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버리고 셋을 얻는다
이상각 지음 | 들녘
하나를 버리고 셋을 얻는다
이상각 지음
들녘미디어/2002년 8월/319쪽/9,500원
제1편 중용의 원칙으로 승부한다
참고 기다리는 자가 승리한다 - 방연을 꺾은 손빈
손빈은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의 손자로 그 병법서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일찍이 그는 방연이라는 사람과 함께 귀곡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방연은 일찍이 위나라의 장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손빈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손빈이 스승에게 손자병법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암계를 꾸미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간계와 모략으로 얼룩져 있던 춘추전국시대의 세찬 파도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드높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위나라의 장수로 있던 방연은 손빈을 초청한 뒤 위나라의 혜왕에게 소개했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혜왕은 손빈을 부군사로 임명하려 하지만 방연의 계교대로 객경으로 대우하다가 공을 세우면 군사에 임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점차 자신이 손빈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방연은 『손자병법』을 빼앗은 뒤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손빈에게 정씨라는 장사치가 찾아와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다. 이 편지는 손빈의 형인 손평이 아우에게 송나라 왕이 아우에게 고국인 송나라로 돌아가서 함께 가문을 새롭게 세우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손빈 자신은 이미 위나라에 위탁한 몸이니 형의 말을 따를 수 없음을 알고 대성통곡하였고, 형님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구구절절 표현한 답장을 써 이 편지를 전해준 정씨에게 황금 한 덩이와 함께 건네주었다.
하지만 정씨는 방연의 심복이었고, 손빈의 답장을 손에 넣은 방연은 편지 내용을 손빈이 위나라를 배신하고 제나라로 가기를 원하는 것으로 바꾸어 혜왕에게 보여주면서 그를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손빈은 무릎 관절을 잘라내는 월형에 이마에는 ‘사통외국(私通外國)’이라는 넉 자를 먹으로 새겨넣는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손빈은 방연이 그를 모함하여 죽이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손빈이 형벌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자 방연은 거짓 눈물을 흘리며 몸종 하나를 붙여 시중들게 했는데 이에 감격한 손빈은 『손자병법』을 기억나는 대로 필사해달라는 방연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필사가 끝나면 손빈을 죽이려하는 방연의 계획을 알고 있던 몸종은 어느 날 이 음모를 손빈에게 낱낱이 일러주었고, 그때서야 방연의 실체를 알게 된 손빈은 미친 척하면서 방연의 감시의 눈길을 피한 뒤 제나라 위왕의 도움으로 위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로 가 관직을 사양하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 위나라의 혜왕이 중산 땅을 잃은 원한을 풀기 위해 방연을 시켜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단을 방어하던 조나라의 장수는 방연의 군사에 연전연패했고 이 소식을 들은 조나라 왕은 제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제나라의 위왕은 전기를 원수로, 손빈을 군사로 삼아 지원군을 보냈다. 제나라 군사가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자 방연은 부랴부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로 되돌아왔다. 제나라와 조나라의 양군이 맞붙자 손빈은 짐짓 패하는 척 계속 후퇴하였고, 동시에 제나라 군의 야영지에 걸린 솥의 수를 점차 줄여나감으로써 방연에게 제나라 군사가 도망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방연이 의심하지 않고 손빈이 군사를 매복시켜놓은 마릉 협곡으로 들어서자, 이를 놓치지 않은 제나라 군사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제야 제나라에 손빈이 있었음을 안 방연은 하늘을 원망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원수를 갚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 손빈은 이후 초야에 묻혀 살면서 병법을 연구하다 천수를 마쳤다. 실로 그는 참고 기다리는 자가 승리하고야 만다는 중용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한 인물이었다.
제2편 시기에 맞는 방법을 쓴다
좋은 법도 때와 사람이 맞아야 한다 - 왕안석의 실패한 변법
왕안석은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증공이나 구양수 등 당대의 대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장성한 뒤에는 관직에 등용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귀향했다. 그러는 가운데 한위가 신종 황제에게 경서를 해독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들려줄 때마다 왕안석의 주해라고 알려주어 신종의 뇌리에 왕안석의 이름이 굳게 각인되었다.
얼마 뒤 황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의 신임을 얻게 된 왕안석은 본격적으로 정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권력의 중추에 서게 된 그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펴기 위해 진승지, 여혜경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농전, 수리, 청묘, 균수, 부역 면제, 시장 거래 등 여러 방면을 포괄한 규제들을 제정하였다. 왕안석의 개혁 조치에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그를 신임하고 있었던 신종은 반대 의견을 표한 관원들을 귀양 보내는 등 강경책을 썼다.
