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더블 라이프
데이비드 히넌 지음 | 영진닷컴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더블 라이프20세기 프랑스의 해양 탐험가로 유명한 자크 쿠스토는 젊은 시절 해군항해사가 되고 싶었으나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부러진 팔을 단련시키기 위해 26세에 수영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바다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수 년이 지난 뒤 쿠스토는 선원, 탐험가, 발명가, 베스트셀러 작가,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제작자, 환경운동가,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쿠스토의 다양한 삶은 오직 하나의 직업에만 충실할 것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제 직업은 수많은 경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몇몇 현명한 이들은 일과 삶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잡지 기사들과 자기계발서들은 일과 삶의 절충점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직업과 열정의 대상 - 본업과 취미 - 사이의 구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심사도 함께 만족시키겠다는 목표는 언제든 가능하다. 더블 라이프에 관한 탐구는 단 하나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왜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적인 성공가도를 버리고 자신들의 제1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들 대부분은 '이렇게 하면 내 삶이 좀더 충만했을 텐데'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더블 라이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인 천재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사람도 더블 라이프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새로운 고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본능적 욕구, 그리고 그 과정을 돕기 위한 몇 가지 유용한 도구들만 있으면 된다.
신경제(New Economy)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최근 르네상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신경제는 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기술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보시대는 부정적 측면도 갖고 있다. 즉, 사람들이 모두 일에 얽매여 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치 전환에 관해서는 경영전문가인 피터 드러커가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더블 라이프에서 개성과 감흥을 찾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서 정열을 소진해 기진맥진하고 지루해하기 전에 미리 새로운 관심사를 개발하라고 제안했다.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맞지 않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수명과 아무런 상관 관계도 없다. 생명의 연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설계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미리미리 관심사를 결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본 원칙을 세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항상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무엇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숨겨둔 꿈을 펼침으로써 즐거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에서부터 더블 라이프를 시작한다. 이것은 종업원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 진화론적 패러다임이 작용하는 경제시대에서 재능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유능한 지도자들은 인간의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게 아니라 발산시키는 기업 문화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마이크로 소프트, 제너럴 일렉트릭, 그리고 시스코 시스템스 같은 영리한 조직들은 사람들이 또 다른 취미를 갖게 되면 기업의 따분함과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더블 라이프에 대해 고민한다. 조직은 짧은 기간 동안이라면 동조하겠지만 그들이 다른 분야에 더 흥미를 보이면 궁극적으로 불편해한다. 모든 조직에는 그 조직을 지배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르네상스적 인간들은 이를 뛰어넘고 통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더블 라이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는 불편한 길이 될 수도 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은 종종 색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한 음미 방법을 발견한다. 그들은 또 다른 삶에 대한 도전을 행복에 관한 리트머스 테스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크 쿠스토처럼 부유하고 유명해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좀더 즐겁게 사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윈스턴 처칠 - 붓을 든 수상윈스턴 처칠은 작가, 예술가, 연설가, 군인, 정치가 등등 이 모든 것 이상이었다. 처칠은 일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둔 이상적인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폭넓은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해나갔다. 그는 글쓰기로 부와 명성을 얻었고, 대중 강연을 통해 국내외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림 그리기를 통해 공무의 중압감을 덜어냈다. 그는 '직업과 취미는 서로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준 사람이다.
윈스턴 레오나드 스펜서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영국 옥스퍼드셔의 블렌하임 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은 말버러 공작의 후손으로서 토리 당 정치가였다. 그리고 처칠의 어머니 제롬은 강인하고 성공한 뉴욕의 금융가이자 신문사 사주의 딸로, 아름다운 사교계의 명사였다. 원기 왕성하고 반항아 기질이 있던 키 작고 붉은 얼굴의 처칠은 공부에서 흥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필기 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났으며, 세 번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샌드 허스트에 있는 왕립군사학교(현재의 왕립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처칠은 군대에서 군인과 글쓰기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5세에 쿠바와 인도, 수단에서 장교이자 종군 기자로 활동했다. 나중에 그는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의 포로가 됐으나 국경에서 약 48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적의 영토에서 대탈출을 감행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영국 군대를 지휘했으며 전쟁 영웅으로 귀국했다.
