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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달러로 억만장자가 된 한상(韓商)

한명규 지음 | 생각의나무
2003년 이민 40주년을 맞은 브라질에는 노래방을 지칭하는 '가라오케'라는 말이 없다. '가라오케'라는 말 대신 '비디오케'가 노래방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비디오케라는 이름을 이곳에 정착시킨 인물이 황석하 라피엔터테인먼트 사장이다. 2003년 이민 27년을 맞는 그는 노래방 기기를 중남미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특히 축제의 나라 브라질에 '비디오케'가 많이 보급되었다. 라피엔터테인먼트가 매년 브라질에서 판매하는 비디오케가 4,000만 달러 어치에 달한다. 한때는 연간 1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21세부터 시작된 황 사장의 이민생활이 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이전까지 그는 의류, 건설 등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그저 먹고 사는 정도였다. 그는 1993년 상파울루에서 열린 한 전자제품 전시회 삼성전자관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삼성은 당시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노래방 기기를 들여와 브라질에 소개했다. 춤과 노래를 즐기는 국민성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판단한 그는 곧바로 노래방 기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인 부문은 브라질 노래를 노래방 기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작권을 확보하는 것. "노래 사용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이 후발주자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독점권을 따내는 데 돈은 많이 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집도 팔아야 했다. "고생해서 노래 몇 곡에 대한 독점권을 따낼 기회를 잡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중고차 시장에 가 운전하던 승용차를 팔아 자금을 마련했지요." 고국을 방문해 신문에 투자유치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호텔 방에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으니 당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질 사회에 노래방 기기를 알리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드디어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브라질 북부지역 자유무역지대인 마나우스에 공장도 마련했다. 노래방 기기를 월 10만 대 조립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사업이 가장 번창한 시기에는 하루에 매출 100만 달러를 올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2000년 독점권은 만료됐지만 라피는 여전히 현지에서 유일한 노래방 기기 업체로 남아 있다. 브라질 전역에 라피 기기가 이미 보급돼 있는 상황이어서 후발주자들이 진입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꾸준히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황 사장은 최근에는 한국에 커피, 수산물 등 브라질의 농산물을 소개하는 사업과 함께 우리 입맛에 잘 맞는 현지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한국에 설립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휴대전화 부품을 수입해 이를 남미에서 조립·생산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뉴욕 시 맨해튼 35번가에 있는 뉴욕골프센터 매장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흑인과 히스패닉, 백인 직원들 틈으로 동양인 직원이 한 명 눈에 띠길래 봤더니 일본인이었다. "(뉴욕 시의 골프 소매시장을) 천하통일했지." 이전구 뉴욕골프센터 회장의 말이 실감이 났다. 2층 규모인 맨해튼 35번가 매장은 개별 골프 매장으로는 넓이나 매출 면에서 미국 내 '톱 5' 안에 든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다. 뉴욕과 인근 뉴저지에서 뉴욕골프센터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매장은 모두 12곳. 이 가운데 뉴욕 시 2곳을 비롯해 모두 4곳이 이 회장 소유이며, 나머지 8곳과는 사업 파트너 관계다.