왕안석이 입안한 정책들은 일부 지방에서만 아주 큰 효과를 보고 있던 법을 전국적으로 통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정책의 시행으로 개선되는 효과 만큼 역효과도 생김에 따라 현실에서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왕안석은 그의 권세를 이용해 관원들을 매수했고 신종은 왕안석의 정책이 백성들에게 이롭다고 굳게 믿게 되어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을 도리어 설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의 확고한 신임을 등에 업은 왕안석은 점차 자기 뜻대로 각종 제도를 시행, 폐지하였으며, 이 같은 개혁에 놀란 황태후가 신종에게 변법의 후유증을 고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희녕(신종 즉위) 7년, 열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제서야 신종은 편법의 폐단을 깨닫고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법령을 모두 폐기하였다. 하지만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법은 다시 더 가혹하게 집행되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신종은 왕안석을 다른 곳으로 전근시키라는 태황태후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왕안석을 신임하던 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린 황제 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행하던 태황태후는 일찍부터 왕안석의 신법이 야기한 폐단을 알고 있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왕안석의 조치를 일부 완화시킴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왕안석에 의해 축출되었던 사마광을 다시 불러 중용하였다. 사마광은 태후의 뜻에 따라 백성들에게 불리한 변법들을 점차로 폐지해갔으며, 쫓겨났던 예전의 충신들을 불러들여 정사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마침내 왕안석이 시행하던 변법이 모조리 폐지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3편 하늘을 거역하면 망한다
공든 탑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진시황의 충신이었던 이사는 언변이 좋고 재능이 뛰어나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공신이지만, 말년에 기득권과 봉록을 보전하기 위해 절개를 꺾었다가 모든 것을 잃은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사기』에 따르면 이사는 젊은 날 군청의 보잘 것 없는 관리로 일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관직을 내놓고 순자의 문하로 들어가 제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다. 그후 이사는 “평생을 비천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은 세속에 탐닉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것은 오늘날의 선비가 취할 바가 아닌 듯하다.”고 여겨 진나라로 가 여불위의 휘하에 들어간 다음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시위가 되었다. 황제를 만나게 된 그는 진시황에게 “여섯 제후국들이 모두 진나라의 강대함에 떨고 있으며, 주 왕실 또한 쇠락했으니 이때가 천하통일을 이룰 적절한 시기”임을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이사를 신임하여 그에게 통일 대업을 진두지휘토록 했다. 20년 후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했고, 이사는 승상 자리에 올랐다.
천하를 제패한 진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 방식의 정책을 견지했다. 그러던 중 진시황 34년, 함양의 궁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제나라의 순우월은 은주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종친이나 공신들을 내쳐 만세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간했다. 이 말은 들은 진시황은 승상 이사에게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에 이사는 과거의 경험만 중시하고 자신들의 학설만 내세워 조정의 법령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자들을 방치한다면 가까운 시기에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민간에 나도는 시문이나 서책, 제자백가들의 저작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울 것을 건의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유례 없는 분서갱유가 시행되었으며 이사는 옛날부터 내려온 지혜로부터 과감히 단절하고 나라의 통일 법령 제정, 문자 통일, 별궁 건축 등 모든 새로운 제도가 진시황 대부터 시작되게 했다.
진시황 37년 10월, 황제가 연해주 일대로 시찰을 나가는 도중 갑자기 병에 걸려 사망하자 당시 함께 있던 이사와 조고는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함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이때 조고는 태자 부소를 제쳐놓고 호해를 옹립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이사에게 권하였다. “부소가 황제가 되면 반드시 몽염을 재상으로 임명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승상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에 이사는 조고의 음모에 가담하여 호해를 태자로 봉했음을 공포하고, 부소에게는 자결을 명하는 진시황의 편지를 보냈다. 자결한 부소 대신 호해는 아무런 제지 없이 제위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호해가 정사를 게을리하는 사이 조고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진시황의 왕자와 공주들을 모두 죽이고, 반역의 여지가 있는 대신들을 잡아들였으며, 호해를 위해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고 세금과 병역, 부역을 과중하게 부과했다. 이런 학정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마침 군수로 있던 이사의 아들이 반란군에게 참패해 조정의 추궁을 받게 되자 이사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조고는 곧 이를 빌미삼아 이사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자백을 종용하였으며,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이사는 결국 이를 시인하여 처형되고 그의 삼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다.
