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오리새끼의 출근
메트 노가드 지음 | 생각의나무
첫 번째 이야기 - 미운오리새끼"전원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여름철답게 밀밭은 노랗게 출렁거렸고, 귀리밭은 푸른 물결로 넘실댔으며, 초록의 목초지 곳곳에는 건초 더미가 쌓여 있었다." 「미운오리새끼」는 이렇게 사랑스런 전원 풍경으로 시작해서, 그보다 훨씬 더 목가적인 정원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프닝'과 '클로징' 사이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거부와 생존, 갈망과 학습을 체험하며 의도된 "개체"로 성장해 나가는, 몹시 격렬한 이야기를 목도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영웅의 "인생여정"이다. 미운오리새끼는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야기 내내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 그래서 우리는 그가 마침내 모종의 '근성과 줏대'를 보여줄 때 굉장한 놀라움을 체험한다. 그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그의 생존본능이 솟구치자 그는 학대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힌다. 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발현되자 순응을 거부한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의 진수인 "백조다운" 본성을 확인하자 스스로의 잠재력을 수용한다.
줄거리어느 여름날, 장원의 영주 저택을 둘러싼 연못 근처의 보금자리.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다. 새끼들이 하나 둘 알을 깨고 나오지만, 이상하리만큼 큰 알 하나는 도대체 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알의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놈을 보니 너무 크고 못생긴 새끼오리다! 어미 오리는 놈이 헤엄도 못치는 칠면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끼들을 이끌고 연못으로 향한다. 새끼오리들은 차례대로 풍덩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서는 우아하게 물 위를 떠다닌다. 미운오리새끼도 마찬가지다. "그래, 칠면조가 아니야!" 어미 오리는 안도한다. "내 새끼가 맞아!"
그러나 마당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과 닭들, 다른 새끼오리들이 자기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미운오리새끼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오리들은 미운오리새끼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암탉들은 부리로 쪼아대며, 심지어 모이를 주러 나온 계집아이마저 발길질을 해댄다. 미운오리새끼의 남매들은 고양이가 그 애를 물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미 오리마저 그 애가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절망에 빠진 미운오리새끼는 울타리를 넘어 늪지대로 도망쳐버린다.
늪지대를 떠돌던 미운오리새끼는 친절한 야생 거위들을 몇 마리 만난다. 그러나 갑자기 사냥이 시작되고... 거위들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물은 핏빛으로 물든다. 무시무시한 개 한 마리가 물을 첨벙이며 달려와서는 물어죽일 듯이 노려보다 그냥 가버린다. "내가 얼마나 혐오스럽게 생겼으면 사냥개조차 물어가지 않는 걸까!" 미운오리새끼는 극도의 공포감과 함께 절망감에 휩싸인다. 밤이 되자, 미운오리새끼는 늪지대를 벗어나 어느 초라한 농가로 숨어든다. 나이든 할머니가 고양이와 닭을 키우며 사는 농가다. 그 집에서는 고양이가 주인님이고 닭이 마나님이다. 고양이와 닭은 세상물정은 모르면서 현자인 척하며 사는 '우물안 개구리들'이다. 미운오리새끼는 '누구든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믿는 바와 다른 의견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운오리새끼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얘기만 옳다고 고집한다. 그곳에서 몸은 편했지만, 미운오리새끼의 내부에서는 바깥 세계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마음을 암탉에게 털어놓는다. 암탉은 놀고먹으니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드는 거라며, 바쁘게 움직이라고 충고한다. 그래도 미운오리새끼가 갈망을 접지 않자, 사리를 분간 못하는 철부지라고 쏘아붙인다. 고양이나 암탉, 할머니가 물을 첨벙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기대했던 게 잘못이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미운오리새끼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난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돌아온 미운오리새끼는 물을 헤치고 자맥질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여전히 그와 어울리길 거부한다. 어느 가을 저녁, 미운오리새끼는 하얀 깃털에 길고 우아한 목을 가진 한 무리의 새들을 목격한다. 다름 아닌 백조들이다! 그 당당하고 장엄한 새들은 화사한 날개를 펼쳐들고 따뜻한 기후를 찾아서 저 멀리로 날아간다. 미운오리새끼는 그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매력적인 새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겨울이 찾아오고, 불쌍한 미운오리새끼는 물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위를 헤엄쳐 돌아다닌다. 그러다 결국 힘이 다 빠져서 얼음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농부가 그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드디어 다시 돌아온 봄.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날개짓을 시험해본다. 날개는 '휙' 소리를 내며 강하게 움직이고… 어느새 그는 아름다운 정원 위를 날고 있다! 물에 내려앉은 미운오리새끼는 다시 예전의 장엄한 새들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새들이 날개를 부풀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게 아닌가!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흉측한 모습 때문에 쪼아 죽이려고 달려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미운오리새끼는 잔잔한 수면 위로 머리를 수그린다. 순간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그 자신도 백조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본래의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은 불편하다. 어느 정도의 안정과 편안함을 버리고 불안정과 격렬한 성장을 체험한 후 다시 한 차원 높은 안정과 융합으로 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0대 소년이 불안정기를 겪으면 우리는 그것을 정상적인 과정으로 보며 "사춘기라서 그렇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인에게서 불안정한 징후를 엿보면, 우리는 그것을 방종으로 보며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순응에 의문을 품고 깃털 몇 개를 곤두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 그리고 이 세계를 바라보는 보다 훌륭한 시각을 지닐 수 있다.
