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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는 생각을 깨뜨리는 12가지 심리법칙

토마스 바샵, 페터 프랑게 지음 | 예지
내 입맛에 맞는 인생을 찾아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올바른 삶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가에 대해 고민한다. 올바른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이며, 또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처럼 대단히 매력적인 일에 동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삶에 대해 매우 다양한 의문을 품게 된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그만큼이나 다양하다. 많은 철학자들은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수없이 많은 현인들이 올바른 삶에 대한 문제로 대단히 많은 고민을 했다. 보다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그 답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 있는가 하면, 삶을 삶 자체에서부터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편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대부분 같았다. "그 어떤 확실한 것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생은 짧다 : 사실 확실한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바로 인생은 짧다는 사실이다. 인생이 짧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필요한 사람은 종이로 된 cm줄자를 하나 구해보자. 줄자를 1m길이로 잘라 거기에 당신의 인생을 표시해 보자. 먼저 당신의 나이에 해당되는 cm만큼 줄자에서 잘라낸다. 이제 줄자는 처음보다 더 짧아져 있다. 그 다음 남은 수명을 예상하여 그 시점에 해당되는 cm만큼 잘라내라. 오, 이제 줄자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담배를 피우거나 규칙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비만이거나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줄자에서 각각의 사항에 대해 5cm씩을 더 잘라내야 한다. 이제 당신이 손에 쥔 줄자가 당신에게 남은 삶의 시간이다. 그만하면 당신이 앞으로 올바르게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자신에게 올바른 삶을 찾아라 : 내 자신에게 올바른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철학은 언제나 현명한 해답을 제시해왔다. 크리스티안 휘르흐테고트 겔러르트라는 한 계몽주의 독일 작가는 18세기에 그 대답을 이렇게 표현했다. "네가 죽을 때 너의 삶이 어떠했기를 바라게 될지를 생각하고, 바로 그렇게 살아라."



틀린 것보다 맞는 것을 먼저 본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어떤 사람들은 더 적게 누릴까? 왜 어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공의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놓치는 것일까? 영리하고, 어리석음의 차이일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시각의 문제이다. 곧 나는 어떤 안경을 쓰고 삶을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것을 먼저 본다 : 과연 자신은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쓰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다음의 덧셈들을 잘 관찰해 보자. - ① 1 + 1 = 2 / ② 2 + 1 = 3 / ③ 2 + 2 = 5 / ④ 3 + 3 = 6 - 자, 무엇이 당신의 눈에 먼저 띄었는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세 번째 셈일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답이 틀렸으니까! 여기서 당신은 금방 두 가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첫째, 당신은 계산을 할 수 있다. 둘째, 당신은 잘못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잠깐! 우리가 잘못된 덧셈을 주목하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일인가? 우리가 세 번째 덧셈에 집중하다 보면 특이하고도 반가운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곧 네 개의 덧셈 중에서 세 개의 덧셈은 올바르다는 사실이다! 비록 올바른 덧셈만이 우리의 삶에서 소용이 있다고는 해도 이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산에서든, 직장이나 결혼 생활에서든 마찬가지다. 우리의 지각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것을 먼저 본다! 언제나 불완전한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나머지 11개는 이상이 없다고 해도 하나의 커피 잔에 나 있는 금이 눈에 띄고, 평소 같으면 흠 없이 깨끗해야 하는 자동차 뒤의 범퍼에 난 긁힘이 눈에 띄고, 더구나 수프에 들어가 있는 머리카락은 눈에 너무나 잘 띈다. 모자란 것, 부족한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기뻐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없는 것을 보게 된다.



학교가 씌워준 부정의 안경 :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학교에서 부정적인 선택을 하도록 훈련된다. "넌 잘못한 거야! 그건 틀렸어!" 옛날에 학교에서 썼던 노트를 한번 들여다보라! 도처에 잘못된 부분이 빨간색의 강조부호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올바른 모든 것에 대한 칭찬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가 세상을 관찰할 때 쓰게 되는 이러한 부정의 안경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이런 안경은 세상을 단지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행동하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잘못과 실수에 집착하게 되면 그저 실수나 잘못을 피하려는 노력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실수와 잘못을 피하는 것을 통해서는 그 어떤 영웅적 행동도 나올 수 없으며, 또한 성공이나 행복의 순간들도 생길 수 없다.



진정한 낙관주의자가 되자 : 세상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지각하는 문제는 언제나 말 그대로 우리의 자유재량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물이 반쯤 담긴 컵으로 내가 낙관주의자인지 혹은 비관주의자인지를 결정하는 방법은 의미가 없다! 그런 방법에 따르면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언제나 낙관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만약 그 컵에 들어 있는 것이 내가 먹어야 하지만 먹기 싫은 음식이라면 어떠한가? 그런 경우라면 오히려 내가 컵이 벌써 반이나 비어 있다고 기뻐해야 낙관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가 바뀌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일을 어떻게 지각하는가는 현재도 나의 결정이며 앞으로도 나의 결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다.



보는 것을 얻는다 : "보는 것을 얻는다." 내가 자동차 한 대를, 그것도 벤츠를 사고 싶어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거리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그렇다, 벤츠만을 본다. 마치 그 외의 다른 자동차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갑자기 벤츠만이 많아진 것처럼 느낀다. 혹은 내 아내가 임산부라고 가정해 보자. 어느 순간 거리에는 온통 임산부뿐이다. 최소한 내 시각으로는 예비 엄마들 외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에 대한 나의 지각일 것이다. 벤츠나 임신이라는 테마에 나의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에 나의 지각이 변한 것이다.



