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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침

허중희 지음 | 황금물고기
서울시장 이명박



우리나라 샐러리맨들의 꿈이자 희망인『신화는 없다』의 주인공, 이명박 서울 시장. 현대건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12년만에 사장에 올랐고, 6개 계열사의 회장을 역임한 전문 경영인에서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그리고 민선 3기 서울특별시 시장이 되기까지.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면 한 편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같은 현대사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 국가 경영 무대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그의 삶에서 아침은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고,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이 함께 한 희망의 원천이었다. 오랜 습관으로 이어온 그의 건강한 아침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 아침의 치열했던 시간들, 그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다



나는 평균적으로 새벽 4∼5시면 일어난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것은 특별히 뭔가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삶의 한 방식이다. 보통 아침 회의가 8시에 있고, 조찬 행사가 있을 때는 7시 전에 집을 나서야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것에 비해서 그렇게 여유 있는 편은 아니다. 아침에 조금 여유가 있을 때는 그 날 진행할 업무와 관련된 서류들을 집에서 미리 살펴보기도 하고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기도 한다. 아내는 좋은 말씀을 기억해 두었다가 출근길에 나에게 들려주곤 한다. 시청에 나가 이런저런 복잡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아내가 들려준 성경 구절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고 단비와 같은 활력소가 된다.



어머니의 새벽 기도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던 아침: 사실 나에게 있어 아침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처럼 부지런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평범한 아침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일이었는데, 이는 내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식구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됐다. 어머니가 그 시각에 우리 형제들을 전부 깨워 놓고 새벽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기도는 독특했다. 당시 우리 집도 사는 게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남에 대한 기도를 먼저 드렸다. 그 후에 형과 누나들을 비롯한 형제들에 대한 기도가 길게 이어졌는데 맨 마지막인 내 기도는 늘 정해진 한 마디였다. "우리 박이는 튼튼하게 자라게 해주십시오."

대학 때는 3년 넘게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생활을 했다. 그 때는 새벽 4시에 통행금지 해제가 되면 바로 쓰레기를 치워야 했기 때문에 깜깜한 새벽에 뛰쳐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인 탓에 휴일이나 휴가를 갈 때도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같다. 심지어 외국 출장을 가도 현지 시각으로 새벽 4∼5시이면 눈이 떠진다. 그래서 습관이 무서운가 보다.

시장님은 환경미화원들의 보스?: 사실 나는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한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나의 아침은 생존을 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장사를 했기 때문에 준비를 하려면 당연히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장사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낼 여유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시작한 일이 일당 노동자 생활이었다. 달동네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보면, 사글세가 자꾸 올라가 결국에는 산꼭대기까지 방을 옮기게 된다. 그 꼭대기에는 화장실이 딱 하나 있어서 아침에 화장실에 가려면 30∼40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또 일찍 나가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 도저히 대학을 갈 형편이 안 되었지만 시험만 한 번 쳐보자는 생각으로 고려대학교에 지원했다. 그런데 덜컥 합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합격을 했다는 기쁨보다 당장 등록금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청소원(지금으로 말하면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나는 단번에 응했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이태원 시장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등록금과 입학금을 미리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인지라 앞 뒤 잴 것 없이 정말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한 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그 일은 결국 졸업할 때까지 계속하게 됐다.



그 후 2002년에 서울 시장에 당선되고 나서 나는 공무를 시작한 첫 날 새벽에 이태원 시장에 나가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청소를 하고 해장국을 먹은 적이 있다. 특별히 이유를 밝히지 않아서 당시 함께 청소를 하신 분들은 '왜 이 사람이 여기 와서 청소를 하고 밥을 사주나?'하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한 80대 노인 한 분이 오시더니 "이 사람이 우리 시장에서 청소하던 사람" 이라고 얘기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나의 새벽 방문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내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어, 서울의 모든 환경미화원들이 나를 자신들의 '보스'라고 생각하며 반가워한다.