- 두목 행세하는 암탉에 맞서 자신의 주관을 유지하라 : 놀이마당의 학대와 늪지대의 폭력에서 탈출한 미운오리새끼는 할머니와 고양이, 암탉이 사는 농가에 들어간다. 그러나 고양이와 암탉은 통제권을 행사하길 원한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때면 늘 "우리와 이 세상은-!"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자기들이 이 세상의 반이라고, 더욱이 "최상의 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회사의 "두뇌"라고, 그것도 "최상의 두뇌"라고 생각하는 경영진과 다름없다. 혹은 경영진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며 모든 변화에 저항하는, 고집 센 직원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의 주변에도 이렇게 '두목' 행세하는 암탉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 중 한 명이 그럴 수도 있고, 시댁이나 처가 식구, 배우자, 친구, 동료, 직장 상사 가운데 '암탉'이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들 암탉의 '꼬꼬댁' 소리를 머리속에서 지워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 암탉의 '꼬꼬댁' 소리는 책임감을 앞세우는 현실적인 목소리다. 물론 이런 암탉의 현실적인 태도는 우리의 실용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까지 암탉에게 맡길 순 없지 않은가. 만약 인생을 이런 암탉에게 맡기면 우리는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도 갖지 못하게 되고, 너무 폐쇄적이 되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며, 적절한 세월이 흐르기도 전에 늙은이가 되고 말 것이다.
- 힘껏 날아서, 청명한 수면을 바라보라, 백조가 보이는가? : 어느 봄날 완전하게 성장한 그는 강력한 날개짓으로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난다. 문득 청명한 수면을 향한 그의 눈길은 자신이 경외하던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를 발견한다. 그 자신도 백조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릇된 정체성이 죽고 진정한 정체성이 탄생하는, 탈바꿈의 순간이다. 자신의 위대함에 접근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채 뭔가 비범한 것을 볼 때는 안전을 느끼지만, 막상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며 "함께 하자!"고 하면 겁을 집어먹는다. 스스로 그런 수준에 못미치면 어쩌나, 그래서 망신이나 당하면 어쩌나 두려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보다는 뒤로 물러서며 피하려 든다.그러나 생각해 보라. 비범한 뭔가에 개입 혹은 관여하거나 섞이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목도할 수 있단 말인가.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 전체를 통해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나름대로의 내적인 여정을 밟아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때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당신은 혹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암탉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숨기곤 하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이끌리며,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며, 누구에게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가?
- 잔잔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라 :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은 "너의 행복을 좇아라"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그 작고 잔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즉 '너만의 그 고유한 소명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소명을 따르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 속삭임은 우리를 뻔한 경력의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길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하고 있는 일이 불만족스러워질 때, 당신은 그냥 적응하고 불평하며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희망하는 경향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이미 가진 것을 "놀랍도록 창조적으로" 개선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그도 아니면 당신은 문자 그대로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버리는가?
