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달러로 억만장자가 된 한상(韓商)
한명규 지음 | 생각의나무
1부 시련 속에 꽃핀 코리아의 열망
백영중 - 50달러 종자돈으로 이룬 '철강왕'의 꿈한상들은 미국의 주류 경제사회에 참여할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부문으로 '마케팅 능력'을 꼽는다. 마케팅은 현지인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작업. 초기 이민 시기만 해도 미국 사회는 소수 민족에 대한 대접이 좋지 않은 데다 이방인은 언어와 문화가 서툴러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내 경량철골 시장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패코스틸의 백영중 회장(73)은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기업의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26세이던 1956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오레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인디애나 공대 토목공학과를 다시 다녔다. 당장 먹고 살 일이 중요한 그로서는 미국에서나 고국에 돌아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했다.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은 오하이오 주의 벤워트카운티 기술공무원이었다. 영주권이 없는 그가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 은사의 도움이 컸다. 3년간의 기술공무원으로 경력과 미국 생활 기반을 다진 그는 1962년 LA 소재의 슐레스틸이라는 철강회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서 철강수요가 늘어났을 때 그가 개발한 조립식 철강 구조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성공은 그가 소수민족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던 '영업' 활동을 미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벌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제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제가 판매를 담당하는 것이 당연해졌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용인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마흔 중반에 이른 1974년. 그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그만둔다. 패코스틸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갖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가동에는 어려움이 컸다. 일본 업체로부터 철강 제품을 위탁 받아 이를 미국 회사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는데 첫 거래를 트기가 쉽지 않았다. 백 회장은 한 달치 물량을 해당 회사 창고에 넣어주는 배짱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제품이 알차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3개월 만에 120만 달러를 파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3년 후인 1977년에는 미국 서부 7개 주 전체 시장의 50퍼센트를 장악하는 고속성장을 이룬다.
그는 성공의 비결은 '고객 전부주의'에서 찾는다.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만 많이 만들면 자연히 팔린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보다 고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한 뒤에 물건을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물건을 적시에 배달함으로써 고객과의 약속을 지켰다. 패코스틸의 성공에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패코를 통해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던 일본의 스미토모가 직접 물건을 공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차별화 된 지식과 기술로 스미토모의 공세를 막기 위해 '주름잡이 빔'을 개발한다. 이것은 H빔의 가운데 철판에 주름을 잡아 강도를 높인 제품으로 그가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해서 특허를 얻은 첫 제품이다.
패코는 지금 아칸소 공장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 8개 물류기지를 갖고 있다. 연간 판매량은 30만 개로 매출액이 1억 달러가 넘는다. 백 회장은 1999년 미국의 대표적인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이 주관하고 CNN과 「USA투데이」, 시티은행, 나스닥이 공동으로 후원해 매년 미국 기업인에게 주는 상을 받아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단돈 50달러를 들고 간 젊은 청년이 비로소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임정숙 - LA 한인타운 최대 전자점1992년 폭도의 물결이 로스앤젤레스 도심가를 할퀴고 지나간 자리. 이곳 한인타운에서 가장 큰 전자점을 운영하던 임정숙 코스모스전자 사장은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당시 텅 빈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임 사장은 현지 언론의 집중취재 대상이었다. 값비싼 상품이 많은 임 사장의 매장을 폭도들이 가장 먼저 약탈했기 때문이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장착한 임 사장은 폭동을 이기고 사업 재기에 성공한 것이나 한인사회의 영향력 등 여러 면에서 로스앤젤레스 한인경제의 대표적인 '여걸'로 꼽힌다. 코스모스전자는 1977년 한인타운 내 전자제품 수리점으로 출발해 시장 흐름을 재빨리 판단하는 임 사장의 남다른 안목으로 1985년에는 한인타운 최대의 전자점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1992년 폭동으로 임 사장은 사업을 정리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폐허가 된 임 사장의 매장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것을 본 한인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와 물건을 구매했다. 그는 "다른 주에 사는 한인이 수 시간 운전해 일부러 가게를 찾아주곤 했다. 한 달만에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도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도움과 거대한 한인 인구의 특성에 맞는 맞춤서비스로 고객을 사로잡게 된 임 사장은 최근 고급형 디지털 전문매장을 개설할 정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관을 만들어 한국제품 알리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03년 매출은 1,300만 달러(한화 약 156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최근에는 국내 중소기업과 협력해 한국 IT 제품 수출에도 열성이다.
2부 역사적 한계를 딛고 재팬드림을 일구다
김홍주 - 도시락으로 일본을 석권하다도시락 산업이 유달리 발전한 일본. 일본 전역에 2600여 개의 점포를 보유, 도시락 재벌로 우뚝 선 '혼케 가마도야'는 한국인 2세 김홍주 회장이 일군 '재팬드림'이다. 지난 1980년 1호점을 시작으로 8년 만에 2,000점을 달성한 혼케 가마도야는 매출 1,500억 엔으로 일본 전체 음식업계 매출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점한다. 사업 10여 년 만에 50여 개의 선발 업체를 제치고 '호카호카 테이'와 함께 일본 도시락 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이 처음부터 도시락 업계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구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돼 대학 졸업 후 구두 제조회사에 입사했다. 3년 후 스스로 사업에 도전하기 위해 종업원 5명으로 독립한다. 당시 일본의 구두 제조회사는 700여 개. 김 회장은 3년 만에 회사를 10위 안으로 끌어올렸다. 비결을 물었더니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한다.
