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제가
둥예쥔 지음 | 시아출판사
제1부 반란 평정의 도 : 천하의 대권은 단 하나로 귀결된다강희제는 역사적 교훈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권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가 권력을 장악할 힘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송의 이종이 가사도를 위국공에 봉하고 조정의 전권을 넘겨준 일에 대해 논하면서 "황제가 천하의 중대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책을 많이 읽고 수많은 도리를 깨우치고 있으며 통찰력이 뛰어나다면,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권력이 자연히 아래로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소신을 가지지 못하고 흔들리면 신하에게 의지해 일을 결정하게 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점차 잃게 된다. 이 일이 바로 그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반란 평정의 도 1 - 정치가 바로 서는 길, 군신일체강희제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안정과 혼란은 모두 권력에서 결정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군신관계가 조정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고, 군주와 신하가 화합을 이루면 정치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강희제는 특히 자신의 권력에 대한 부분에서는 절대로 모호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이 매우 단호한 입장을 지켰다.
조직 내에서 무리를 짓지 말라강희제는 조정 대신들이 사사로이 붕당을 맺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다. 강희제는 붕당이야말로 군신관계를 어지럽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며, 황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붕당과 정쟁을 엄하게 다스리고 금지했다. 강희제가 폐단의 싹이 트기도 전에 큰칼을 휘둘러 강하게 대응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가슴을 쓸어 내렸고, 이로써 강한 경고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는 붕당 조직이 머리를 들 때마다 즉각적으로 그 싹을 잘라내고 붕당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붕당을 해체하는 과정에서는 핵심 인물과 추종자를 구분하고 심한 탄압은 피했으며, 만주족 관리들과 함께 붕당을 조직한 한족 관리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교육을 거쳐 다시 임용했다.
반란 평정의 도 2 - 무너뜨리지 않고 세우지도 않는다반란을 평정하고 국가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강희제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의지할 수 있는 힘을 확실히 확보하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보정대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정을 실시하면서부터 핵심 기구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을 단행하는 한편, 절차에 따라 점진적으로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해 민감한 문제를 자극하지 않고 중앙집권기구를 순순히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다.
권력 강화를 위해 특수기구를 설치한다강희제가 통치하던 시절 중앙 핵심 기구는 내정에 특수한 기구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남서방이다. 남서방은 강희제가 한족의 문화를 배우는 곳이자, 한족 사대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수단이기도 했다. 남서방의 관리들은 모두 한족 사대부들이었으며 고정된 편제나 정해진 인원수도 없이 순전히 황제의 필요에 따라 관리의 수를 마음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었다. 강희제는 남서방 한림들과 벗처럼 가깝게 지냈을 뿐더러 크게 신임하여 그들을 높은 관직으로 승진시켜주곤 했는데, 장영은 남서방 한림으로 재직한 지 3년도 안 되어 한림원 학사 겸 예부시랑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예부상서 겸 한림원 장원학사에 올랐고, 관직에서 물러나기 2년 전에는 문화전 대학사 겸 예부상서에 경연장관이 되어 남서방을 총괄했다. 강희제는 남서방을 통해 만주족과 한족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자신도 한족의 고전 문화를 배워 문화적·사상적·정치적 소양을 갖춘 뛰어난 통치자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한족 사대부들을 단결시켜 만주족과 한족간의 갈등을 크게 완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반란 평정의 도 3 - 은혜와 위엄을 함께 사용한다당근과 채찍, 즉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해야 한다. 강희제는 "천하의 모든 일은 어진 마음으로 행해야 하며, 쓸데없이 위협하고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 은혜로움이 없으면 민심을 다독일 수 없고, 위협하지 않으면 천하를 복종시킬 수 없다"라고 했다.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해 반란 세력을 돌아오게 한다강희제는 각 성의 제후와 패륵, 대장군, 장군, 총독, 순무, 제독 등에게 칙서를 내려 호남과 사천, 운남, 귀주 등에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 칙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회유 방법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반란군의 문무백관과 민병들에게는 조정에 투항할 경우 과거의 죄를 절대 묻지 않고 후하게 대할 것이며, 반란군 수장을 잡아오거나 병마를 데리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공적에 따라 큰상을 내릴 것이다. 이 어지를 선포해 짐의 관대함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그 후 전세가 최고조에 달할 때마다 강희제는 투항을 권유하는 칙서를 내렸는데, 어지를 미리 써놓고 전달하는 관리를 두어 수시로 하달할 수 있도록 했다. 