두 번째 이야기 - 벌거벗은 임금님"오랜 옛날, 새 옷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잘 차려입는 일에 돈을 다 써버리는 임금님이 살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첫 줄은 이렇게 허영과 허식으로 외양을 가꿀 수도 있는 한편,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안데르센은 특정한 무엇에 집착하거나 특정한 외양을 가꾸는 것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 역시 말쑥한 차림을 좋아했고, 외모 관리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거짓된 허세"였다. 따끔한 충고를 담고 있는 이 동화는 결국 엉터리와 속물근성을 조롱하는 그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우리가 제도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동의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것을 얼마나 인정하는 척하는지, 그 거짓된 가면을 꼬집는 그 나름의 방법이라는 얘기이다.
줄거리임금님은 옷을 너무나 좋아해서 다른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임금님이 집무실에 있는 것이 일상사라면, 이 임금님은 "드레스 룸"에 있는 게 일상사다. 어느 날, 두 명의 협잡꾼이 도착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천을 짤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그 천은 성질이 특이해서 "지위에 걸맞지 않거나 허용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임금님은 지위에 적합하지 않고 현명하지 못한 대신들을 가려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그 천을 제작하라"고 명령한다. 성 안의 모든 백성들이 그 천의 신기한 힘에 대해 알게 되고, 과연 어떤 사람들이 부적절한 얼간이로 판명날 것인지 궁금해서 몸살이 난다.
얼마 후, 임금님은 천의 직조 작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천의 이상한 힘에 다소 불안한 마음이 생긴 임금님은 처음에는 가장 신임하는 대신을, 다음에는 붙임성 있는 관리를 보내 일의 진척 상황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그 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으니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둘은 큰 혼란에 빠진다. "내가 바보란 말인가?" "내가 걸맞지 않은 지위에 올라 있단 말인가?" 이들은 그러한 사실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색상과 무늬가 훌륭하다며 거짓된 칭찬을 과장해서 늘어놓는다.
며칠 뒤, 임금님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작업실을 찾는다. '이게 뭐야?' 임금님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내가 바보란 말인가? 임금 자격이 없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걱정이 된 임금님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 정말 아름다운 천이로구나!" 수행원들도 눈을 씻고 계속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정말 훌륭하군요! 장려한 아름다움이에요! 절묘합니다!" 이런 칭찬들이 돌고 돌아 급기야는 임금님에게 다가오는 경축 행렬 행사에 이 천으로 만든 새 옷을 입고 나갈 것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행사 전날 밤, 협잡꾼들은 마치 천을 재단하고 새 옷을 짓느라 바쁜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임금님에게 모든 옷을 벗도록 요청하고 새 옷을 "입힌다." 행사가 진행되자 군중들은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낸다. 임금님의 새 옷이 이렇게 대단한 환호를 받다니!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런데 그때 한 꼬마가 외친다. "하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데요!" 사람들은 꼬마가 한 말을 귓속말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모두가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한다. "근데, 아무것도 안 걸치셨구먼!" "임금님이 벌거벗으셨어!" 임금님은 공포로 온몸이 오싹해진다. 사람들 말이 맞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끝까지 그 모습으로 행진에 임한다.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꼬집을 때, 혹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교묘한 상술에 넘어가는 경우를 비판할 때 주로 인용된다. 어느 경우든 사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타인의 거부를 회피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생존하려면 소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추방당하면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는 것을 수천 년에 걸쳐 익혀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파멸을 예방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충성을 다지며 조직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경합을 벌인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실리적이 되면, 즉 자신의 경력 관리에 치중하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거래가 되고, '역할 놀이와 안전 제일주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 역할 놀이 :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꾸미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이나 멋지게 화장한 얼굴, 품위 있는 표정을 지은 얼굴 등. 이런 얼굴을 갖추면 우리는 연기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미지와 걸맞고 우리의 적응에 도움이 되는 말과 행동을 보여줄 준비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는 '옷감'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의 열렬한 지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해 연기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은 종종 혼동을 야기할 뿐 아니라 때로는 자아를 완전히 장악해 정체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어떠한가. 임금님이 신임하는 대신과 관리가 명을 받들어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작업장을 찾는 장면에서 이들의 내면의 '개인 매니저'가 활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작업장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자 그들의 개인 매니저들은 처음에는 당황해한다. '내가 바보란 말인가? 아니면 무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개인 매니저들은 재빨리 '안전 제일주의'로 움직일 것을 결정해 버린다. 정직을 버리고 안전을 택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믿을 만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실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와 유사한 딜레마에 종종 빠지며, 또 대개는 안전을 택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용적인" 것으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