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家의 인간학
오오마에 마사오미 지음 | 청년정신
아일랜드를 쫓겨나서 - 케네디가의 뿌리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아일랜드의 한 가난한 젊은이가 가족과 헤어져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케네디가의 역사는 바로 그 청년의 미국 이민에서 시작된다. 젊은이의 이름은 패트릭 케네디, 나이는 26세였다. 영국, 그레이트 브리튼 섬 바로 서쪽에 자리한 아일랜드는 지금은 에이레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몇십 년 까지만 해도 영국 땅이었다. 11세기경부터 영국에 정복되어, 토지의 80퍼센트는 영국의 부재지주(不在地主)가 장악했으며, 아일랜드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아일랜드어를 빼앗기고 영어를 사용하는 등 탄압을 당하였다. 패트릭 케네디도 이 비참했던 아일랜드 상황에 밀려 미국으로 흘러간 이민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미국까지의 뱃길은 두 달이 걸렸는데, 영양부족과 열악한 위생으로 항해 중 병자들이 속출했으며, 적어도 10분의 1은 배에서 죽어 갔다. 매일처럼 바다에 죽은 자의 시체를 던져 넣는 가운데 무사히 상륙한 패트릭 케네디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동(東)보스턴의 싸구려 여인숙에 자리를 잡고는 바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는 술통을 만드는 일자리를 얻어 휴일도 없이 일했다. 그리고 같은 아일랜드인 이민자인 브리짓 머피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들은 1858년에 태어났고 패트릭 조지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러나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증손자가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이듬해인 1859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 문방구를 운영하던 외아들 패트(패트릭 조지프의 애칭)는 싼값에 술집을 하나 사게된다. 그는 계산에 천재적으로 밝은 사람으로 술집의 경영도 잘 돌아가고, 번 돈으로 다시 술집을 사들이고, 술 소매뿐만 아니라 도매에도 손을 대고, 술의 수입까지 관여하다 마침내는 석탄회사와 신탁은행에도 투자를 하게 되었다. 후일에 그는 P.J 케네디라 불리게 되는데 28세의 젊은 나이에 주의회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P.J 케네디는 후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가 되는 외아들 조(조지프 케네디)를 좁은 아일랜드계 사회에서 앵글로색슨계의 사회로 진출시키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모토 아래 아들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1등을 하라, 2등 이하는 패배다.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의 도덕적 인격과 깨끗한 평판을 흐려 놓는 행위를 절대로 하지 마라." 미국 사회에서 최고의 1등이란 대통령이다. 아직 차별을 받고 있던 가톨릭 교도의 이민 2세인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대통령이 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아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것이 케네디가의 가훈(家訓)이 되고, 아들을 통해 손자에게 전해져 마침내 대통령을 배출하게 된다.
초등학교 중퇴인 아버지는 아들이 신교도가 많이 다니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가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아일랜드계가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가톨릭계 대학을 나와서는 어려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1908년 어려움 없이 하버드에 들어간 조는 졸업을 하고 어떤 직업을 택할지 망설였다. 보스턴의 큼직한 은행도 모두 앵글로색슨계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먼저 매사추세츠 주의 은행 검사관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하고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서 바로 임명을 받았다. 주(州)안의 은행 장부조사가 그의 하는 일이었는데 이 때에 얻은 지식이 뒷날 그가 금융계에서 활약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투자하고 있던 콜럼비아 신탁이라는 조그만 은행이 앵글로색슨계의 큰 은행에게 흡수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투자해서 세운 이 은행을 살리기 위해 조는 하버드 재학 시절에 사귀었던 인맥을 찾아 뛰어다녔고 결국 필요한 돈을 만들 수 있었다. 감격한 콜럼비아 신탁의 직원들은 조를 은행장으로 추대하고 이리하여 대학을 졸업한 지 겨우 3년 만인 25세에 그는 은행장이 되었다. 그뒤 신문의 아일랜드계 전용 사교란에는 이민 2세인 거물 P.J 패트릭의 장남과 피츠제럴드의 장녀의 약혼이 발표되고 1914년 10월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졌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해의 일이다.
1등을 하라, 2등 이하는 패배다 - 가정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역할 하지만 아무리 큰 부자가 되도 보스턴에서 아일랜드계는 결국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조는 새삼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떠한 노력에도 딸들은 보스턴 사교계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식을 매매하는 데도, 또 새로 손을 댄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데도 보스턴이라는 곳은 너무 외진 곳이었다. 결국 그는 뉴욕 교외의 리버델에 집을 하나 장만했다.
