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천재가 된 토리오
노무라 마사키 지음 | 위즈덤하우스
끝장 실의에 빠진 밤, 운명적인 만남토리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땅거미 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 토리오의 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앞질러 간다. 그는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에 온 것이다. 토리오는 대기업의 기획개발부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다. 머리도 좋고 일을 좋아하며 컴퓨터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회사에서는 매일같이 야근이 이어지는 바쁘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하루하루의 업무에서 성과를 올리려면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 '시간활용능력', '작업관리능력', '기획력', '실행력'은 필수다. 기획을 위한 '준비성'이나 '계획성'도 필요하며, 제출한 기획안이 채택되기 위해서는 '발표력'이나 '설득력' 역시 중요하다. 한편, 아무리 본인이 능력 많고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직장 동료나 거래처 사람들과의 '대인관계'가 좋지 못하면 일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직장이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 날, 토리오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오전 10시에 영업부의 주거래처인 '새한인터내셔널' 본사를 방문하여, 토리오가 기획한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부탁을 받았을 때, 토리오의 뇌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왜 영업부도 아닌 내가 가야 하지? 기획하기도 바쁜 내가 그 귀한 시간을 쪼개어 거래처까지 가야 하는 건가?' 하는 것이었다. 그럴 틈이 있으면 사장의 특명을 받고 착수한 신규 프로젝트의 기획서를 쓰는 편이 실적을 올리기에는 훨씬 나아 보였다. 하지만 토리오는 결국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토리오는 상대가 어떤 회사의 누구이며 어떤 방에서 발표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야 어찌되었든 발표할 내용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으니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레젠테이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서야 토리오는 겨우 준비에 들어갔다. 배부할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철저히 준비했다. 마무리작업인 스피치용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에는 토리오에게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기획서를 컴퓨터로 마무리짓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튿날에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끝내고 나서 해도 되지만, 토리오는 그 일에 빠져들었다. 한껏 공들여 만들다보니 이미 막차시간이었다. 부랴부랴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한 토리오는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 잠시 피곤함도 잊을 겸 인터넷이라도 해볼까?' 잠깐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새벽이 되었고, 그제서야 급히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동틀 녘이 되어서야 원고는 마무리가 되었다.
밤을 새워 준비를 끝내자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잠시 10분 정도 선잠이라도 자두자' 정신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회사에서 Y과장과 의논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토리오는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택시 안에서 Y과장에게 전화를 하니 "멍청한 놈!"이라는 Y과장의 화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토리오 때문에 프레젠테이션은 15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자료가 두 부 모자라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인사할 때, 참석 예정자 명단에는 없었던 계장과 담당자를 소개받았다. 생각해보니 그 두 사람 몫의 자료가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상대편 측에 자료의 복사를 부탁했다. 토리오는 유창한 말솜씨를 살려서 자신만만하게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K부장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 화면이 멀어서 글자가 잘 안 보이는군요." "나눠드린 자료에도 같은 설명이 있으니까 그것을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쪽도 글자가 작기는 마찬가지네요." 토리오 딴에는 종이를 절약하려고 몇 개의 슬라이드를 한 장에 축소하여 인쇄했다.
프레젠테이션은 계속되었다. 1장을 끝내고 나서 어둑어둑한 실내를 둘러보니, 모두 지루해 하는 표정이었고 심지어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Y과장이 귓속말을 했다. "아직 삼분의 일도 설명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반이나 지났잖아. 좀더 속도를 내게." 토리오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애써 작성한 원고를 건너뛰며 읽을 수는 없었다. 간신히 마지막 장을 끝내자, 시계는 이미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 있었다. K부장이 시계를 보며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했는데, 시간이 다 되어버렸구만." Y과장의 필사적인 설득으로 시간을 연장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프레젠테이션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미팅의 실패를 예감해서인지 Y과장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근처에 있는 고급 음식점에서 접대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토리오는 실패를 굳히는 참담함을 맛보게 된다.