반란군 소탕이 점차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투항해오는 반란군들에게는 다시 직위를 주어 청병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시켰지만, 후에 투항하는 병사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을 한 곳에 모아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고, 원할 경우 귀항조치하고 후방부대에서 일하게 하는 등 분산정책을 썼다. 강희제가 회유책과 강경책을 융통성 있게 사용했던 일화에서 강희제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반란 평정의 도 4 - 토벌과 포용을 병행한다소탕과 포용을 적절하게 병행해야 한다. 강희제는 대만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적이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투항하면 죄를 사해주기로 하고, 어르고 토벌한 후, 다시 달래는 전략을 사용했다. 강희제의 이런 전략은 오삼계의 난을 진압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강희제는 한쪽에서는 치고, 한쪽에서는 어루만지는 계략으로 적들을 갈라놓고 이 틈을 타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반란 평정의 도 5 - 완급을 함께 사용한다한 나라의 황제는 시시때때로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이 같은 문제를 처리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바로 나라를 도모함에 있어서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문제를 단숨에 처리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군사 반란이 전자, 몽고족에 대한 회유가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천하에 꿰뚫어볼 수 있는 일은 없다강희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적당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재였다. 상지신과 경정충 문제가 바로 여기에 속했다. 당시 호남 영흥이 수일 동안 오삼계 군대에게 포위당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상지신은 조주와 호남을 공격하라는 몇 차례에 걸친 강희제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상지신의 동향을 비밀리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지신이 여전히 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그는 상지신을 잡아 북경으로 압송해 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하자, 상지신의 아우 상지절은 병사를 일으켜 우군인 왕국동을 죽였다. 그리고 때마침 광서에 있던 오삼계 부대가 청군에 피해 광동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다시 상지신을 겨누었던 예리한 칼날을 거두고 상지신 수하의 병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거짓 어지를 하달했다. 상지신을 북경으로 부른 것은 사실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함이지, 밀고자의 말을 모두 믿고 상지신의 죄를 묻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과연 상지신의 병사들은 황제의 성은에 감격하며 의구심을 풀고 각자 가족들의 안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시기가 무르익자, 강희제는 드디어 상지신에게 중형을 내렸다. 강희제는 또 상지신 수하의 좌령관병 15명을 한군팔기로 편입시키고 수장을 다시 임명했다. 강희제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반란 평정의 도 6 - 군정을 융합시킨다군사와 정치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한다. 200년에 걸친 청의 역사는 만주족 팔기병들이 이루고 지켜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 이렇게 오래 지속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란군을 척결하고 백성을 감화시켜야 한다티베트의 평정은 강희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다. 그는 선대 황제들의 성과를 기초로 티베트 안정을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다. 강희제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일궈낸 티베트의 안정이라는 자신의 역작에 스스로 기뻐하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강희제는 무원대장군 윤제에게 군사를 이끌고 서녕에서 목로오소로 가서 티베트로 출정한 군대의 군량미를 관리하라고 명했다. 또한 호필이칸을 홍법각중 달라이라마 6세로 봉하고, 만주족과 한족 관병과 청해성 군대에게 그를 호송해 티베트로 떠나게 했다. 달라이라마를 호송해 티베트로 가서 중가르를 몰아내는 방법은 정말 절묘한 계책이었다.
티베트족과 몽고족들은 달라이라마를 숭배했으며, 이 땅에서 태어난 호필이칸을 달라이라마로 인정했으니 달라이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온다면 티베트족과 몽고족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쁜 일이 없었으며, 티베트와 몽고의 장수들을 이 군사행동에 동원시킬 수 있었다. 티베트 평정을 통해 티베트에 대한 관리를 강화한 강희제는 만주족과 몽고족, 녹기병 4천 명을 티베트에 주둔시켜 책왕낙이로 하여금 정서장군의 직무를 수행하고 티베트 주둔군을 통솔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의 티베트 주둔의 첫발이었다. 티베트의 평화는 강희제의 통일국가 수립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제2부 용병의 도 : 용병의 도는 기회 포착에 있다내우외환 속에서 크고 작은 무수한 전란을 지휘하면서 강희제는 매우 일관된 용병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병'은 강하고 맹렬하며, '유'는 유연하고 관대하니 유학으로써 군대를 통솔하면 강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갖출 수 있고, 병학은 실제를 중시하고 유학은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니 유학으로써 군대를 통솔하면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킬 수 있다.