조는 이미 보스턴 시절, 아무도 영화산업에 눈을 돌리지 않을 때, 뉴잉글랜드 지방에 31개의 영화관 체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제작을 해서 너무 쉽게 많은 돈을 벌고 있는 헐리우드 패거리를 보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인 투자가의 지원을 받아 1926년, 가까스로 FBO(미국영화배급회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사장들은 영화를 만드는 재능은 있었으나 재정에 대해서는 깜깜했기 때문에 조는 금융과 재정통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FBO의 주식을 팔아 2년 8개월 동안의 영화계 생활로 5백만 달러를 벌고는 헐리우드에 안녕을 고한다.
대공황이 들이닥쳤을 때 조는 대폭락이 있기 전에 불안정하게 오르고 내리고 있는 주식시장의 시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른 사람들은 주식을 사들이는 데 정신이 없을 때, 가지고 있던 주식을 내놓아 현금으로 바꿔 1천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또한 금주법이 풀리기 전에 스카치 위스키를 잔뜩 사들였다가 그것이 풀린 뒤에 단단히 한몫 벌어들인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조지프 P. 케네디가 돈벌이를 잘하고 억척스럽다는 것은 거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돈벌이에 미친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지금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아일랜드계에 대한 차별을 돈의 힘으로 깨뜨리고 한 집안 식구들 모두를 미국 사회의 주류에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은 가족밖에 없었다. 그는 "인생의 척도는 얼마나 벌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족을 만들었느냐이다."라고도 말했다. 또한 그가 정치사상이 다른 루즈벨트의 선거를 필사적으로 밀고 나선 것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미국 사회의 붕괴를 막고 경제를 안정시켜 집안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집을 비우고 때로는 장기간을 타지에서 머무를 때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과 통화하였다. 아이들에게 벌주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었으며 아버지는 엉덩이를 때리는 일은 없는 대신 아이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면 차갑게 변한 표정으로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사실대로 말하게 하고 잘못한 점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일단 일이 수습되고 나면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셋째 아들 로버트(애칭 : 보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요구하였다. 어중간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달리기든 볼을 잡는 일이든 학교에서의 경쟁이든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야 했다. 누구보다 더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흔히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됐어'라고 말씀하셨다." 왜 아이들에게 이처럼 '이겨라, 최선을 다해라'라는 요구를 하였을까? 그들의 어머니인 로즈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인생에 있어 '이기는 버릇'이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포츠에서나 공부에서나 '지는 버릇'이 들면 사람이 위축되고 열등감이 생겨서 결국 자신의 능력을 다 살리지도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한편 '이기는 버릇'이 들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이기는 버릇'은 스포츠나 학업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급속도로 파급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에 의하면 인생은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잡는 경쟁이며 2등 이하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케네디가의 교훈이었다.
평소 아버지는 저녁식사에서 으레 루즈벨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든가, 세계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든가 하면서 정치적, 국제적 화제를 꺼내곤 했다. 이리하여 국가적인 문제가 아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강하게 지배하였다. 그 결과, 아이들은 국가적 활동이 가정생활의 연장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케네디가의 형제들은 어른이 되면 세상에 이바지하는 공직에 앉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일랜드계에 대한 오랜 동안의 차별을 한꺼번에 부수는 일이 되므로 아버지는 장남 조에게 미래의 대통령을 기대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공직에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자녀교육은 도전적이고도 지적인 일이다 - 어머니의 가정교육아이들의 어머니는 예절을 엄하게, 그러나 몸소 실천하며 가르쳤다. 만일 어머니의 가위를 가지고 놀고 있으면 가위 끝을 손가락이나 팔에다 찌르고 그 아픔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또 발갛게 타고 있는 난로 가까이에 아이가 있으면 손을 난로 근처에다 갖다 대어 열의 뜨거움을 직접 체험하게 했다. 그녀는 체벌은 최후 수단으로 사용했다. 나쁜 짓을 하면 즉각 실시하여 옛날식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또한 시간을 금이라고 가르쳐 식사시간을 엄수하도록 했으며 식탁을 아이들이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고 지식을 향상시키는 지적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식사가 시작되면 그 주제에 대해 무엇이든 발언하게 하였고 특정 아이가 화제를 독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침묵을 지키는 아이나 발언 못하는 아이가 위축되어 열등감을 갖지 않도록 주의했다.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 아홉 명까지 되자, 장남과 막내 사이는 무려 열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래서 테마를 둘로 나누고, 큰 애들과 작은 애들을 따로 따로 앉혔다. 복장에 대해서도 엄격했다. 아침에 아이들이 식사를 끝내면 이를 닦게 했고, 그것이 끝나면 한 줄로 세워 복장을 점검하면서 좀먹은 옷을 입지는 않았는지 조사했다.