프로 세일즈맨을 자부하는 Y과장은 먼저 토리오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며 상대방의 기분을 달래기 시작했다.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Y과장이 K부장에게 이런 화제를 던졌다. "요즘 바쁘셔서 오사카 댁에도 자주 못 내려가시겠네요?" 그 때 토리오가 끼어 들었다. "아, 부장님 댁이 오사카이신가요? 오사카에서도 근무하셨습니까?" "네에?" K부장이 당황한 듯한 얼굴로 토리오를 보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도쿄 사무소이고, 나는 오사카 본사에서 파견 나와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세한인터내셔널 본사가 오사카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 한마디에 K부장의 입가가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Y과장의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회사에 돌아와 있었다. 해질 무렵, Y과장으로부터 사내 메일이 들어왔다. '세한인터내셔널로부터 신제품은 거래하지 않겠다는 연락이 왔음'
길고도 암울했던 하루를 돌아보고 나니 역 구내방송이 귀에 들려왔다. 토리오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정 좌석을 찾아 1호차에 올라서자 너 댓 명의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통로에 서 있던 젊은 여인이 옆자리로 다가와서 앉았다. 자리가 많은 데도 왜 이 여인이 내 옆에 앉았을까 궁금하던 그 때, 아름다운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아, 예." "그런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예." "선생님은 무엇을 바라고 이 기차에 타셨나요?" "예?" 의외의 질문에 토리오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저 멀리 북국에 있는 늪에까지 가시면서 말이에요." 토리오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1장 여행길초면의 아름다운 여인이 내던진 뜻밖의 말에 토리오는 깜짝 놀랐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자신을 보면 '출장 가십니까?'하고 물을 수는 있어도 '무엇을 바라느냐'니, 당황스런 질문이다. 게다가 토리오가 놀란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이 여자가 내 행선지를 알지? 저 북국의 늪을?' 긴장된 마음과 달리 토리오의 입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저는 회사원입니다. 업무에서 좀더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제가 꼭 바라는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걸 이루려고 이 기차에 탔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세 가지 소원이라면요?" 토리오가 말을 멈추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확실히 토리오는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기회에 굶주려 있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실패담과 그 뒷일을 천천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영업부의 Y과장에게서 미팅 결과가 실패라는 사실을 메일로 통보 받은 것이 오후 5시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사태는 더욱 심각하게 흘러갔다. 상무가 Y과장에게서 중요한 거래가 성사되지 못한 경위를 보고받고는 격노하였다고 전했다. 상무에게 불려갔다 온 S부장이 큰 소리로 토리오를 불렀다. "자넨 말이야, 평소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에 안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그게 오늘 한꺼번에 드러난 셈이지. 자네는 회사원으로서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이야, 알겠나! 일을 하는 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세 가지 있네. 어디 가서 그걸 다시 공부하고 오게."
그렇다. 더구나 오늘과 같은 실패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오늘은 운 나쁘게 한꺼번에 표출된 셈이다. 이래선 안 된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많은 기술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세 가지 능력'이 없으면 결국 일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능력은 웬만큼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 세 가지가 부족해서 실패를 거듭하는 비즈니스맨이 어느 회사에나 넘쳐날 것이다. 잠시 상념에 빠진 토리오에게 그녀가 물었다. "그 세 가지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토리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즈니스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시간관리, 일의 우선순위 파악, 그리고 좋은 대인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토리오 씨는 부장님께 지적 받은 '세 가지 능력'을 갖추고 싶어 그 늪에 가려는 것이군요." 토리오는 솔직하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오는 자신의 고민을 기꺼이 들어주는 파트너가 생겼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때서야 그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고, 미하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토리오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S부장에게 질책을 받고 제자리로 돌아와 반성을 한 후에도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실의를 떨쳐보려고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열었다. 그러고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검색창에 검색어를 치고 있었다. '3가지 능력을 쉽게 얻는 방법' 그러자 뜻밖에도 사이트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푸른 늪의 신령'을 찾아가라! 그리고 한 시간 후, 퇴근시간에 맞추어 토리오는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마치 그 사이트의 문구에 홀린 듯 역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거기에는 북국의 숲 속에 살고 있는 신령을 찾아가면 자신이 원하는 능력을 세 가지까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금요일 밤에만 운행되는 문라이트 석세스 호를 타고 새벽녘에 도착하는 '늪의 숲'역에 내리면 된다는 것, 그리고 왕복 기차 시간표도 적혀 있었다고 미하루에게 말했다.
미하루는 왠지 무척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토리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동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첫째로, 그렇게 중요한 능력을 편하고 손쉽게 얻으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신령에게 구하려 하다니, 너무 안이한 생각 아닌가요? 또 하나는 너무 욕심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어요. 세 가지 능력을 한꺼번에 얻으려 하다니, 좀 뻔뻔스럽군요." "뭐 어떻습니까? 욕심 내지 않으면 이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없는 걸요." 거기서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면서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슬슬 눈 좀 붙일까요? 야간 기차여행은 아무래도 피곤할테니……." "그럽시다."