해방 1년 전 호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패전의 폐허 속에서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 구두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 음식 사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는 구두 회사를 직원들에게 미련 없이 물려주고 다시 홀로 선다. 그는 1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계획에 몰두했다.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프랜차이즈(FC) 사업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던 그는 이에 적합한 도시락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1980년 구두 회사로 벌었던 돈을 쏟아부었고,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3년 만에 500개 점, 5년 만에 1,000개 점으로 급성장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현재 직영점은 600개, 프랜차이즈는 2,000여 개에 달한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고베가 본거지였던 '혼케 가마도야'는 많은 점포가 건물더미에 묻혔다. 하지만 김 회장은 여진의 위험 속에서도 지진 바로 다음날 영업을 시작하는 뚝심을 발휘한다. "한시라도 빨리 가게를 열어 지진 피해로 고생하는 지역주민에게 도시락을 나르자."고 종업원을 독려한 그는 이것이 지역주민들에게 신뢰를 얻는 좋은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지난 1999년, 김 회장은 또 하나의 사업에 도전했다. 고국의 제주도에서 리조트 사업을 시작한 것. "조그만 구두 가게, 작은 점포의 도시락 집을 하다 보니 좀더 넓고 큰 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는 게 김 회장의 얘기다. 그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가 또 있다. 버블 이후 잇따라 파산한 간사이 지방 재일교포들의 재건을 돕는 일이다. 그는 이를 위해 2003년 3월 부실 채권을 매매하는 'ARA'라는 채권회수회사를 설립했다. 일본의 채권회수기구(RCC)로 넘어간 재일교포 기업의 채권을 사들여 그들을 빚더미에서 풀어줘 재기를 돕겠다는 것이다. 2005년이면 환갑이 되지만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홍성엽 - 아이디어와 행운으로 일군 재팬드림2002년 6월 한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응원구호가 홍성엽 사장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도쿄의 코리아타운인 쇼쿠안도오리에서 '대사관'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는 홍 사장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가 '대사관'이란 독특한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은 2002년 5월 20일. 어느 날 "한국이 개최하는 월드컵인 만큼 우리도 응원 좀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층 건물 식당 안에 대형 TV를 가져다 놓고 옆 주차장에 프로젝터를 이용한 대형화면을 설치했다. "같이 응원합시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4일 첫 한국전이 열리는 날, 200여 명이 식당을 찾았다. 2차전은 600여 명,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14일 저녁에는 1,000여 명 이상이 몰려 주차장, 식당 모두 응원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식당 앞 도로까지 인파가 넘쳐났다.
한국의 16강 진출과 함께 '대사관'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도쿄의 재일 한국인의 모습을 담으려는 매스컴들이 쇄도했다. 한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의 언론들도 취재 경쟁을 벌여 월드컵 기간 중 대사관은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종업원들이 방송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됐다. 요즘 대사관 앞에서 가끔 관광버스를 볼 수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사관입니까?"라며 한국의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홍 사장이 일본 땅을 밟은 것은 20여 년 전. 당시 '쇼쿠안도오리'에는 한국 가게들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홍 사장은 거리를 둘러보다 한국식 떡집이 없는 점에 착안해 조그만 떡집을 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이 다가왔을 때 홍 사장은 "만들어도 만들어도 물량을 댈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떡집으로 돈을 번 그는 '냉면'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이후 숯불갈비, 한정식 요리 등을 하다가 지금의 '대사관'을 열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아이템 발굴, 남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 착안, 여기에 우연하게 찾아온 '운(運)' 등으로 홍 사장은 '재팬드림'을 착실히 일궈가고 있다.
3부 하이테크 한상들
이종문 - 실리콘밸리를 놀라게 한 노익장50대 중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해 사업가로 성공한 이종문 암벡스 벤처그룹 회장. 당시로서는 시장성을 보장받을 수 없던 그래픽카드가 사업 아이템이었다. IT에 문외한이었지만 이 회장은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는 아담한 규모의 '이종문 아트센터'가 있다. 이 회장이 샌프란시스코 시에 1,500만 달러를 기부해 설립, 2003년 개장한 박물관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이 회장의 흉상이 서 있다. 미국 이민 100년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70대 중반의 노년인데도 사업 때문에 쉴 틈이 없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 온 이 회장이 다이아몬드컴퓨터시스템 사를 설립한 것은 지난 1982년. 6년에 걸친 연구 끝에 당시로서는 세계 양대 컴퓨터 회사였던 애플컴퓨터와 IBM의 호환시스템을 개발했고 범용 그래픽 VGA카드를 선보였다. 개인 재산을 털어넣으면서 일군 값진 성공이었다. 그래픽카드 기술로 다이아몬드는 미국 내에서 성장이 가장 유망한 17위의 비상장기업으로 선정됐다. 1983년 나스닥에 상장한 텔레비디오의 황규빈 회장에 이은 성공으로 두 사람은 일약 실리콘밸리의 스타 기업인이 됐다. 그 여세를 몰아 다이아몬드는 1995년 나스닥에 입성하고 다이아몬드는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이 회장은 다이아몬드의 나스닥 상장 시점을 전후해 경영에서 손을 뗀다. 그 뒤 새로 영입한 CEO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매각하고 그 뒤 암벡스 벤처그룹을 설립했다. 마침내 이 회장은 실리콘밸리의 손꼽히는 부자로 떠올랐다.
