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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협상을 말하다

김기홍 지음 | 새로운제안
1부 서희, 거란과 협상을 하다



서기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였다. 거란으로부터 항복을 요구받은 고려는 과연 어떻게 대처했을까? 고려는 993년 10월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하여 거란군을 막게 하였는데,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거란이 고려의 봉산군까지 진출하였고, 서희는 봉산군을 구원하러 출정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서희는 소손녕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데, 소손녕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항복을 권유받는다.



"대조(거란)는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고려)가 우리 강토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 대조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아직까지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치 않은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다. 지체하지 말고 항복하라." 서희는 소손녕에게서 이러한 '침략 이유'를 듣고 난 후, 전쟁이 아닌 협상의 가능성을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소손녕은 다른 요구는 하지 않고 고려가 '항복'하기만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서희는 서경으로 돌아와 소손녕에게 사신을 보내어 협상하기를 성종에게 요청하게 된다.



이에 성종은 이몽전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기로 하였는데, 이몽전이 화친협상을 위해 거란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 소손녕은 고려에 문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거란의 80만 군사가 도착하였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고려의 군신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그 뒤, 이몽전은 거란의 병영에 도착하여 거란의 고려 침략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듣게 된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을 대신해 벌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친하려거든 빨리 항복하라."



이몽전이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자 고려는 거란의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관료들은 각각 투항론과 할지론을 주장하였다. 투항론은 거란의 요구대로 무조건 항복하자는 것이고, 할지론은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和議)를 청하자는 것이었다. 성종은 이 두 주장을 들은 뒤에, 할지론을 채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때 서희는 단호히 반대하면서 거란과 일전을 불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서희의 이런 주장은 고려를 침입한 뒤 거란이 보인 일련의 행동들을 논리적으로 분석 -소손녕이 봉산(청천강 주변)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고 있는 점, 실제 전투를 하는 대신 80만이라는 숫자를 과시하고 있는 점,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 문서로만 의사를 전달한 점, 항복하라고 독촉을 거듭하고 있는 점- 한 끝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보인 이러한 행동들 때문에 서희는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만약 서희의 이러한 주장이 소수 의견으로 무시당했다면, 거란에 서경 이북을 떼어주는 것(할지론)으로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할지론에 반대한 서희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았고, 그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성종이 이처럼 서희의 의견을 고려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서희의 평소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성종이 서희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전직 민관어사인 이지백이 서희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는 점이다. 고려에서 이러한 의견조정을 거치는 동안 소손녕은 계속하여 고려의 항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몽전이 돌아간 후 오랫동안 답변이 없자, 소손녕은 드디어 안융진(안주)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대도수와 유방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했다는 점과 전투에서 패한 거란이 보복을 하는 대신 오히려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들을 조금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안융진에서 고려가 승리한 사실이 갖는 중요성이다. 만약 안융진전투에서 패배했다면 투항론과 할지론이 더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희가 3차 협상에서 자신의 논리를 개진하는 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 거란은 안융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패배를 만회하려 하기는커녕, 다시 고려에 대해 항복만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근본 의도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고려의 항복', 즉 거란에 대해 더 이상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고려는 비록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거란을 완전히 굴복시킬만한 힘은 없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하여 성종은 장영을 협상대표로 파견해 화의교섭에 대한 거란측 의사를 타진하게 하였다. 장영이 거란 진영에 당도하자, 소손녕은 고려 측에 대하여 화의교섭 진행 대표자를 대신으로 격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2차 협상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거란이 화의협상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협상을 거부할 생각이었다면, 고려가 보낸 사신 장영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거란의 요구에 대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에 파견할 대신의 인선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중군사인 서희가 회담 대표로 갈 것을 자원하였다. 서희가 본격적으로 협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3차 협상을 통해서였다. 각종 사료와 자료를 참고할 때 서희와 소손녕의 협상과정은 세 단계 -상견례 과정에서의 신경전, 침략의 이유를 둘러싼 공방전, 협상이 끝난 뒤의 연회 참석 여부를 둘러싼 공방전- 로 구분된다. 이러한 협상의 단계는 각각 모든 협상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전 협상단계, 본협상단계, 후속협상단계에 해당된다.



먼저, 예비협상 단계인 상견례 과정에서의 신경전을 살펴보자. 이 신경전은 일종의 외교절차에 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손녕은 서희가 뜰 아래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였고, 서희는 나라의 크기를 불문하고 같은 대신끼리는 그럴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서희로서는 예비협상이라 할 수 있는 상견례에서 밀릴 경우, 본협상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서희가 선택한 전략은 '화를 내며 숙소로 돌아와서 누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침묵 혹은 무반응 작전은 일종의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take it or leave it)' 전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희는 1차(이몽전과의 협상)와 2차(장영과의 협상) 협상과정을 거치면서 소손녕이 외교절차상의 문제로 이 협상 자체를 파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따라서 소손녕의 무리한 요구에 'take it or leave it'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항은 서희의 주장이 비논리적 -소손녕과 서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님- 이지 않았기에, 소손녕이 막무가내로 자기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서희는 결국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냈다.