군대 생활의 단조로움에 싫증이 난 그는 책읽기에 의욕적으로 몰두했다. 그는 천천히 언어 능력을 계발했으며, 파트타임 저널리스트로 전선에서 생생한 기사들을 보냈다. 그는 1898년에 두 달 동안 하루 다섯 시간씩 글을 써서 인도 북서 지방에서의 전투를 묘사한 그의 첫 책 『말라칸드의 야전군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 책은 호평을 받았고, 9개월 동안 8500권이 팔렸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글쓰기를 통해 1만 파운드라는 상당한 밑천을 모았다. 이후 1899년 군대에서 퇴역해 다음 해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60여 년 동안 공직에 몸담았다. 내무장관, 재무장관, 통상장관, 그리고 국방장관 등 국가의 가장 위대한 장관직들을 수행했다. 영국의 수상들 중 독특하게도 처칠은 당적을 두 번이나 바꿨다.
세계대전 초창기에 해군장관이었던 그는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로 실각했다. 그 다음 20년간 그는 공직을 떠나 있었으나 많은 저술과 강연을 시작하면서 다시 문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유랑 생활(특히 1922년에서 1939년까지)을 했음에도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술과 시가 같은 취미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글쓰기에 대한 강한 애착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그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더블 라이프를 택한 부분도 있다. 대부분 영국 상류층 정치가와는 달리 처칠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낭비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지원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계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 상당한 돈을 벌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미국 주식시장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1929년 대공황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결과적으로 처칠은 항상 돈이 부족했다. 작가로서의 두 번째 삶은 처칠에게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칠은 글 쓰는 것 외에도 대중 연설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싶어했다. 그는 "연설의 달인이 되는 것은 내 평생의 야망이었다."고 말했다. 연설 장애와 즉석 연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처칠은 놀랄 만한 기억력과 비범한 영어 구사력을 이용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스가 유럽 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던 1930년대 말, 그는 고립된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목소리로 연설했다. 1940년 5월, 새로 선출된 수상의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방울"이라는 한 구절은 하원과 낙심한 국민들을 각성시켰다(처칠은 당시 신임 수상으로서 의회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에서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방울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만장일치의 결과를 얻었다).
처칠의 재능은 또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1915년, 41세의 처칠은 동생의 아내가 수채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몇 년 동안 폼페이의 유적부터 암스테르담의 운하와 이탈리아의 알프스까지 많은 이국적 경치를 그렸다. 그는 정물화, 꽃 그림, 실내화들처럼 대부분 영국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그렸다. 저술이나 연설과는 달리 그는 정치적 경력이나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했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예술을 활용했다.
그가 취미삼아 그림을 그린 지 30년 정도 지난 뒤, 처칠은 한 친구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로 생기는 긴장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취미로 그림 그리기』에서 더블 라이프를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마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붓과 팔레트의 매력을 느껴보라고 권했다. 아마추어이긴 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주목 받았다. 1921년 '찰스 모린'이라는 이름으로 파리 전시회에 출품한 5점의 작품 중 4점이나 팔렸다. 1947년 '미스터 윈터'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던 2점의 그림은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윈스턴은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는 폴로에서부터 도박, 사냥, 해외여행, 그리고 심지어 벽돌쌓기까지 많은 것들을 즐겼다. 그에게 변화는 최고의 '만능열쇠'였다. 그는 "마음에서 지친 부위는 다른 부위들을 이용해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일상적인 관심 분야에 비추는 등불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관심 분야에 등불을 비춰야 한다." 비행도 처칠의 여러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는 비행을 두려워하면서도 30대 후반에 비행을 시작해 하루에 열 번까지 비행을 하려고 했다.
처칠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은 짧은 인생 외에는 제약 조건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질 때까지 실제로 가능한 모든 경험들을 시험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알코올과 시가에 대한 오랜 애착과 비만(172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 95킬로그램의 땅딸막한 체격), 그리고 운동에 대한 경멸("마음의 에너지는 육체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로 그는 평생 뇌졸중, 고혈압, 폐렴, 그리고 다른 만성적 질병들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아서 마더는 "그의 정력과 지구력은 경이적이었다."고 썼다. 1965년 6월 24일, 처칠은 90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고,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뒤 처칠은 옥스퍼드셔의 블레이든 교회 묘지에 있는 가족묘에 묻혔다.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한 그의 용기였다. 처칠에게는 어떤 것도 가능했으며, 항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샐리 라이드 - 우주에서 웹 공간까지 탐험하는 여전사샐리 라이드는 결코 우주비행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성격은 물리학자 타입"이라며 "유명인사가 되고자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1983년 6월 18일, 그런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최초의 우주비행 후 22년이 지난 뒤, 라이드는 우주를 밟은 첫 미국 여성으로 유명해졌다. 그녀의 역사적인 비행 이후, 지난 2000년 10월 100번째 우주왕복선을 조종한 파멜라 멜로이 공군 중령을 포함한 30명 이상의 여성들이 남자들로만 구성된 남성 우월주의적 우주 클럽을 깨뜨렸다.
