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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번의 프러포즈

조용모 지음 | 다산북스
1장 세상이 나를 밀어내고, 밀어내도



내 스물일곱을 삼켜버린 불빛


나의 스물일곱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병실이었다. 고개를 들자 간호사가 눈동자를 살피더니 의사를 데리고 왔고,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나는 하숙집 앞 골목길에서 내게 달려들던 1톤 트럭의 눈부신 전조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의사는 지나가던 방범대원들이 나를 발견해 데리고 왔다면서, 조금만 더 늦었다면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우선 다니던 직장에 연락을 해 사고가 났다는 걸 알리고 병가를 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일곱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의사가 새 목발을 들고 와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이 목발을 짚고 생활하셔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퇴원을 하던 날 병원 현관의 대형 거울에서 나는 낯선 타인을 보았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회사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퇴직금을 찾아 나오는 것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분노와 세상에 대한 야속함, 순식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허탈감이 끓어올랐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빠져 3년여의 세월을 거리의 폐인으로 보냈다.



살아야 할 이유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저곳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행여 어머니가 눈치 챌세라 소지품들을 표 나지 않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음속으로 예정한 그날이 왔다. 이른 새벽 찬물로 몸을 정성들여 씻었다. 입에 수면제를 한 움큼 털어 넣고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먼저 형님과 두 동생에게 내 몫까지 효도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이렇게 하직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말을 적었다. 그렇게 유서를 쓰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식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들인 것 같다. 그날 어머니는 연탄불을 갈다가 둘째 아들이 기거하는 골방 문에 귀를 갖다 댔고,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어머니는 열리지 않는 문을 부숴버렸다. 방정맞은 생각이라며 자꾸만 머릿속에서 밀어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급히 아버지를 깨워 나를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위세척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씌운 의사는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어머니는 모두가 떠난 병실을 지켰다. 사흘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렇게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간절한 마음으로 내가 다시 깨어나기를 기도하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만 사흘이 지난 저녁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살아난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는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모두가 빌려 쓰는 목숨이고 언젠가는 죽음의 계곡으로 가게 될 것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한, 그분의 두 눈에 다시는 이슬 맺히게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 이미 이겼다

사고 전의 내 삶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집안형편이 안 됐다. 그러나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신 학비를 줄여보려고 고등학교 진학 후 8개월 만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또 부모님이 무리해서 입학금을 마련해주신 덕에 소원하던 법대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살 돈도 빠듯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 주인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직원 겸 며느리에게 내보내라고 했다. 안 나가려고 버티는 나와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며느리,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 쏠렸고 내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 저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입니다. 저희 집이 가난해서 책을 살 돈이 없어 이렇게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습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청소도 하고 책 정리도 할 테니 그냥 책이나 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그 학생 책 볼 수 있게 그냥 놔두거라."며 허락했고, 그 후로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며느리도 내게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어느덧 시험날짜가 다가왔다. 1차 시험에는 무난하게 합격을 했지만, 2차 시험은 어쩐 일인지 계속 낙방이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여 얻은 결론은 결국 누군가에게 배워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천만 뜻밖에도 합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참한 심정이 되었다. 등록금이 쌀 20여 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못했지만 술 생각이 간절했다. 중학교 동창 한 명이 떠올랐다.

내가 술 얘기를 먼저 꺼내자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포장마차로 이끌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잔에 소주를 채워 단숨에 마시고 나니 속이 찌르르 떨려왔다. 서서히 나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마셔 본 술을 그렇게 들이붓듯 했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녀석은 쓰러진 나를 업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눕혔다. 그런데 내가 친구네 집에서 참고 참았던 넋두리를 쏟아낸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녀석의 아버지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건너오셨다. 내 술주정을 고이 참고 받아주시던 녀석의 아버지는 당신의 두 아들을 방으로 불러들여 앉혀놓았다. 내가 잠이 들자 녀석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봐라. 너희들이 얼마나 호강하고 사는지 알겠지? 이 친구 말을 마음속 깊이 잘 새겨 두거라." 다음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는 "용모야! 공부가 하고 싶으면, 서울에 가서 가정교사 자리 한번 찾아봐라."라고 말해 주었다.

처음으로 맛본 내 세상

친구 녀석이 준 돈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 영등포 역에 내려섰을 때는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서울은 내 땅이 아니었다. 근 닷새를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기차표를 사고 남은 돈으로 하루에 겨우 빵 한 개 정도를 사 먹으며 근근이 살았다. 물론 잠은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잤다. 그런 생활을 한 지 일주일쯤 되던 날, 낯선 두 사람이 "자네 혹시 취직하고 싶은 생각 없나?"며 나를 유혹해, 주점 옆에서 구두를 닦으라고 했다. 곧이어 공부하러 서울에 왔기 때문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나에게 그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며칠을 굶다시피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처지라 그 충격에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두 사내는 쓰러진 나를 구둣발로 자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결에 돌을 집어서 두 사내 중 한 명에게 던졌다. 돌은 사내의 목을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피가 튀었다. 이때다 싶어 벌떡 일어서는데, 한 사내가 나를 잡아챘다. 그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악에 받친 내가 그 사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는 "억울하면 언제든 찾아 와라. 영등포 역전에서 기다리겠다."라고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경찰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경찰서로 연행된 나는 조서라는 것을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진술한 사내들의 조서를 보니, 그들은 어느새 나를 노상강도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둘이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나타나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만 믿고 나를 노상강도로 몰아붙이고 있는 경찰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사내들은 가벼운 훈방으로 풀려났지만 나는 즉결에 넘겨졌다. 벌금 3,000원과 구류 3일이 선고됐다.