그의 사업 역정을 보면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연상된다. 정 회장은 현대가 조선소를 건립했을 당시 젊은이였던 이 회장에게 "내가 무식했기 때문에 조선소를 만들 수 있었지. 유식했다면 손익계산이 분명해 도저히 설립 엄두도 못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자신도 "전자공학을 했다면 당시로서는 무리였던 그래픽카드를 개발할 엄두도 못냈을 것"이란다.
릭 이 - 클린턴을 보좌한 IT CEO미국 백악관은 세계 권력의 핵심부다. 릭 이 미국 과학기술솔루션 사 회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악관 정보통신보좌관으로 근무하며 클린턴 전 대통령 측근에서 활동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이 회장은 미 국가안보연구소 최고기술담당자를 거쳐 현재 국가안보연구소의 자회사인 과학기술솔루션 사의 회장 겸 CEO를 맡아 미국 정부를 상대로 IT 분야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정치외교, 경영, 군전술, 컴퓨터공학 등 보유한 석사 학위만도 4개다. 일찍이 가족이 이민을 떠난 덕택에 이 회장은 취학 전부터 미국에서 생활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대학에서 학군장교(ROTC)를 했던 것이 군에 발을 디디게 된 동기다.
전 세계 모든 정보가 취합되는 백악관 작전실에서 매일같이 고급정보를 다루며 대통령 해외순방길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대통령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그의 손을 거쳐야 했던 만큼 기업으로 치면 최고기술담당자(CTO)의 역할을 해냈다. 이 회장은 백악관 근무가 끝나고 "장군이냐 최고경영자(CEO)냐."의 갈림길에 섰다. 해박한 IT 지식과 백악관 근무까지 겸비한 그는 당시 IT 업계 주요 스카웃 표적이었다.
이 회장은 과학기술솔루션 사 회장에 취임했다. 최근 그는 자신의 IT 비즈니스를 중동 각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중동 지역의 IT 인프라스트럭처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새로운 황금을 캐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조지아 주 경제통상위원회를 이끌면서 위원장을 맡아 주지사를 보좌하는 등 한상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이고 있다.
4부 이민의 역사를 개척하다
성기주 - 교민 위한 금융상품 개발"지난 1858년 처음 문을 연 벤디고 은행은 멜버른이 수도인 빅토리아 주를 포함해 전국 166개 지점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 은행 중 하나입니다. 이처럼 전국적인 은행이 한인교민들의 대출업무를 돕기 위한 한인교민은행 설립에 선뜻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경제를 높이 평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기주 벤디고 한인교민은행 이사장은 지난 2001년 8월 설립한 지역 공동체 은행의 설립 배경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한다. 지역 공동체 은행은 지역 주민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며 은행 수익의 일정분을 해당 지역사회에 환원하지만 모든 업무와 고객서비스는 일반 시중은행과 똑같이 운영된다. 한 마디로 형식은 지점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운영은 한인교민들이 직접 담당하는 셈이다. 이미 전국적으로 90여 개의 지점을 설립,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 이사장은 "한인사회의 자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장기적 관점의 대형 사업 프로젝트를 수립할 수 있게 됐다."며 "한인교민을 위한 고용창출, 은행 서비스 및 은행상품의 대폭 개선 등이 타 은행과의 차별화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벤디고 한인교민은행은 현재 수신고가 1,800만 달러(약 126억 원)에 달한다.
지난 1981년 호주로 이민 온 성 이사장은 원래 한국에서는 은행과 관련 없는 분야에 종사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전기공사 관련업체에서 일했다. 현재 벤디고 이사장 직책을 갖고 있지만 전공은 아직도 전기공사"라고 말하며 씩 웃는다. '프랜차이즈' 은행이라는 독특한 운영 방식 때문에 벤디고 한인교민은행은 사업 초기에는 교민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그는 '전국적 인지도가 없어 호주교민들이 외면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벤디고 한인은행은 결국 각 지점장이 재량권을 발휘해 융자나 금융서비스를 차별적으로 펼치는 이색 마케팅을 선보여 한인교민들의 관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성 이사장은 "한인교민 이익 옹호와 차별화된 서비스, 공동운영 등 3가지 장점을 모두 갖춰 이제는 이곳 교민들로부터 '고객친화적 은행'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