미하루가 작은 녹색 음료를 두 병 꺼내어 하나를 토리오에게 내밀었다. "알코올이 약간 섞였어요. 이걸 마시면 한잠 푹 잘 수 있죠. 걱정말고 쭉 마시세요." 조금 불안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토리오는 미하루에게서 받은 음료를 꿀꺽 마셨다. 점차 의식이 희미해졌다. 엄마의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미하루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귓가에 닿았다. "욕심은 금물, 세 가지 능력은 무리예요. 신령님이 주시는 건, 오직 하나죠."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토리오가 필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제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능력은 뭐죠?" "그것은…… 단 계 적 실 행 력." 미하루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토리오의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2장 북국의 숲에서'단 계 적 실 행 력…….'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눈앞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살짝 안개가 걷히는 사이로 낯익은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은 회사 근처에 있는 서점이 아닌가? 점심식사 후 잠시 서점에 들른 토리오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하나의 토리오'가 서 있는 곳은 자기계발서 코너다. '그래, 생각났어.' 저것은 몇 주 전 점심시간의 일이다.
저 자리에서 자신은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계적 실행력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단계적 실행력이라는 말 자체가 정말로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었다. 요컨대,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갖추고 있으면 좋다'는 정도는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래도 흐리멍덩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토리오가 선뜻 내키지 않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단계를 일일이 밟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워서 오늘날과 같은 스피드 시대엔 맞지 않는 것 같아.' 단연코 '불필요하고 꺼려지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앞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부지런히 짐을 챙겨 넣는 남자가 보인다. 그도 역시 '또 하나의 토리오'다. '아, 저기는 작년 이맘때, 미국에 출장 가기 전날의 내 방인데…….' 출장명령을 받았을 때, 토리오의 뇌리에는 꼭 해야 하는 몇 가지 일이 떠올랐다. 일을 진행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다음 네 가지가 아닐까? 첫째,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질 것. 둘째, 준비해두어야 할 '과제'를 점검할 것. 셋째, '마감시한'을 설정할 것. 넷째, 생각한 대로 완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질 것. 분명 그 시절의 자신은 그러한 단계적 실행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핏 다시 정신을 가다듬자 이번에는 캄캄한 시야 속에 어렴풋한 불빛이 보였다. 이곳은 그리운 어린 시절 시골 옛집의 부엌이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바쁜 듯이 움직이는 앞치마 차림의 어머니가 보인다. 식탁에는 막 튀겨낸 튀김과 따끈한 쇠고기 감자조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이 정성껏 차려져 토리오를 맞이하고 있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그런 솜씨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 안에 공정과 소요시간이 서로 다른 여러 작업을 동시에 해내기 위한 방법, 두 가지를 배웠다는 생각도 든다. 첫째,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할 때에는 '필요한 시간에 각각 맞추어서 병행'하는 것이 필수이다. 둘째, '작업에 애정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히 시간은 걸리지만 잔손질이 필요 없는 작업이 있다면, 사이사이에 다른 일을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디선가 경쾌하고 상쾌한 울림이 전해온다. 덜커덩, 덜컹, 덜커덩, 덜컹……. 토리오는 살짝 눈을 떠보았다. 정면에 낯익은 벽이 보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리창 밖으로 드넓은 대초원이 펼쳐진다. '그래, 기차를 탔었지.' 야간열차에서 잠이 들어 몇 가지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침이 찾아와서 눈을 뜬 것이다.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미하루가 생각났다. 얼른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아니? 미하루가 안 보여.' 혹 토리오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가 먼저 내린 것일까? 토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이크를 통하여 안내방송이 나왔다. 창밖은 아까의 초원이 아니라 깊은 숲에 덮여 있다. 늪의 숲역은 끝없이 펼쳐진 깊은 숲 속에 있었다. 내린 사람은 토리오 혼자였다. 저 멀리 땅 끝의 어느 무인역과 같은 분위기다.
목적지인 푸른 늪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그러자 돌연 눈앞의 시야가 트이더니 숲 속 저편에 푸른 물이 가득한 커다란 늪이 보였다. 그때였다. 저편 물가의 나무숲 틈에서 조금씩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토리오는 물가에 선 채 가만히 앞을 응시했다. 주변의 안개 빛이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하면서 엷은 핑크빛으로 변하였다. 그런데 그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새하얀 긴 드레스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토리오는 이내 알아보았다. 이분이 바로 푸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