 멈춰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비행기가 순항하려면 비행기 자체의 무게를 줄여야 했다. 찰스 린드버그는 비행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낙하산까지 빼 버렸다. 죽기를 각오하고 비행에 나선 것이다.

마침내 1927년 5월 20일 그의 비행기는 뉴욕을 출발하여 33시간 30분 동안 5,800킬로미터를 날아 21일 밤 10시 파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의 성공으로 그는 일약 영웅이 되었고 <타임>이 선정하는 사상 첫 번째 '올해의 인물'이 되었다. 아무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단 한 방울의 연료라도 더 싣기 위해 낙하산마저 포기했던 그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각오로 도전의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밤을 지새웠고 마침내 홀로 대서양을 횡단해낸 찰스 린드버그,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삶은 저지르는 사람의 몫이며, 도전과 모험이 없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며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며 모험해야 한다. 그 모험과 도전 앞에 삶은 길을 열 것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가면 시내를 오가는 전차를 장식하고 있는 공익광고에서 한 동양여인이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닌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로 입단하여 1996년 수석무용수로 당당히 등극한 그녀가 발레단의 간판스타이자 슈투트가르트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몇 해 전 TV를 통해 본 그녀의 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뼈가 튀어나오고 발톱은 뭉개져 있는데다 발가락 곳곳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하루 15~19시간씩 한 시즌에 250켤레의 토슈즈를 바꿔 신을 정도로 참혹할 만큼 혹독하게 자기 자신을 몰아붙였던 맹연습의 결과였다.



만약 그녀가 동양인 최초로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1위를 차지했다는 이력에만 집착했다면, 그저 한 명의 스쳐가는 발레리나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는 연습벌레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발레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발레 이외의 다른 삶을 동경해 본 일이 없다는 발레리나 강수진. 예술은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깊은 감동을 줄 때 비로소 가치를 찾을 수가 있고, 그 깊은 감동은 혼의 몰입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는 강수진. 그녀는 몰입의 위대한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람이다.



언젠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테넌트 부인'이라는 이름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203만 2천 달러(우리 돈 20억 4천만 원)에 팔린 적이 있다. 이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명품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든 사람이 바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이다. 1644년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나 22세에 현악기 제조에 뛰어든 그는 9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0년을 명품 현악기 제작에 헌신했다. 그는 일생동안 1,200여 개에 달하는 악기를 만들었는데, 현재 700여 개나 남아 전해지고 있고, 이 중에서 연주에 직접 쓰이는 것은 채 50여 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 세계 연주자들을 매혹시키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매력은 그것의 마술적인 음색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인간 내면의 풍부한 감정표현을 담아내고 희로애락의 음색을 지닌 명품중의 명품으로 만든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스트라디바리우스만의 독특한 악기재료나 바니시(악기 동체의 칠)에 비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제작자인 스트라디바리의 완벽에의 충동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는 최고의 음색을 내는 현악기를 만들기 위해 숱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10년 이상 계속했고, 완벽에의 충동을 원동력 삼아 바이올린에 혼을 불어넣어 시대를 뛰어넘는 명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지 300년이 다 되어감에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진가는 해가 갈수록 더욱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은 신의 선물이다



'투르 드 프랑스'는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도로 일주 사이클 대회로 자그마치 3,500 킬로미터를 3주 동안 달려야 하는 죽음의 경주이다. 이 대회를 7연패 한 랜스 암스트롱은 25세 되던 해인 1996년 고환암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전도유망한 사이클 선수였지만 암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더구나 암세포는 고환에서 뇌와 폐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치사율 49%의 고환암 환자였던 그는 고환 한쪽과 뇌 조직 일부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암과의 사투 끝에 다시 사이클 페달을 밟을 수 있게 된 그는 1999년 인간 한계의 시험장이자 죽음의 레이스라 불리는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극적으로 우승했다. 이를 지켜본 언론들은 기적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2005년까지 매년 이 대회에 출전한 암스트롱은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면서 신화를 만들게 된다.



어떻게 해서 죽음의 레이스에서 내리 일곱 번이나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언론은 암스트롱의 놀라운 심폐기능, 감독의 완벽한 작전능력, 팀 동료들의 희생에 기반한 팀 플레이를 성공요인으로 꼽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단 1%의 희망만 있어도 달린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절반의 가능성만 있어도 할까 말까 망설인다. 하지만 그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주저 없이 도전했다. 그것이 사경을 헤매던 고환암 환자를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투르 드 프랑스 7연패의 주인공으로 만든 진정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변환시킨 마음의 연금술 때문에 그는 지금 우리 앞에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서 있는 것이다.