구류를 마치고 나오는 날 형을 내린 판사실을 찾아갔다. 우선 판사를 안심시킨 후, 두 사내를 만나게 된 경위와 구두통 얘기며, 먼저 맞았다는 얘기를 빠르게 설명하고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판사는 밖에다 큰 소리로 나를 끌어내라고 말했다. 그러자 덩치 큰 남자 둘이 들어와 나를 끌고 나가려 했다. 나는 있는 힘껏 합격통지서를 판사 앞으로 던지며 외쳤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오직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했다가 이런 꼴을 당했습니다. 제 말을 좀 믿어주세요!" 판사는 내가 던진 합격통지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끌고 가던 두 사내를 제지했다.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그간의 사정과 상경 후 어려운 처지를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보더니, "마땅한 곳이 없군. 우리 애들을 가르치며 잠시 머물게나"라고 권했다. 이것저것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선불로 받은 가정교사비로 학교에 등록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마치고 나는 마침내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내로라하는 사무관이 되니 세상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취직을 하고 집으로 내려간 내게 어머니는 "힘 있는 곳에 들어갔다고 사람이 달라지면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도록 해."라고 충고해 주셨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매달 월급을 쪼개어 여관 한 칸을 빌려 놓고, 급사, 신문팔이, 우유배달부 등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의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여가 흘렀고 가르친 아이들만 해도 모두 60명 정도가 되었다. 그날, 사고가 나던 날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숙집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하얀 불빛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2장 세상을 향한 백만 번의 프러포즈



109번째 프러포즈 / 한 발로 밟는 페달 / 나에게도 직업이 생겼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살아나 퇴원한 뒤 나는 여벌의 생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롭게 부여받은 이 생명은 헛되이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장애인인 나에게 사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구인광고라는 광고는 모조리 체크해서 정성껏 입사지원서를 작성해 보냈다. 자그마치 109군데나 지원했지만 모두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말하기 연습이었다. 뺑소니사고를 당한 뒤 3년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마음에 응어리가 맺히니 말이 목구멍에 탁 걸려 나오지 않았다. 나는 웅변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웅변학원에서는 말더듬이 교정도 해주고 있었는데, 나의 상황은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혀도, 마음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준비가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의 힘만으로 페달을 돌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몇 바퀴 돌렸다 싶으면 금세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이제는 제법 자신이 붙어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도 수월하게 방향을 전환해 가면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자전거는 그렇게 나에게 잃어버린 한쪽 다리가 되어주었다.



110번째로 이력서를 낸 곳은 H 자동차보험이었다. 대리점을 모집한다는 이 광고에는 서류에 합격하고 열흘간의 교육을 거친 후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면접 없이 바로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회였다. 그 열흘 동안 나는 교육을 받으며 하루 세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그렇게 집중했던 덕분인지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험영업의 길에 들어섰다.



나의 출발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직책은 H자동차보험 익산 대리점 점장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점장이지,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나가야 했다. 사무실을 따로 얻을 여력이 없으니 집을 대리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에 면해 있는 벽에 '새한 대리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전화기를 한 대 들여놓았다. 나는 프로가 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향한 나의 첫 프러포즈 / 드디어 첫 계약을 따내다

보험설계사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맨 처음 '나는 남들보다 시작도 늦었고 몸도 성치 않으니,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승산이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라는 목표를 세웠다. 나는 매일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나의 애마,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예 도시락을 두 개씩 싸서 집을 나섰고 어디든 찾아갔다. 이처럼 마음은 천리 만리 앞서 달려가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미 보험에 가입했다며 손을 내저었다.



남들이 안 가는 곳, 가기 어려운 곳, 평소에 그냥 지나치는 곳, 내가 한 번도 안 가본 곳, 그런 곳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타깃으로 잡은 곳이 망성이었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인 망성은 익산에서 28km 떨어진 곳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까짓 28km, 왕복 56km 정도야, 계약을 따낼 수만 있다면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을 향한 나의 프러포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익산 근처에 팔봉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곳에 정미소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자'라는 다짐대로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1.4톤 트럭이 있었다. 보험을 여러 번 권했지만, 그분은 "몇 번 말해야 알겠나? 나는 이미 거래하는 사람이 있다니까."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당한다고 돌아서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그쪽 길을 지날 때마다 계속해서 그를 찾아갔다. 그분 역시 아무리 거절해도 내가 지치지도 않고 찾아가자 한두 마디씩 말을 받아주었고, 어떨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분에게 "사장님, 저는 보험만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고 처리까지 제 손으로 직접 합니다. 만약 사장님이 새벽에 사고를 당한다면, 지금 거래하고 계신 그 분이 현장으로 곧장 달려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저는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난다 해도 곧장 달려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얼마 뒤, 말이 씨가 됐는지 새벽에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분 친척이 사고를 당했는데, 사고처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자다 일어나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이런저런 정황을 살피고 말끔하게 사고처리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사실 내가 거래하던 그 영업자에게도 전화를 했었는데, 그 사람은 '이 새벽에 웬 전화냐'고 하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고 자네한테 전화를 한 건데."라며 고마워했다.



며칠 뒤 그분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사고를 당했는데 와서 좀 도와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또 부랴부랴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분이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밥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약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 자동차 보험료 한번 뽑아보게나!" 이렇게 나는 그 사람에게 첫 계약을 따냈다. 그 후로 그분과 나는 형님 동생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계약을 성사시킨 뒤 며칠이 지나 그분과 술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주선으로 막걸리 집 주인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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