깨진 사과와 어머니: 나는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가출을 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당시 낮에는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하고, 야간 학교를 다녀와서 밤에는 극장 앞에서 사과 장사를 했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리어카 위에서 켜 놓은 카바이드 불이 자꾸 꺼질 것 같아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과일이 다 쏟아져 뒹구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는커녕 길 가운데 리어카를 대 놨다고 오히려 혼을 내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당장 내일부터 장사를 못하게 할 것 같아 무조건 죄송하다고 빌었다.



그런데 차가 떠나고 난 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그만 내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난 날 힘들었던 일, 억울한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야간 학교를 졸업한들 뭐하나…….' 하는 생각에 일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훌쩍 집을 나가버리면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 동안 팔다가 남은 과일이 있어도 어머니께 한번도 갖다드린 적이 없는데. 그래, 비록 깨진 과일이지만 어머니께 갖다드리자. 어머니가 실컷 드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때 떠나더라도 떠나자.'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허겁지겁 리어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누군가 리어카를 세워 놓고 깨지고 뭉개진 과일도 모두 담아 놓았다. 그것을 끌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머니!" 하고 크게 부르면서 들어갔다. 그 날 난 처음으로 사과 한 봉지를 어머니 앞에 놓아드렸다.



그러고 난 후,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새벽이 왔는지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동안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공부하러 간 형에 대한 기도만 길게 하고, 나에 대한 기도는 짧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은 유난히 나를 위해 오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새벽 기도로 인해 나의 가출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데 며칠만 더 있다 가자.'하면서 자꾸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의 가출 계획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 새벽에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 되새기다 보면 어머니의 간절한 그 기도 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서로 협력해서 선(善)을 이루라: 아침형 인간이 반드시 좋다기보다는 자신의 신체 리듬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완전히 깨어 있는 시간에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비단 아침뿐만 아니라 하루 24시간이 모두 소중한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휴가 때, 서류를 숨겨 놓고 가서는 '내가 아니면 일이 이렇게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시대의 낡아빠진 방식이다. 지금은 어떻게 협력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시장이지만 시장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이든지 함께 해야 이루어진다. 결국은 팀워크인 것이다. 요즘 직장인들은 승진이나 보너스라는 대가가 있어야만 열심히 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보다는 내가 소속된 조직이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가져보자. 나보다 내가 소속된 회사, 조직, 나라를 먼저 생각하면 틀림없이 누구나 만족할 타협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한 양보와 협력과 조화 속에 나의 미래도, 나의 성공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새박사 윤무부



40여 년을 새와 함께 한 인생. 그야말로 새에 관해서라면 이 사람을 빼 놓고 얘기할 수 없다. 국내 '새 박사' 일인자로 통하는 경희 대학교 생물학과 윤무부 교수. 일찍 깨어나는 새를 닮아서 '아침형 인간'이 되었을까? 그의 생활 습성도 새를 많이 닮아 있다. 일상 생활과 에피소드를 새와 연관지어서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 진진하다.



새처럼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먼저 성공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먼저 찾아 먹는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종종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아침과 새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 늦잠을 잔다면 새를 제대로 관찰할 수 없을뿐더러 새를 알지 못한다. 40년 넘게 새와 함께 이어온 내 인생은 어쩌면 아침이라는 고요하고 풍요로운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새: 새는 동물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어난다. 새는 천적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본능이 있어서 잠을 오래 못 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의 모습을 관찰하러 가면 깊은 산중에서 새벽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곤 한다. 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라도 졸면 안 된다. 새의 상태와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카메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드디어 새의 생태를 포착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먹이를 찾아 날아가는 새의 부지런함, 항상 같은 계절에 나타나고, 같은 계절에 짝짓기를 하고, 같은 계절에 이동하는 철새의 정확함을 통해 나는 인생을 배운다. 비록 생긴 것은 볼품 없어도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새들을 보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생명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한 가지의 재주는 반드시 타고난다고 믿게 된다. 나는 새를 통해 인생을 배웠고 세상 이치를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 때 나의 성적은 대단히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한눈팔지 않고 부지런히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새를 통해 배웠다.