다음, 본협상 단계인 침략 이유를 둘러싼 공방전을 살펴보자. 7일 간의 협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본협상이었다. 본협상에서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이유와 그 이유에 대한 서희의 반론이 주를 이룬다. <고려사>는 이 본협상을 다음과 같이 짧게 기술하고 있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 소속인데 당신들이 침식하였다. 또 우리나라와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까닭에 이번 정벌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귀국의 동경이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으며, 그들은 완악하고 간사스러워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거기에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달한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하니, 그 강개한 말을 듣고, 소손녕도 강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담판한 내용을 자기 나라에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하였으니 군사를 철수시키라"고 하였다.」

서희의 협상가적 면모는 '이 의견을 당신의 왕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부분에서 더욱 빛나게 된다. 이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하다. 먼저 이 말은 예비협상과정에서 서희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 즉 '당신도 나도 모두 신하다. 따라서 내가 뜰 아래에서 당신에게 절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런 말로써 당신이 돌아갈 명분을 주었으니 당신 왕도 이 말을 들으면 만족해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속협상 단계인 연회 참석 여부를 둘러싼 공방전을 살펴보자. 본협상이 끝난 뒤 소손녕은 위로연을 베풀어 서희에게 참여하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서희는 '고려가 전쟁 중'임을 이유로 참석 권유를 뿌리친다. 협상가로서의 서희의 뛰어난 점 -소손녕의 연회 참석 요청을 일단 거절한 점 과 그 거절의 이유로 '전쟁'을 내세운 점- 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는 '당신이 이렇게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고려)의 왕과 신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즐길 수 있느냐'는 의사표현인 셈이다.



또 하나 후속협상의 과정에서 서희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뛰어난 특징은 바로 '융통성'이다. 서희의 융통성은 거듭되는 소손녕의 연회 참석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후속협상 과정에서 협상의 상대방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두면, 나중에 있을지 모를 재협상이나 협상의 이행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 서희가 이것을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못이기는 척 연회 참석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협상 상대방과의 관계 형성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서희가 소손녕과의 협상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고려 성종은 박양유를 거란으로 보내어 서둘러 국교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때 서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 땅을 회복한 뒤에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겨우 강 이쪽 땅을 회복했을 뿐이니, 강 저편의 땅까지 회수될 때를 기다려서 국교를 정상화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서희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소손녕과 협상은 타결되었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압록강 이북땅의 회복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다른 사신을 보낼 경우, 그 사신이 서희가 한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하거나, 혹은 서희와는 다른 태도를 보일 경우, 소손녕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종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으면 또 무슨 후환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파송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끝내 사신을 보냈다. 다행히 이 사신의 파송에도 불구하고 서희가 타결한 협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소손녕은 994년 2월, 협상 내용을 거란 성종의 재가를 받은 뒤 문서로 작성하여 고려에 전달하였다. 이 합의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고려와 거란이 교통하는 것 -고려가 거란을 받드는 것- 으로, 고려는 거란에 조근(朝覲:거란의 왕을 배알하는 것)과 정삭(正朔:고려가 거란의 달력을 사용함으로써 신민이 되는 것)을 하고, 둘째는 거란이 압록강 동편에 있는 여진의 옛 땅 280리를 고려가 영유하는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기 994년에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할 수 있었다.

서희의 협상으로 고려가 강동 280리를 수복하게 된 것은 성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거란의 연호인 통화(統和)를 도입하는 등 거란에 대해 사대하는 관계로 변한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투항론과 할지론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협상을 통하여 소기의 성과 -일방적인 항복을 하지 않은 점, 북진정책을 유지하면서 강동 280리를 수복한 점, 전쟁을 피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줄였다는 점- 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참고로 일반적인 협상에 대해 살펴보자. 협상은 '협상에 참여하는 양 당사자가 협상의 타결에 대한 서로의 기대를 일치시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정의에 내포된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 협상에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협상은 상호의존적(inter-dependence) 성격을 가지게 된다. 둘째, 협상에서 기대(expectation)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문에 기대를 변화시키는 방법 혹은 전략이 협상의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셋째, 협상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따라서 협상이 진행되는 각 과정을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협상을 위와 같이 이해한다면, 협상의 본질은 협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협상의 이익(gains from trade)을 나누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협상의 당사자들에게 돌아오는 몫을 결정하는 능력을 협상력 혹은 교섭력(bargaining power)이라고 한다. 그런데 협상 참여자의 몫을 결정하는 과정은 협상가들이 자신 혹은 상대방이 각각 협상 상대방에 대한 믿음(belief : 인간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서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을 의미함)을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달려있다. 결론적으로 협상력이란 협상에 참여하는 상대방의 협상 타결에 대한 기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한편 국가 간의 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부협상과 외부협상이라는 이중적인 협상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 간의 외부협상이란 협상 상대국의 협상가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외형적인 협상을 의미하고, 내부협상이란 이런 협상을 진행하기 전에, 그 협상과 관련된 쟁점을 논의하는 국가 내부의 의견수렴과정 혹은 입장결정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협상가 사이에서 행해지는 외부 협상은 각 협상가의 자국 내에서 행해지는 내부협상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부협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크게 압력단체, 여론, 행정부와 국회의 관계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서희의 협상 과정을 다시 분석해 보자. 먼저, 외부협상 차원에서 분석해 보자. 고려가 거란과의 협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서희와 소손녕 개인과의 협상 -이것이 외부협상이다- 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부협상에서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많은 사료들은 그 성공 요인으로 서희의 '세치 혀'를 강조하고 있다. '세치 혀'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서희의 언어와 관계되는 능력 -말하는 방법, 상대방과의 대화 기술과 함께 그런 말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등을 포함- 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희의 협상력은 단순히 말과 관계되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외의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능력까지 포함한다. 말과 관계되는 능력 외에 서희가 가진 뛰어난 능력은 그 당시의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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