그가 뉴욕에 둥지를 튼 이유는 재미있게도 인생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 1970년대 초 이미 미국에 건너와 미국 태권도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던 형님(이준구 씨)의 권유로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형님과 함께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주로 경영관리를 책임졌던 그는 순탄하게 미국 생활에 적응했다. 그러다 그렇게 산다는 게 싫증이 나서 뉴욕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맨해튼 구석의 한 빌딩 지하실에서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한 지난 1984년 1월부터 내리 5년 적자를 냈다. "그때는 가족 전체가 매달려 청소부터 시작해서 하루 16시간씩 일했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벼락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지난 1990년 거래 은행이던 뉴욕은행으로부터 현재 35번가 매장 건물을 사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돈이 없다고 하니까 은행에서 돈을 빌려줬어요. 뉴욕은행에서 크게 도와준 셈이죠." 이 회장은 그때 미국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신용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새 건물로 옮긴 뒤 매상이 곱으로 늘었고 이때부터 순풍에 돛단 듯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때문에 남들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지만, 이 회장은 "신용을 쌓았기 때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회장이 사람 사이의 신용을 중시하게 된 것은 '인간관계'를 사업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이다.이민 1세대와 1.5세 또는 2세 간에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녀를 본 순간 그것은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리사 고 베어스턴스 이사는 "소수인종이어서 받는 어려움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못 느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 인종 간 갈등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10대 브로커리지 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베어스턴스의 이사직에 오르기까지 소수계 여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없었을까. "85퍼센트가 남자인 직종에서 여자라는 게 오히려 장점이었다."는 그녀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고 이사는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을 따라 필라델피아로 건너온 이민 1.5세다. 고교 졸업 후 MIT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 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에서 2년 가까이 컨설팅 일을 했다. 그리고는 와튼스쿨에서 MBA를 받았으며 이후 줄곧 남미나 동유럽, 아시아 등 신흥시장의 주식, 채권, 외환을 사고 팔면서 펀드매니저 일을 했다. 베어스턴스에 오기까지 그녀가 거친 회사는 프라이스워터하우스 말고도 시티그룹과 ABN암로, 뱅커스트러스트 등 모두 굵직한 회사들이다. 월가의 큰 손인 조지 소로스 등 투자자들을 모아서 블루 보더라는 헤지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고 이사가 성공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여러 분야의 주요 인물들과 쌓은 인간관계도 도움이 됐다. "여러 곳에서 많이 도와줍니다. 큰 은행과 중앙은행의 '키 피플(key people)'들이죠. 가끔은 정치적인 연줄도 도움이 되고요." "(인간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주 여행을 하며 사람들을 만난다."는 고 이사는 "매주 연락하고 몇 달마다 (얼굴을) 보려고 애쓰니 해가 흐르면서 관계가 좋아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이민 1세대가 청과상 등 주로 몸 쓰는 일을 했다면 많은 1.5세와 2세들은 고 이사처럼 주류사회와 교류하면서 주류사회 진출 기반을 닦고 있다. 고 이사는 "주류사회 진출은 바로 저희들(1.5세 또는 2세)의 책임"이라고 말했다.2부 역사적 한계를 딛고 재팬드림을 일구다



김홍주 - 도시락으로 일본을 석권하다1992년 폭도의 물결이 로스앤젤레스 도심가를 할퀴고 지나간 자리. 이곳 한인타운에서 가장 큰 전자점을 운영하던 임정숙 코스모스전자 사장은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당시 텅 빈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임 사장은 현지 언론의 집중취재 대상이었다. 값비싼 상품이 많은 임 사장의 매장을 폭도들이 가장 먼저 약탈했기 때문이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장착한 임 사장은 폭동을 이기고 사업 재기에 성공한 것이나 한인사회의 영향력 등 여러 면에서 로스앤젤레스 한인경제의 대표적인 '여걸'로 꼽힌다. 코스모스전자는 1977년 한인타운 내 전자제품 수리점으로 출발해 시장 흐름을 재빨리 판단하는 임 사장의 남다른 안목으로 1985년에는 한인타운 최대의 전자점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1992년 폭동으로 임 사장은 사업을 정리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폐허가 된 임 사장의 매장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것을 본 한인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와 물건을 구매했다. 그는 "다른 주에 사는 한인이 수 시간 운전해 일부러 가게를 찾아주곤 했다. 한 달만에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도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도움과 거대한 한인 인구의 특성에 맞는 맞춤서비스로 고객을 사로잡게 된 임 사장은 최근 고급형 디지털 전문매장을 개설할 정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관을 만들어 한국제품 알리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03년 매출은 1,300만 달러(한화 약 156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최근에는 국내 중소기업과 협력해 한국 IT 제품 수출에도 열성이다.3부 하이테크 한상들



이종문 - 실리콘밸리를 놀라게 한 노익장릭 이 - 클린턴을 보좌한 IT CEO4부 이민의 역사를 개척하다

성기주 - 교민 위한 금융상품 개발황석하 - 비디오케를 브라질에 장착시키다5부 더 넓은 세상을 찾아 떠난 한민족 보고서

이전구 - 뉴욕 골프스토어를 평정하다멜리사 고 - 이민 1.5세대 여성의 힘한상들은 미국의 주류 경제사회에 참여할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부문으로 '마케팅 능력'을 꼽는다. 마케팅은 현지인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작업. 초기 이민 시기만 해도 미국 사회는 소수 민족에 대한 대접이 좋지 않은 데다 이방인은 언어와 문화가 서툴러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내 경량철골 시장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패코스틸의 백영중 회장(73)은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기업의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26세이던 1956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오레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인디애나 공대 토목공학과를 다시 다녔다. 당장 먹고 살 일이 중요한 그로서는 미국에서나 고국에 돌아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했다.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은 오하이오 주의 벤워트카운티 기술공무원이었다. 영주권이 없는 그가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 은사의 도움이 컸다. 3년간의 기술공무원으로 경력과 미국 생활 기반을 다진 그는 1962년 LA 소재의 슐레스틸이라는 철강회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서 철강수요가 늘어났을 때 그가 개발한 조립식 철강 구조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성공은 그가 소수민족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던 '영업' 활동을 미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벌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제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제가 판매를 담당하는 것이 당연해졌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용인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마흔 중반에 이른 1974년. 그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그만둔다. 패코스틸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갖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가동에는 어려움이 컸다. 일본 업체로부터 철강 제품을 위탁 받아 이를 미국 회사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는데 첫 거래를 트기가 쉽지 않았다. 백 회장은 한 달치 물량을 해당 회사 창고에 넣어주는 배짱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제품이 알차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3개월 만에 120만 달러를 파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3년 후인 1977년에는 미국 서부 7개 주 전체 시장의 50퍼센트를 장악하는 고속성장을 이룬다.