1965년 앨리슨 래퍼는 팔다리가 기형인 질병을 안고 태어났다. 그녀는 생후 6주만에 거리에 버려져 19세 때까지 보호시설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미술공부를 뒤늦게 시작하였다. 비너스상처럼 양팔은 쪼그라들어 있었고, 다리도 정상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았지만 입과 발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미술학교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뒤,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 화가 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장애를 작품 소재로 삼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이것은 신체결함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녀의 강철같은 의지와 지극한 예술혼은 세계인의 인정을 받았고, 2003년 올해의 여성상과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게 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정 내 폭력근절과 여성폭력 반대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펼쳤고,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월드 어워드 여성 성취상'을 받게 된다.



그녀는 현재 영국 서섹스에 거주하면서 육아와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작은 스펀지를 입에 물고서 다섯 살난 아들의 머리를 감겨주고 특수 제작된 유모차를 어깨로 밀면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에 빗대 현대의 비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그녀는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남들이 갖고 있는 팔다리는 없지만 앨리슨 래퍼의 삶은 오늘도 굳건히 지속되고 있다.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도전이 된다. 그녀는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나아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 중에 물러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의 지령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역사와 민주주의의 죄인이라는 혹독한 낙인이 찍힌 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날 행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대함은 행복 속에서가 아니라, 시련 속에서 태어납니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그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년 후 1994년 닉슨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두가 외면할 것 같은 장례식에는 당시 생존했던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참석했고, 그의 하야를 종용했던 <뉴욕타임스>는 그를 '패배를 패배시킨 사람'이라고 추모할 정도였다. 과연 2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일까?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역사연구에 골몰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특히 1992년 출간된 『기회를 포착하라』와 마지막 저서였던 『평화를 넘어서』 등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미·중 수교', '미·소 화해' 같은 닉슨 특유의 데탕트 정책이 동구 사회주의 블록과 소비에트의 해체, 그리고 중국의 개방을 유도해낸 밑거름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990년대 이후 초강대국 미국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빌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새로운 미국의 세대를 선언하는 정치적 제스처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데탕트의 주역이었던 닉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오명을 쓰고 백악관을 떠난 지 19년만의 일이었다. 닉슨은 그렇게 자신의 명예를 하나씩 회복해나갔고, 그러한 노력은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소재 닉슨의 기념관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그의 좌우명이 적혀 있다. 그는 과거의 패배에 발목 잡히지 않았고 패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한번 패배를 영원한 패배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패배를 다시 패배시킬 수 있었다.



한 신하가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가장 아끼는 보물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희망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희망은 가장 값진 보물이다. 여기 자신의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여성이 있다. 바로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이름을 딴 쇼에서 출연진과 방청객 276명 전원에게 한 대당 2만 8천 달러에 달하는 자동차를 선물하는 통 큰 이벤트를 펼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날 쇼에 참석했다가 꿈에도 생각 못한 자동차를 선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새 차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를 적어 제작진에게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오프라는 이들에게 새 차, 즉 꿈을 선물한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깜짝쇼를 해낸 오프라 윈프리는 1954년 미시시피 주의 코시어스코에서 가난한 흑인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신발 한 켤레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사촌오빠와 엄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사생아를 낳고 미혼모가 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게다가 마약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그녀에게 꿈이란 사치스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과 성폭행 그리고 마약에 찌든 깊은 수렁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새로운 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인생역전 프로젝트의 진정한 동력은 꿈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는 마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꿈과 희망이 갖는 치유력과 생명력을 자신의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 보여준 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실행으로 꿈을 되찾아 주고 있다.



10년 넘게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말이 있다. '하루우라라'라는 이름의 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6년 태어난 하루우라라는 나이로 봐서는 은퇴해야 할 처지의 말이다. 게다가 1998년 데뷔이래 한 차례도 우승한 적이 없는 경주마이다. 그것도 마이너리그급인 일본 도사현의 한 지방 경마장에서 120번 가까이 출전한 결과이다. 그런데도 이 말이 단연 일본에서는 인기이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우라라가 달리는 것을 보려고 일본 각지에서 사람들이 도사현으로 몰려들어 자리를 꽉 메운다고 한다. 사람들은 늘상 지기만 하는 경주마를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지기만 하는 하루우라라를 통해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희망을 발견하는 것일까? 사실 하루우라라는 다른 말에 비해 몸집도 작고 체력도 떨어지지만 경주에 임하면 반드시 한번은 전력을 다해 치고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린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하루우라라가 열심히 끝까지 달리는 모습을 통해 스스로 격려하고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매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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