라이드는 물리학자, 교수, 우주비행사, 저술가, 테니스 선수, 그리고 기업가 등의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과학이 나에게는 항상 변하지 않는 상수였다. 그것은 항상 나의 동기 부여의 핵심이었다. 과학자로서의 나는 우주비행사나 다른 어떤 직업을 가진 나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직업을 바꾸는 것은 자신 있는 과학자에게는 쉬운 일이다. 실제로 그녀는 몇 년마다 자신을 재창조했다.
샐리 라이드는 1951년 5월 26일 캘리포니아 주 엔시노에서 태어났다. 재능 있고 경쟁심이 강했던 라이드는 또래 소년들과 함께 미식축구, 야구, 그리고 축구를 했다. 열정적인 독서가였던 라이드는 특히 스포츠 면을 즐겨 읽었으며, 좋아하는 선수들의 타율을 줄줄 외울 정도였고, 과학소설도 아주 좋아했다. 열 살 때 라이드는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라이드는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에 참가해 주말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너먼트를 했다. 1968년 라이드는 펜실베이니아 주 소재 스워스모어 대학에 입학해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학교 테니스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녀는 전국대회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스탠퍼드 카디널 여자 테니스팀에서 톱클래스의 선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과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1973년 그녀는 스탠퍼드에서 물리학과 영어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물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했다. 1977년 라이드는 학교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천체물리학 박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이때 NASA(미국항공우주국)는 새로운 우주비행사를 찾고 있었다. 미래의 우주비행에서 '미션을 수행할 전문가들'과 함께할 비조종사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지원했고 그녀도 그 프로그램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1970년대만 해도 NASA에는 우주비행사 후보자들을 위한 특별 체력 프로그램이 없었다. 우주비행에 요구되는 체력을 준비하는 것은 후보자 개개인의 몫이었다. 라이드는 주중에는 날마다 6∼8킬로미터, 주말에는 12∼16킬로미터를 달리면서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그녀는 테니스와 배구를 계속했다. 장차 우주비행사가 될 사람은 누구나 훈련용 제트기에 사용되는 20킬로그램의 낙하산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했으므로 그녀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했다. 스쿠버다이빙과 낙하산 훈련도 NASA의 생존훈련 코스에 들어 있었다.
1979년 라이드가 28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2년 동안 공학팀에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캐나다 기술자와 함께 우주의 인공위성들을 배치하고 회수하는 데 사용되는 원격 장비(기계로 만든 팔)를 설계했다.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2, 3차 비행 때 라이드는 미션통제센터에서 '캡컴'으로 활동했다. 우주선 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보조 조종사인 캡컴은 비행 동안 우주왕복선 승무원과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우주조종사들을 안전하게 착륙, 귀환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 캡컴의 실수는 곧바로 우주선 실종이나 고립, 그리고 승무원의 사망을 의미한다. 이런 핵심적인 자리를 맡은 첫 여성으로서, 라이드는 우주선 발사부터 착륙까지 미션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다.
그런데 왜 라이드가 선택됐을까? 당시 선정심사위원단이었던 NASA의 애비는 라이드가 적극적으로 팀과 협력하는 팀 플레이어로서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들의 일을 하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라이드는 여러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1986년 1월 28일, 챌린저 호가 이륙 직후 73초 만에 폭발해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했다. 그녀는 이 비극을 조사하기 위해 윌리엄 로저 전 국무 장관을 위원장으로 한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에 배속됐다. 이 위원회는 폭발이 고체연료 보조 로켓에 있는 'O-링'이라는 고무 부품의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더 놀랄 만한 것은 조사위원회가 안전불감증을 밝혀내고, NASA의 전면적인 개혁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로저 보고서는 사실상 미국의 우주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