용병의 도 1 - 인자무적이니, 이것이 바로 왕도다군대를 중시하고 함부로 전쟁하지 않는다. 나라를 지키는 도리는 덕에 있다. 덕으로 지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 강희제의 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무력은 불가피할 경우에만 사용하며, 천하를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덕으로써 어루만진다' 하는 것이었다.
백성을 살피지 않고 승리한 자는 없다용병은 백성을 쉬게 하기 위함이며, 전쟁은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다. 이는 전쟁에 대한 강희제의 기본적인 태도이자, 전략의 출발점이었다. 전쟁이 불가피한 경우라면 현재의 안정을 헤치지 않고 전체적인 전략을 통해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강희제는 전쟁에서도 인적 요소를 매우 중시하고 통치자라면 왕도를 통해 민심을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희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정치적인 일의 득실에 있다"라고 했다. 강희 재위 60여 년 동안 대규모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가 두터운 민심을 얻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용병의 도리를 "힘으로 지키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되고, 위엄으로 지키려는 자는 한 나라를 지킬 수 있으나, 덕으로 지키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라는 단 한마디로 표현했다.
용병의 도 2 - 편안할 때 위기에 대비하라강희제의 용병 원칙은 "예의를 갖춘 장수는 행군이나 전투 중에도 병사들이 목이 마르면 자신도 물을 마시지 않고, 병사들이 굶주리면 자신도 먼저 밥을 먹지 않는다. 날씨가 무덥거나 추울 때에도 병사들과 똑같은 차림새를 하여 병사들을 위로하라. 또한 장수는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상을 내리고, 죄를 저지른 병사에게는 벌을 내려야 한다. 상과 벌을 구분해야만 위엄을 갖출 수 있다" 하는 것이었다.
용병의 핵심은 상벌제도다강희제는 청이 중원으로 들어와 승승장구하며 북경으로 진격해 명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청군의 군기가 엄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상벌제도가 엄격하고, 병마의 실력이 뛰어나고 무기가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청의 군대는 규율이 매우 엄격해, 행군할 때 대열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고, 민가의 논밭이 짓밟혀서도 안 되며,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 문책했다. 하지만 중원으로 들어온 후에는 군기가 크게 약화되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많았다. 강희제는 군대는 기율이 세워지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으며,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도 대업을 이루는 사람은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군기를 집행할 때에도 강희제는 신상필벌, 즉 공을 세우면 상을 내리고, 죄를 지으면 벌을 내린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용병의 도 3 - 준비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모략'과 '독단'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황제는 독단적이지 않으면 위엄을 세우기 어렵지만, 무턱대고 독단을 부려서는 안 된다. 독단은 충분한 사고와 목표 달성을 위한 충분한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모략은 반드시 전반적인 영향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쳐야 하며, 일단 전략이 결정되었다면 의심하지 않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용병의 도 4 - 정확하게 판단하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강희제의 전략의 원칙은 기회를 잘 파악하여 전세에 따라 전략을 융통성 있게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기회를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현재 처한 상황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전투의 가장 선봉에 섰다.
기회 포착이 유일한 전략이다강희제가 뛰어난 군사가였다는 것은 그가 독단적이지 않고 모든 일을 어명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장수들에게 전략과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인정해주고 전장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삼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만에게 장사를 공격하라고 명할 때에도 그때그때 닥친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사용하고 어지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각지에 파견되어 있는 장수들에게 어지를 보낼 때에도 맨 끝에는 항상 '적절한 기회를 잡아 공격하시오', '장수들의 중지를 모아 공격 전략을 결정하시오', '상황을 보아 진격하시오' 등의 문구를 덧붙였다. 장수들이 전략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해하고 지휘의 주도권을 잡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용병의 도 5 - 인재를 제대로 알고 임용하고 일단 믿으면 의심하지 않는다역대 군주들 가운데 장수들을 아우르고 이용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이는 바로 강희제다. 그의 장수 다스림의 가장 큰 원칙은 바로 훌륭한 장수에게는 아낌없이 상을 내리고, 공을 세우면 높은 작위를 하사하며, 예의로써 대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병사를 이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강희제는 모름지기 장수란 병사들을 잘 통솔하고 전투에 능하며, 전술을 이용할 줄 알고 실전 경험이 있어야 하며, 군량미를 제대로 관리하고 군대의 일을 잘 이해하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무관, 심지어는 일개 병사들에게까지도 병서를 읽도록 명하고, 강희 49년에는 무과 시험 과목에 병법을 추가시켰다. 물론 강희 자신도 수많은 병서를 읽고,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