남자아이들이 데이트를 할 나이가 되자, 차를 운전해서 댄스 파티에 갈 때는 데이트 상대의 이름과 주소를 물었고, 만일의 경우 상대방의 집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밤 열두 시에 파티가 끝나면 아들에게 파트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했고, 열두 시 반까지는 돌아오도록 했는데, 만일 그 시간이 넘어서 돌아오면 반드시 다음날 아침 주의를 주었다.
케네디가에선 술을 내놓지 않았다. 존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기 얼마 전 팜비치의 별장에 축하차 모인 사람들이 글라스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무엇인지 살폈더니, 우유여서 깜짝 놀랐다는 보고도 있다. 로즈 부인도 자기 집에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것은 우유라고 말했다.
끝으로, 돈에 대한 교육상의 이야기가 있다. 일가가 부유하게 됐어도 어머니는 돈에 엄했다. 아이들이 다섯 살이 되면 어머니는 매주 10센트를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10센트는 이내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보비는 열 살 때 용돈이 너무 적어서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의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롤스로이스를 타고 배달하는 것을 들켜 저지당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노동의 신성함과 또 그로부터 얻는 돈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 집이 큰 부자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케네디 형제는 재력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결코 화려한 생활에 빠지지 않았으며, 젊었을 때의 잭 역시 사치스러운 옷 한번 입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현명한 어머니의 돈에 대한 교육 덕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식들을 길러야지 - 전쟁과 케네디가한때 아버지는 주영대사로 런던에 있었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주영대사는 외교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포스트이고, 또 나치스 독일의 위협을 받고 있던 영국에게도 미국 대사는 가장 신뢰할 만한 외국사절이었다. 유럽에서는 나치스 독일이 라일란트에서 진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여론은 영국에 냉담했고,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거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개인주의적 감정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한 조지프 P. 케네디도 개인주의자였다. 조는 그런 움직임을 통해 국제관계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장남이 하버드대학 법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런던의 부모에게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를 대사관의 임시 고용 서기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특사로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알기 위해 유럽 각지로 파견했다. 그는 내전 중의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들어가 정부군과 함께 농성도 했으며, 이어 프랑코군의 손에 함락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 곳에서 아버지 앞으로 몇 통의 정세보고서를 냈다. 아버지는 장남의 활동이 자랑스러웠다.
한편 하버드에 들어간 잭(둘째 : 존 F. 케네디)은 전과는 딴판으로 학업에 정진했고, 성적도 좋아졌다. 무엇이나 잘하는 형에 대해 대항의식을 가지면서도 병치레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어 팽개쳐 두었던 잭도 겨우 그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런던에 부임하기 1년 전까지 친구와 둘이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특히 정계에 투신하고 싶은 뜻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저널리즘에 매혹되어 언젠가는 정치학이 소용되리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그에게도 국제적 감각을 익히게 하려고 1939년 일부러 하버드를 휴학시키고, 소련, 발칸의 여러 나라와 그밖에 팔레스타인까지 파견했다. 그동안 그는 미국 대사관에 묵으면서 각지의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고, 객관적 관찰을 레포트로 정리하여 런던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잭이 런던으로 돌아오자 과연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곧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하여 파리로 밀고 들어올 날도 멀지 않았다. 미국의 여론도 이제야 참전론으로 기울어졌다. 1942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드디어 미국도 참전, 전쟁의 불길은 전 세계로 퍼졌다. 장남 조와 잭, 셋째아들 보비까지 세 형제가 경쟁이라도 하듯 전선출동을 희망하였다. 잭은 42년에 어뢰정 PT 보트대에 배속되었고, 1943년에는 그토록 바라던 전선 남태평양에 출동, PT보트 109호의 어뢰정 정장으로 임명되었다. 8월 2일 밤, 일본 해군의 구축함 아마기리는 군인들을 수송하고 솔로몬 군도의 뉴조지아 서쪽, 브래키트 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약 2킬로 전방에서 돌연 한 척의 PT보트를 발견했다. "돌격, 앞으로!"를 명령하자, 아마기리는 PT보트를 향해 돌진하여 보트는 굉음을 내면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바다에 기름이 흘러 한쪽은 그야말로 불바다로 변했다. 일단 해상으로 피한 잭은 필사적으로 부하들을 지휘했는데, 바다에 떠 있는 선체의 잔해를 붙잡으라고 소리쳤다. 갑판에 있는 한 장의 판자를 뜯어내 바다에 띄워 9명의 부하로 하여금 판자를 붙잡게 했다. 그리고 양팔에 큰 화상을 입고, 수족을 못쓰는 마크맨이라는 부하를 케네디 자신이 끌면서 헤엄쳤다. 마크맨의 구명대에 달려 있는 1미터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