그는 성공의 비결은 '고객 전부주의'에서 찾는다.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만 많이 만들면 자연히 팔린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보다 고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한 뒤에 물건을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물건을 적시에 배달함으로써 고객과의 약속을 지켰다. 패코스틸의 성공에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패코를 통해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던 일본의 스미토모가 직접 물건을 공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차별화 된 지식과 기술로 스미토모의 공세를 막기 위해 '주름잡이 빔'을 개발한다. 이것은 H빔의 가운데 철판에 주름을 잡아 강도를 높인 제품으로 그가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해서 특허를 얻은 첫 제품이다.



패코는 지금 아칸소 공장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 8개 물류기지를 갖고 있다. 연간 판매량은 30만 개로 매출액이 1억 달러가 넘는다. 백 회장은 1999년 미국의 대표적인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이 주관하고 CNN과 「USA투데이」, 시티은행, 나스닥이 공동으로 후원해 매년 미국 기업인에게 주는 상을 받아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단돈 50달러를 들고 간 젊은 청년이 비로소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도시락 산업이 유달리 발전한 일본. 일본 전역에 2600여 개의 점포를 보유, 도시락 재벌로 우뚝 선 '혼케 가마도야'는 한국인 2세 김홍주 회장이 일군 '재팬드림'이다. 지난 1980년 1호점을 시작으로 8년 만에 2,000점을 달성한 혼케 가마도야는 매출 1,500억 엔으로 일본 전체 음식업계 매출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점한다. 사업 10여 년 만에 50여 개의 선발 업체를 제치고 '호카호카 테이'와 함께 일본 도시락 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이 처음부터 도시락 업계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구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돼 대학 졸업 후 구두 제조회사에 입사했다. 3년 후 스스로 사업에 도전하기 위해 종업원 5명으로 독립한다. 당시 일본의 구두 제조회사는 700여 개. 김 회장은 3년 만에 회사를 10위 안으로 끌어올렸다. 비결을 물었더니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한다.

해방 1년 전 호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패전의 폐허 속에서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 구두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 음식 사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는 구두 회사를 직원들에게 미련 없이 물려주고 다시 홀로 선다. 그는 1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계획에 몰두했다.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프랜차이즈(FC) 사업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던 그는 이에 적합한 도시락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1980년 구두 회사로 벌었던 돈을 쏟아부었고,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3년 만에 500개 점, 5년 만에 1,000개 점으로 급성장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현재 직영점은 600개, 프랜차이즈는 2,000여 개에 달한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고베가 본거지였던 '혼케 가마도야'는 많은 점포가 건물더미에 묻혔다. 하지만 김 회장은 여진의 위험 속에서도 지진 바로 다음날 영업을 시작하는 뚝심을 발휘한다. "한시라도 빨리 가게를 열어 지진 피해로 고생하는 지역주민에게 도시락을 나르자."고 종업원을 독려한 그는 이것이 지역주민들에게 신뢰를 얻는 좋은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지난 1999년, 김 회장은 또 하나의 사업에 도전했다. 고국의 제주도에서 리조트 사업을 시작한 것. "조그만 구두 가게, 작은 점포의 도시락 집을 하다 보니 좀더 넓고 큰 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는 게 김 회장의 얘기다. 그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가 또 있다. 버블 이후 잇따라 파산한 간사이 지방 재일교포들의 재건을 돕는 일이다. 그는 이를 위해 2003년 3월 부실 채권을 매매하는 'ARA'라는 채권회수회사를 설립했다. 일본의 채권회수기구(RCC)로 넘어간 재일교포 기업의 채권을 사들여 그들을 빚더미에서 풀어줘 재기를 돕겠다는 것이다. 2005년이면 환갑이 되지만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미국 백악관은 세계 권력의 핵심부다. 릭 이 미국 과학기술솔루션 사 회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악관 정보통신보좌관으로 근무하며 클린턴 전 대통령 측근에서 활동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이 회장은 미 국가안보연구소 최고기술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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