틀린 것보다 맞는 것을 먼저 보라 :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은 신체장애자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걸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평가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 앞에서 나왔던 계산 게임을 이용해서 말한다면 인생에서 하나의 잘못된 덧셈에 관심을 집중하는 대신 다른 세 개의 올바른 덧셈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기 위해 먼저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을 앓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할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흔히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고, 이 현실을 우리가 지각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하나의 지각이 존재하고, 이것이 나의 현실을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나의 시각을 변화시켜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적합한 안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완벽하게 늦기보다 불완전하게 시작하는 게 낫다



왜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는가? 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의 모토는 이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전진!



두려움은 변화의 천적 : 두려움이란 사실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두려움은 우리의 본성을 깨우는 일종의 조기경보시스템이다. 그래서 델 수 있는 곳에는 손을 대지 않도록 해준다. 때문에 두려움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두려움은 인생의 최대 장애물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모든 새로운 것의 천적이다. 두려움은 감각과 사고를 차단시킨다. 두려움의 본질은 경직이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생길 수 없다. 두려움의 그늘 속에서 아이디어는 사멸되고, 사고는 메마르고, 창의성과 자신감은 가라앉으며, 손과 발은 마비된다. 두려움은 언제나 정체 상태를 유지하려는 생각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두려움이 나를 다스리는가, 내가 두려움을 다스리는가? 이런 문제들이 진정으로 중요할 뿐이다.



적금을 택하는 사람에겐 대박의 기회가 없다 : 스포츠계에서는 흔히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가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대부분 바로 승리다. 이런 규칙은 현실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패배가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패배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패배 속에서는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난점이 있다. 패배를 두려워해서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길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패배할 기회도 얻지 못한다!). 주가 폭락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식 대신에 예금통장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대박의 가능성도 사라지는 법이며, 복권 값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로또에 당첨될 수도 없다. 승리의 기회란 자신의 두려움을 이길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완벽을 준비하기보다 불완전하게 시작하는 게 낫다 : 두려움이 가장 강해지는 곳(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 약속되는 삶의 영역, 즉 이성과의 관계 속이다. 남자들은 이런 현실을 디스코텍에 갈 때마다 경험한다.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바에 앉아서 마치 브래드 피트와 같은 눈으로 폼을 잡아보아도 그 어떤 여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행동에 옮겨야만 한다. 그러나 맙소사,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건너편에 앉아 있는 멋진 아가씨에게로 훑어보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근사한 말이 필요하다. 절망적으로 머리를 짜내어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마침내 빛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근사한 말이 그 아가씨를 의자에서 일어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아가씨는 이미 춤을 추러 나가서 전혀 멋지지도 않고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와 아주 가까이 붙어서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남자에게는 춤을 추자고 요구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었을 뿐이다.



두려움이 한계를 만든다 : "한계선이란 없다. 사고에도, 감정에도 한계선이란 없다. 단지 두려움이 한계선을 만들 뿐이다." 스웨덴의 영화감독인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자기 한계선은 바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지금까지 해결해 본 적이 없는 과제가 생겼을 때 이렇게 말한다. 그 과제를 해내지 못하고 안정감을 잃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안에서 과거에 아무도 백만장자가 나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경험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유감스럽게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자가 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서 역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이 사실은 비로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변모한다. "우리 가문에서는 아무도 백만장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당신 역시 이 가문에 속하므로 부자가 되는 길이 막히게 된다.

이런 경우에 당신은 사고의 한계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대부분의 한계선들은 바로 그런 사고의 한계선들이다. 다시 말하면 비관주의와 자기 의심이 투영된 것이란 뜻이다. 이때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이런 한계선들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한계선들은 외부 현실의 장애물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 차단막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까?



불 위를 걷기 :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해마다 불 위를 걷는다. 비록 오늘날에는 관심을 모으려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하지만, 불 위를 걷기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정착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계속된 곳도 있다. 이런 모험은 마야나 인도, 고대 이집트, 뉴욕 등 세계 도처에서 실천되었고, 또한 실천되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의식이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불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뜨거운 석탄 위를 걷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두 가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이 성공할 때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어떤 종류의 근사한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배우게 된다.



첫 번째 지원자가 불 위 걷기를 신청할 때 당신 안에서도 호기심이, 일종의 망설이는 마음이 일어난다. '안 될 게 뭐람?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신에게는 두려움이 크게 밀려든다. 차례가 다가올수록 당신 안에서는 커다란, 아주 커다란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안 돼!" 갑자기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된다.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앞에는 단지 검붉게 타고 있는 기나긴 길이 있을 뿐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턱이 덜덜 떨린다. 상관없다! 결심은 이미 확고하고 당신은 이제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첫 걸음을 뗀다. 그러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단지 몇 초가 지난 후에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당신은 마침내 해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 상사에 대한 두려움, 주차장에 두려움, 승진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이 멀리 날아간 것 같다! 당신은 한 마리의 곰처럼 스스로 강해졌다고 느낀다. 때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은 결코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생존을 건 경주의 승리자 : 불 위를 걷기 같은 일은 당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단지 승리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만이 그런 일을 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한번 당신이 태어난 날부터 아홉 달 전의 그 날을 생각해 보라. 도대체 이 날에 어떤 멋진 사건이 벌어졌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주 작지만 이미 당신의 유전인자 절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따뜻한 생명의 물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들에게는 역시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약 50억 명의 동료들이 있고 모두 경쟁자들이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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