교수님은 새 대가리?: 7년 전, 산에서 병든 콩새를 집으로 데려다가 치료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치유가 되면 자기 사는 곳을 날아갈 줄 알았는데 이 콩새는 우리 집이 정들었는지 영 날아가지를 않았다. 그 후 지금까지 우리 아파트 베란다에 놓고 키우고 있다. 벌써 7년이나 되었는데 이 놈의 새는 내가 먹이를 주러 다가가면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깜짝깜짝 놀란다. 그야말로 '새 대가리'가 따로 없다.



"교수님은 늘 새와 함께 사니까 나중에 새머리처럼 되는 거 아니에요?" 새에 미쳐 있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묻곤 한다. 하긴 나 역시 '새 대가리'다. 나는 어떤 중요한 약속이나 일정을 수첩에 적어 놓고도 잊어버려 낭패를 당하곤 한다. 하지만 새에 관한 것은 몇 십 년이 지난 일이라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느 장소에서 언제 사진을 찍었는지, 새소리는 어떻게 녹음했는지 그 당시 상황을 세세하게 기억한다. 수 천 마리에 이르는 새의 개체 수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내 머리 속은 새로 꽉 들어차 있는 '새 대가리'인 셈이다.



새처럼 일찍 일어나서 명상하는 습관을 기르자: 나에게 아침 시간은 '건강과 여유'로 요약된다. 일찍 시작하는 아침이므로 서두를 필요도 없고 바쁘지 않으니 여유가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서재로 간다. 비디오 테이프, 필름, CD, 오디오, 카메라 장비 등 새에 관한 온갖 자료가 빽빽이 보관돼 있는 서재는 나의 보물 창고다. 방에 들어오면 먼저 책상 앞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고 '오늘 할 일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머리 속에서 하루 일과를 차분히 생각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새 스트레칭'을 한다. 새가 날아가기 전 기지개를 펴듯이 온 몸을 죽죽 펴주면서 활개를 친다. 잠깐이라도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 잠자는 동안 움츠려 있던 몸이 마디마디 깨어나면서 한결 가뿐하고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산으로, 들판으로 새를 쫓아다니던 섬 마을 땅꼬마: 요즘도 매일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4시∼5시다. 유년 시절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나는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서 7남매 대가족 사이에서 태어났다. 산골짜기의 우리 고향 마을은 해가 일찍 떨어진다. 그래서 저녁밥을 먹고 해가 지면 바로 자야 했고, 새벽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또한 부지런한 아버지가 새벽 4시면 형제들을 깨워서 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여명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산에서 소에게 풀을 먹이다 보면 새들이 주변을 이리저리 오가는 게 보였다. 내가 크게 기척을 내면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 모양이 참 귀여워 보였다. 새가 마치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새를 따라 수풀 사이로 쫓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산새를 잡아다 직접 집에서 키우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산으로, 들로, 바다로 다니면서 유난히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새를 찾아 검정 고무신을 신고 40리나 되는 산등성이를 넘다들다 보면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고 새로 산 고무신은 너덜너덜해져 신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맨발로 산에 오른다. 돌에 발등이 찍혀 피가 흘러도 그 때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산과 들, 하늘, 바다, 그리고 장승포에 사는 온갖 새들은 나에게 그야말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나는 못 말리는 '새 가족': 내가 난데없이 새를 공부한다고 하자 처음에는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고 경희대학교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학교에 입학한 나는 가장 일찍 등교하고 또 가장 늦게 교문을 나서는 학생이었다. 교수 연구실을 청소하며 늦게까지 이것저것 신기한 자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녔다. 새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새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해졌다. 새 사진을 찍고 새 소리를 수집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1976년부터 채집한 새 소리가 지금은 100여 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 사는 390여 종의 철새와 텃새 가운데 4분이 1이상의 소리도 담았다. 4,000장에 이르는 새 사진도 TV방송이나 교육용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기 위해 내 청춘이 수많은 4계절이 새와 함께 흘러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호기심, 이것이 지금도 내가 새를 찾아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는 '방랑'의 이유이다. 한밤중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새를 찾아 산 속으로 훌쩍 떠나는 나의 기행은 가족들도 못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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