훗날 태사공은 이사를 일컬어 이렇게 탄식했다. “이사는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고, 승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니 중용을 받들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만년에는 작위와 봉록에 눈이 어두워 절개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제4편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라
미래의 위기를 잊지 않는다 - 월왕의 참모 범려
안정된 처지에 있을 때도 잠재적인 위기를 잊지 않는 것은 지성인의 처세술이다. 자신이 유리한 지위에 있을 때 언제나 불리한 처지로 전락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월나라의 범려야말로 그런 처세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와신상담’의 치욕을 씻었다. 그후 월나라는 승승장구하면서 열국의 패권을 거머쥐었고, 그 공으로 범려는 상장군의 호칭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범려는 자신이 섬기고 있던 구천이 고난은 같이할 수 있어도 부귀는 같이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심하다가 결국 구천에게 편지를 보내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의 어느 시골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어 금세 갑부가 되었는데 제나라 왕이 그를 초빙하려 했지만 응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다음 사라졌다. 그후 범려는 다른 지방에서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았다.
이처럼 처신한 범려와는 달리 함께 월나라를 일으킨 동료 문종은 범려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고 월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월나라의 경쟁국이었던 제나라에서 편지를 보내 제나라로의 귀의를 청하자 마음이 심란하여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간신들은 구천에게 문종이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고 고했다. 이에 의심이 생긴 구천은 보검을 보냈고, 이를 받은 문종은 일찍이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 칼로 자결하고 말았다. 범려와 문종, 두 사람은 함께 협력하여 오나라를 격파하고 공명을 이루었지만 각자의 처세에 따라 전혀 상반된 결말을 맺었다.
제5편 군자는 우매와 누추를 가리지 않는다
온유로 편벽을 무찌르다 - 염파를 감복시킨 인상여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는 횡포를 부리던 염파를 포용해 화해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아랑이 넘치는 인물로 알려졌다.『사기』에 따르면 인상여가 진나라에 가서 귀중한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조나라로 되찾아오자 조왕은 인상여를 크게 치하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장군 염파는 “그 동안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공으로 이 자리에 앉았는데 세 치 혀만 놀린 인상여가 더욱 높은 지위를 얻었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자가 내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으며, 병을 핑계로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측근들조차 분개하여 그를 질책하였는데 인상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진왕 앞에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신하들까지 추궁한 적이 있었소.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소. 지금 진나라가 우리 나라를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은 조정에 염파 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인데 만일 우리가 불화하게 되면 진나라에게만 좋은 일이 될 것 아니겠소?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이익을 위함이지 결코 두려워해서가 아니오.” 이 말을 들은 측근들은 크게 깨닫고서 자신들도 염파의 수하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영문을 모르는 염파의 콧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이 같은 사실을 들은 세객 우경이 조나라에 와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먼저 염파를 찾아 그간의 공적을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 우경은 인상여 측근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인상여와 합심해야 함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염파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경을 통해 인상여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회초리를 한아름 짊어지고 인상여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했다. 이에 깜짝 놀라 뛰쳐나온 인상여는 염파를 끌어안고 염파의 사죄에 고마움을 표했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고 그후 함께 마음을 모아 조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인상여의 온유한 수단이 끝내 편벽된 생각을 품었던 염파를 감화시킨 것이었다.
제6편 어려울 때는 몸을 지킨다
그는 왜 강물에 투신자살해야 했던가 - 굴원의 오판
굴원은 초나라 사람으로 식견이 넓고 박식했으며, 언변도 뛰어났다. 그는 뛰어난 외교 능력으로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이를 질투한 상관대부가 왕을 찾아가 굴원을 모함하자 회왕은 점차 굴원을 멀리했다.
결국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제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은 후 다른 제후국들과 대치하게 된 초나라의 회왕은 굴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로 사돈을 맺자는 진나라 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경내로 들어섰다가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왕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진나라 혜왕은 초나라 영토의 일부를 요구했고, 회왕은 간신히 탈출하여 조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나라에서는 장남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초 회왕의 객사 소식을 들은 굴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을 판 후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지 않으면 괴롭다. 사실 그 우물의 물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군주의 통찰력이 밝으면 그 우물물을 마시듯 상하 모두 복을 누릴 수 있고, 그 반대라면 행복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초나라 회왕의 차남은 간신들과 모의해 초나라 왕에게 굴원을 벌하라고 주청했고, 결국 굴원은 장사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굴원은 여동생이 마련해준 전답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도와주었다. 다가올 초나라의 운명과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던 굴원은 어느 날 아침 비분에 잠긴 채 탄식하다가 멱라강으로 나가 돌을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
훗날 사마천은 굴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굴원의 「이소」,「천문」,「초혼」 등을 읽고 그 애절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사에 가서 그가 자결한 곳을 둘러보고 눈물을 금할 수 없었으며, 가생이 그의 제사를 지내던 곳까지 돌아본 나는 애석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탁월한 재주로 제후들을 설득했다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 자결의 길을 택했단 말인가.”